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큐와 루손섬 표류기를 남긴 어느 조선 상인 이야기

by YECCO

2023년, 국립인천해양박물관에서 새로운 기록물을 발굴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 기록물의 제목은 바로 『표류인 문순득 일기』입니다. 그런데 문순득이 누구길래, 그가 쓴 표류기의 발굴 소식에 역사학자들이 관심을 보인 걸까요?


일기의 필자이자 이 글의 주인공 문순득은, 현재의 전남 신안군 우이도 일대에서 활동하던 평범한 해산물 장수였습니다. 하지 여느 때처럼 생선을 구하기 위해 총 6인의 인원으로 출항했던 문순득의 배는 그만 풍랑에 휘말리고 맙니다. 이때가 1802년 1월로, 그때 시작된 표류는 훗날 그의 삶은 물론 주변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칩니다. 문순득이 표류하면서 남긴 이야기, 지금부터 알아봅시다.


갑작스러운 류큐로의 표류

지도 출처: ©국토지리정보원 / 인포그래픽: 공윤재

문순득 일행이 탄 배는 표류 끝에 대도(大島), 지금의 일본 가고시마현 아마미오 섬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풍랑을 맞으며 떠내려오는 동안 선체가 많이 손상된 상태였기에, 문순득 일행은 타고 온 배를 포기하고 다른 배를 얻어 타기로 결정합니다. 하지만 당시의 항해 체계상, 대도에서는 곧바로 조선이나 청으로 출항할 수 없었고, 지역의 중심 항구로 가야 국외로 가는 배편을 탈 수 있었습니다. 이에 문순득 일행은 류큐(유구)의 박촌(泊村), 현재의 오키나와 나하 일대로 향했습니다.


류큐에서 생산된 도자기 ©공윤재

평소에도 항해 기록을 남기곤 했던 문순득은, 이때 류큐에서 보고 접한 현지 문화를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그는 외모, 의복, 가옥, 소지품, 예의범절은 물론 장례 문화와 같이 세부적인 요소까지 기록으로 남기며, 19세기 초반 류큐 일대의 생활상이 어떠했는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문순득 일행은 대도-류큐에서 총 9개월가량을 머무른 끝에, 청나라 복주(福州, 현 푸저우)로 가는 진공선에 탑승했습니다.


2차 표류, 필리핀 비간으로 가다

지도 출처: ©국토지리정보원 / 인포그래픽: 공윤재

그러나 불행히도 문순득 일행은 또다시 풍랑을 만나 남쪽으로 표류했고, 여송(呂宋)의 서남마의(西南馬宜), 지금의 필리핀 루손 섬 카보가오(Cabugao)의 살루마기(Salumague) 항구 일대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문순득과 동승했던 외국인들과 현지인 사이에서 마찰이 발생했기에, 문순득 일행은 현재의 비간(Vigan) 일대로 내려와 체류해야 했습니다.


비간의 성 바오로 대성당 ©Västgöten, via Wikimedia Commons

문순득은 여송에서도 고유 풍속에 대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대표적인 기록이 여송의 '신묘(神廟)'인데, 바로 성 바오로 대성당(St. Paul Metropolitan Cathedral)을 가리킵니다. 당대의 루손섬은 스페인의 영향을 받아 천주교 문화가 자리잡았는데, 당시 조선은 신해박해(1791)와 신유박해(1801)가 자행되는 등 조정 차원에서 천주교 박해가 자행되던 상황이었기에, 이러한 기록은 당대 지식인의 이목을 끌었습니다. 훗날『표해시말(漂海始末)』을 남기는 데 공헌한 정약전 역시 천주교를 믿어서 신안으로 유배를 온 것이었기에, 문순득의 기록에 관심을 보인 것입니다.


3년만의 귀환과 그때의 기록들



지도 출처: ©pekachu,via wikimedia commons / 인포그래픽: 공윤재

여송에서 체류하던 문순득 일행 중 4인은 1803년 3월 먼저 출항했으며, 문순득은 약 5개월가량을 더 체류한 뒤 1803년 8월 오문(澳門, 마카오)로 향하는 상선에 탑승하여 귀국을 위한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다만 마카오 이후부터는 풍속에 관한 분량이 류큐-여송에 비해 매우 짧아서 관련 기록을 살펴보기는 어렵습니다.

이후 문순득은 오문에서 3개월 체류 후 북경까지 5개월간 청 영토를 종단했으며, 그로부터 다시 8개월 후 마침내 집으로 돌아오는 데 성공합니다.



<유암총서>의 <표해시말> 필사본 ©국가유산포털

문순득이 표류를 끝내고 돌아온 후, 위의 내용처럼 정약전이 문순득의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며『표해시말』의 제작이 이뤄졌습니다.『표해시말』은 크게 표류 여정을 기록한 부분, 표류 지역의 풍습을 기록한 부분, 그리고 표류 지역 중 류큐와 여송의 언어를 수록한 부분의 3부로 구성되어있습니다. 특히 필리핀 및 천주교와 관련 문화, 서양 선박 등의 문화를 직접 경험한 것은 기록이 남아있는 조선인 중 최초이기에, 정약전은 문순득에게 천초(天初; 하늘 아래 최초)라는 호를 지어 그에게 경의를 표했습니다. 비록『표해시말』의 원본은 실전되었지만, 정약용의 제자였던 이강회의 『유암총서』에 그 내용이 필사되어 전해지고 있습니다.


한편 서두에서 언급한『표류인 문순득 일기』역시 『표해시말』과 마찬가지로 문순득이 류큐-여송 표류담을 다루고 있고 대부분의 내용도 일치하지만, 『표류인 문순득 일기』는 『표해시말』과 달리 여송 사람들의 천주교 신앙 생활 묘사가 삽입되어있는 등 일부 차이점이 존재하는 것으로 확인되어 현재 연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문순득이 이같이 현지의 문화를 자세히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표류 기간 동안 현지의 언어를 익혔던 것 이 주요하게 작용했습니다. 문순득은『표해시말』말미에 현지의 언어를 조선의 언어와 대응시켜 수록했으며, 조선에 필리핀인이 표류해오자 조정의 부름을 받아 필리핀어를 통역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9년만에 모국어를 들은 필리핀 표류자들은, 실록에 따르면 "미친듯이 바보처럼 정신을 못차리고서" 울었다고 합니다.



문순득의 표류는 뜻밖의 재난을 맞닥뜨리며 시작되었지만, 그 시기의 경험을 기록하고 전한 결과 조선 사회에 새로운 시야를 제공하는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표류인 문순득 일기』과 『표해시말』은 문순득의 표류기가 당대에 끼친 영향력을 지금도 전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더 자세한 분석을 위해 오늘날에도 활발히 연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참고문헌]

국립인천해양박물관 소장유물총서 1,『표류인 문순득 일기』, 2024.

순조실록12권, 순조 9년 6월 26일 을묘 1/1 기사.

최성환, '홍어장수 문순득의 표류기, 『표해시말』', 글터, 2024.


(글머리 이미지: 『표류인 문순득 일기』 ©국립인천해양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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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CCO 콘텐츠팀

공윤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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