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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1828~1910)

세계적인 대문호이자 사상가인 러시아의 레프 톨스토이(1828~1910)는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 생을 마감했다.

명문 백작 가문에서 귀하게 태어난 톨스토이이기에 상류사회의 고급스러운 삶과 평온한 안락을 누리며 살 수 있었지만, 이러한 사치 생활에 길들여지기보다는 평생을 민중과 함께 진실로 소통하며 사는 소박한 삶을 추구했다.


그는 유명한 작품 '전쟁과 평화'(1869), '안나 카레니나'(1877) 등을 통해 최고의 작가 대열에 합류하였다. 그러나 그는 40대 후반부터는 삶과 죽음 그리고 종교의 문제에 깊숙이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현대 문명 비판을 토대로 한 많은 종교적 사상을 글에 담아내었다.


그는 죽음에 대한 허무와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 현실을 긍정하고 내세를 부정하며, 그리스도교적 아나키즘과 자본주의 문명을 부정하는 자신만의 심오한 사상을 확립해 그만의 ‘톨스토이 교’를 만들고자 하였다.


노년에는 근대 문명의 환락을 부정하며 자연으로의 회귀를 주장하였다. 그는 스스로 도시를 떠나 농촌에 살며 채식과 금연, 금주를 하며 살고자 노력하였다. 또한, 그는 도덕적이며 참되고 진실하게 살며 선하게 살 것을 권유하며, 그만의 독특하고 독자적인 무정부주의 철학을 완성해 나갔다. 그리하여, 톨스토이는 어떤 권력과도 화합하지 않았으며 어떤 형태의 혁명적 분위기와 무력에도 반대했으며, 이러한 사상을 자신의 작품에 투영하였다.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는 현실과 공상을 결합시킨 타인들을 묘사하면서 자기 자신의 사상과 불안감을 표현하려 했으나, 철저한 사실주의 자이며 도덕주의자인 톨스토이는, 자기 자신과 그의 생활에 있었던 실제의 사건을 주로 묘사하기도 하였다.


그는 현실의 사랑을 기조로 한 예술에서 출발하여 종교에까지 몰입한 작가이기에, 한 작품이 예술가의 영혼으로써, 독자와 관중을 '감염'시킬 수 있을 때 비로소 예술이라 할 수 있다는 논지를 폈다. '종교 예술'로써 '신과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우러나온' 감정을 통해 인간을 감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는 또한, 지나칠 정도로 심한 ‘도덕주의자’였기 때문에, 하얀 거짓말조차도 인정하지 않았으며 허위와 거짓에서 벗어날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자신만의 ‘톨스토이 교’를 만들어 내었으며, 그렇게 자신이 제시한 새로운 이론의 도덕적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셰익스피어나 바그너의 몇몇 작품들은 예술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주장을 펼친 그의 진짜 이유는 대중과의 ‘진정한 의미의 소통’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어느 특권층만의 문화와 문학 그리고 예술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농부도 일반적인 대중도 누구나 동등하게 느끼고 즐길 수 있는 문학을 그는 진정 원했기 때문이다.


그는 아가폐적으로 이웃을 사랑하며 죽음을 늘 기억하며 착하게 살기를 원했기에, 비도덕적이고 거만한 귀족을 증오하였으며, 그들의 공연과 오페라를 즐기는 모습을 ‘너무나 한가한 할 일 없는 사람들의 나태하고 지루한 일상’으로 간주하였다. <계몽의 열매 Plody prosveshcheniya〉라는 그의 희곡에서는 이러한 귀족사회의 결함을 유쾌하게 풍자하는 모습이 잘 담겨 있다.


이후 그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 '크로이체르 소나타' '부활' 등의 작품을 뒤로하고 여행을 떠났고, 1910년 11월 20일 랴잔 역의 한 외딴 마을 아스타포보의 간이역에서 폐렴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는 늘 인생에 대해 절박한 고민을 하였으며, 이를 몸소 체험하고 더 나아가 그 사상을 실현하려 스스로 노력하며 살아간 작가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문학뿐만이 아닌 사회적인 이슈와 문제에도 귀를 기울여, 교육·난민 구제의 방면에도 힘썼다. 이러한 그의 행실이 문학과 예술 분야에서의 ‘진정한 대중과의 소통’에 대한 간절한 목마름을 시원하게 해소시켜주는 역할을 담당하였기에, 현대에도 그의 빛은 꺼지지 않고 더욱 밝게 빛날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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