#57. movie sketch
이름 없는
예술가들에게
직장생활을 하면서 가장 힘든 건 루틴입니다. 괴롭히는 상사, 작은 연봉, 야근은 외부의 적이고 진짜 삶을 갉아먹는 건 반복되는 생활입니다. 어제와 오늘이 구별되지 않고 내일도 딱히 기대되지 않는 그런 삶은 어른이 되었다는 증거이기도 하죠. <패터슨>은 패터슨 시에 사는 버스 운전사 '패터슨'과 검은색을 사랑하는 그의 부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하루를 단단하게 살아가는 패터슨의 모습과 그의 시가 변화되어 가는 과정은 일상이 예술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탐구하는 보고서 같기도 합니다. 예술은 별다른 게 아니라 일상을 똑바로 마주하며 살아가는 삶 그 자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패터슨은 매일 아침 알람 없이도 일어날 정도로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혼자 밥을 먹고 운전석에서 시를 쓰다가 버스를 운전합니다. 점심엔 부인이 싸준 도시락을 먹으며 그때 또 시를 쓰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기울어져있는 우편함을 똑바로 세우고, 저녁을 먹은 후에는 애완견을 산책시키러 나갑니다. 마지막으로 늘 가는 동네 바에서 맥주 한잔에 담소를 나누면 그의 하루는 끝이 납니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조금씩 달라지는 건 그가 마주하는 사람들입니다. 패터슨 시에 사는 패터슨은 거의 매일 같이 쌍둥이를 마주칩니다. 오래된 시인이 쓴 모든 사랑 시의 주인공 이름은 로라이고, 흑백 고전영화 속 주인공과 그녀는 쏙 닮았습니다. 평범한 하루에도 삶은 우연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짐 자무시는 신기한 감독입니다. 그를 세상에 알린 영화 <천국보다 낯선>이 개봉했을 때 많은 관객들은 의문을 품고 극장을 나서야 했습니다. 심지어 영화를 본 그의 아버지가 이게 정말 끝이냐고 물었다고 하죠. 그는 익숙한 이야기 방식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기승전결도 없고 극적인 클라이맥스도 없어요. 대신 실제 삶처럼 모든 장면들이 영화 안에서 동일한 무게를 지닙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일상을 중간중간 잘라내 만든 다큐멘터리처럼 설명하기 어려운 작품이 돼버리지만 맥락 없는 생략들 사이에선 어떤 것들이 생겨납니다. 짐 자무시의 영화는 시적입니다.
<패터슨>은 예술의 창작과정을 다룬 영화이자 예술가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영화 속에는 무명의 예술가들이 등장합니다. 빨래방에서 홀로 랩을 연마하는 남자, 일상마저 드라마틱한 배우 지망생, 조숙한 꼬마 시인 등등. 그중에서도 가장 요즘 사람에 가까운 로라는 매일 사고 치듯이 자기만의 창작물을 만들어냅니다. 거창하게 시작하고 결과에 쉽게 만족하죠. 시대가 변하면서 예술에 다가가는 사람들의 태도도 변했습니다. 그녀는 기타리스트도 화가도 될 거 같지 않지만 하나뿐인 남편을 진심으로 응원하는 사랑스러운 사람입니다. 패터슨이 쓰는 시의 주인공이기도 하죠. 삶은 그 자체로 예술이 되기도 합니다.
영화는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그들을 담담히 비추어내면서 특별히 삶과 예술을 함께 쌓아가는 이들에게 무한한 애정을 드러냅니다. 패터슨은 매일 버스를 운전하듯이 꾸준히 시를 씁니다. 처음 등장한 시는 그가 관찰한 것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확성기처럼 생긴 성냥갑은 푸른색을 하고 있다. 두 번째는 차원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습니다. 세 번째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 로라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우연히 만난 소녀 시인에게서 비유와 묘사에 대한 자극을 받아 다시 한번 사랑하는 로라에 대한 시를 쓰죠. 조금씩 변해가던 패터슨의 시는 키우던 강아지 마빈 덕분에 산산조각이 납니다. 의욕을 잃은 그의 앞에 우연히 나타난 일본인 남자는 패터슨이 시를 쓰는 사람이라는 걸 알아봅니다. 생김새도 언어도 전혀 다르지만 같은 열망을 품은 이들은 금세 마음을 나눕니다. 낯선 이가 건네준 응원으로 패터슨은 다시 시작할 기운을 얻습니다. 새롭게 마주한 백지에 적히는 단어들은 예전과 달랐습니다. 그의 시에도 짐 자무시의 영화처럼 어떤 것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겁니다.
<패터슨>은 짐 자무시의 전작들에 비하면 친절하게 이야기를 안내하는 작품입니다. 일상처럼 평범한 영화는 삶의 한 귀퉁이에 들어와 작은 위로를 건넵니다. 주인공이 동경하는 시인이 살아있었다면 시로 썼을 법한 삶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 누구나가 특별함을 꿈꾸는 세상에서 자기만의 하루를 차곡히 쌓아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무척 아름답게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