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사의 love yourself
바로 이 쓰고 싶은 기분이 나를 살렸다.
얼마나 다행인가..
나는 힘들다고 삶을 허탈하게 내려놓기 보다
쓰는 삶을 선택한 것이다.
한 동생이 말했다. 그녀의 글 속에서 - 그간의
내 고군분투를 아니까 할 수 있는 그 말-
언니가 그 와중에도 너무 망가지지 않고, 잘 일어
난 것은 부모님을 통한 그 사랑받았던 그 시절
기억들이 아닐까 한다고..
그렇게 힘든 와중에도 스스로를 놓지 않고
길을 찾아가게 된 원동력은 부모님의 헌신과
사랑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글쓰기라는 아름다운
하지만 치명적이고 필수적인 도구를
택한 것일지 모른다.
결론적으로 생각해 보면,
정말 맞는 말이다.
과거에 나는 내 자존감이 굉장히 낮다고 생각했다.
글을 쓰면 쓸수록 발견한 사실은 그 반대였다.
굉장히 자존감이 높기에, 나는 귀하고 귀한 사람이
기에 -우리 부모님이 내게 보여 준 그 사랑만큼-
그에 걸맞은 삶을 찾고 싶은 것이었다.
부당한 대접을 해오는 그들을 더 이상 마주하고
싶지 않은 것. 그 누구라도, 내 남편이라도, 내게
내가 생각하는 만큼의 존중을 보여주지 않으면
그렇게 마음이 아리고 슬펐던 것이다.
내 부모가 나에게 보여준 사랑을 알기에 그런
귀한 눈으로 나를 봐주는 곳에 나를 두고 싶은
욕구. 그것이 내가 가져온 방황의 시간이고,
살고 싶은 삶의 모양을 그려가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뒤늦게 알게 된 사실..
나는 자존감이 참 높은 사람이라는 것..
그것이 너무나 반가웠다.
글쓰기를 통해 나를 더 알게 되고 더 높은 자존감을
가진 나로 성장하는 기분이 참 좋았다.
그렇게 쓰고 싶은 기분과 나는 수시로 만나며
성장하고 성장했다. 지금도 진행형인 그 성장,
그 기분..
쓰고 싶은 기분..
생업이 바쁘다고 무시할 수 없는 나의 내밀한
마음 상태, 그것을 봐주는 일이 얼마나 중요할까?
그것이 쌓이고 쌓여 표출되지 못한 감정이 되면
일단 몸이 아프게 된다.
나의 경우에도 이유도 모른 채 몸과 마음이 아주
자주 많이 아프던 날이 있었다.
과거에는 목, 어깨의 통증이 가장 컸고, 심리적으
로는 우울증이 심했으며, 불안장애도 세트로 왔었
다.
물리치료, 진통제 없이 힘들 정도로 버티던 날이
많았고, 마음도 형편없이 나락으로 가 있었던 날들.
하마터면 자동차 핸들을 꺾어 버릴까..
아침이 왜 올까.. 울부짖으며 살던 날들을 뒤로하고
지금은 어떨까?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묵은 고통스러운 에너지가
많이 빠져나가 몸과 마음이 좀 가벼워졌다.
마음의 지옥에서 어떻게 빠져나오는지를 알게 된 나는
마음에 소란이 찾아오면 그것을 지켜보는 힘이 커졌다.
참 신기했다.
나라는 하늘 허공 바탕 위에 한마음이 피어올라서
그 마음이 내 허공에 어떻게 변화해 가는지가
눈에 보이니, 모든 것이 그와 같이 지나가는 것이
란 걸 깨달은 것이다.
그걸 보는 과정이 신기하고, 분별이 탄생했다가
소멸하는 것이 재밌기도 했다.
모든 것은 우리 마음이 하는 분별에서 시작이었다.
이건 좋아, 저건 싫어.
그 마음의 분별과 망상이 우리를 괴로움으로
떨어뜨린다.
결국 한 마음 바탕 위에서 일어나는 스토리 텔러
들의 이야기가 전부인 것이다
스토리텔러는 에고다.
우리의 에고는 온갖 분별을 하며 에고가 보기에
좋은 것과 나쁜 것들을 취사선택한다.
내게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좋은 말, 나쁜 말을
가리고 울고 웃으며 한시도 평온할 틈이 없다.
그 에고에 마음이 놀아나면 삶이 지옥이다.
하지만
마음공부가 계속되면, 그 에고의 목소리를 더 이상
진실이라 믿지 않게 된다.
아.. 또 에고가 스토리텔링을 시작했구나..
나는 피해자, 희생자 모드가 되어, 그들을
처단하는 중이구나... 스스로를 학대하며,
피해자가 되는 놀이를 즐기는 에고..
그런 에고를 듣고 있으면, 그리고 마음의 눈으로
보고 있으면 이제는 귀엽다..
에고도 한마음 바탕 위에 존재하는 한 법의 형태
이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는 살아 남고자 발악한다.
한마음.
그것이 우리의 본연의 존재..
모든 사람들이 의식이라는 한마음을 쓴다..
그래서 당신과 나의 세상이 다른 것이 아닌 하나다.
한바탕에서 피어나고, 사라지는 일들..
에고는 분리된 우리들이라 착각하며 둘로 가르지만
통으로 하나임을 알 때
그 괴로움이 사라질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소리가 나를 듣는
것일지도, 내가 호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호수가 나를 바라보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
내가 창밖을 보고 있지만 온 세상 허공이
나를 보고 있을지 모른다면, 어떨까..
바람이 내게 불어오는 것이 아니라 바람을
느끼는 그 순간은 내가 바람이기도
한 것이라면 어떨까
오늘 글은 세상이 통으로 나인지 모르는 진리
앞에, 포근 한 시간을 맞는 나를 조명하는 글이다..
그래.. 아직 전부 와닿지는 않지만, 적어도
이 글을 쓰는 이 시간의 나는 알고 있다.
글을 쓰는 주체가 내 몸뚱이가 아니라, 이 내 손이
아니라, 내 의식이라는 것을..
글을 쓰는 순간 내 몸이 사라지고 그저 의식으로,
강렬한 몰입으로 순간이 존재하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하여, 내 눈이 사물을 보고, 내 코가 냄새를 맡고,
내 귀가 소리를 듣는다는 일이, 이 의식의 작용
이 없다면 불가하다는 것을 안다면,
결국 나라는 존재는, 듣고, 냄새 맡고, 보는 존재가
아니라 의식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마음을 두지 않으면 때론 눈앞에 두고도 보지 못
하며, 들려오는 음악 소리도 듣지 못한다.
마음을 두는 일, 의식을 쏟는 일이, 진정한 나를
발견하는 일이다.
그 모든 것을 알아차리는 바탕의 나..
그것이 오늘도 나를 살린다.
더 이상 추구할 것 없이, 그것이 하는 일들을
바라보는 내가 있다.
그저 그것 본연의 이끌림대로 마음을 푹 쉬고
살자..
긴 시간의 추구가 멈추니 이 순간이 바로 대 자유,
자유함 그 자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