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모드에서 내려오기

리사의 마음 카페

by 김리사

피해자라는 이름의 역할극을 마치며


​오랫동안 나는 스스로를 피해자라 믿어 왔다. 타인에게 입은 상처를 훈장처럼 달고, 누군가 내 고통을 연민해 주길 바라는 '피해자 모드'로 생을 지속해 왔다.


그런데 오늘 아침, 문득 놀라운 반전의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내가 피해자가 아니라, 어쩌면 가해자였을지도 모른다는 자각이다. 그가 피해자가 어느 순간에 되어 있었으므로. 내가 인지하지 못했을 뿐.


​분명 그가 나를 아프게 했고, 상처를 남긴 채 떠났다. 영락없는 피해자의 서사였다. 하지만 인생의 진리는 자명하다. 소리가 나려면 두 손바닥이 마주쳐야 한다. 내가 그곳에 존재했기에 그가 와서 소리를 낼 수 있었다. 그가 가해자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나 역시 어떤 면에서 그 역할극의 상대역이 되어주었던 셈이다.


그리고 내 생에서 알게 모르게 나도 그가 아닌 다른 곳에서 가해자였을 수도 있다. 스쳐지나간 수많은 인연에 말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니 서늘한 진실이 보인다. 내가 피해자라고 주장하며 떠나버린 그 빈자리에, 남겨진 가해자는 다시 스스로를 피해자로 정의하며 남는다.


인생은 돌고 도는 법이라, 이제 그가 피해자가 될 차례가 온 것이다. 결국 우리 모두는 각자의 행동에 책임을 지며 살아갈 뿐이다. 인과와 카르마의 순환 속에서, 사실 억울해할 일은 그리 많지 않다.


​명쾌한 정답보다 내면에서 솟아나는 작은 통찰과 반성이 나를 더 밝게 비춘다.


쓰는 삶이란 참으로 귀하다. 적어도 내 마음의 바닥을 정직하게 들여다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피해자 모드를 벗어 던진 오늘 아침, 시야가 한결 맑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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