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마운드에 태극기가 처음 꽂히던 날

한국 야구의 시작을 찾아서

by YECCO

대한민국의 야구 열기는 매년 뜨거워지고 있습니다. 지난해에는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1,200만 관중을 동원했으며 2026 WBC에서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이 17년 만에 8강에 진출하면서 야구에 대한 관심을 더 많이 불러일으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삶 속에 녹아 있는 야구는 한반도에서 어떻게 그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을까요? 또 지금 국제무대에서 화려하게 빛나는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의 첫 경기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야구의 시작을 알아보면서 대한민국이 세계무대에 얼굴을 알린 첫 순간을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호기심 가득한 눈과 선교사

19세기 말, 조선은 세계에 문호를 개방하면서 세계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한반도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야구의 탄생지 미국도 수많은 나라들 중 하나였습니다. 1876년 전국 대회가 생겨났을 정도로 야구는 미국에서 인기 스포츠였습니다. 정확한 시기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1896년 한반도에서 열린 첫 야구 경기가 미군과 미국 민간인들의 경기였을 정도입니다.


조선 청년들은 한양의 공터에서 머나먼 타국에서도 공을 던지고 치며 즐거워하던 이방인들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이런 조선 청년들을 유심히 지켜본 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미국인 선교사 필립 질레트입니다. 한국에 YMCA를 설립하기 위해 파견된 질레트는 청년 선교에 스포츠가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하여 조선의 청년들에게 야구를 소개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당시 야구 장비의 가격이 비쌌음에도 질레트는 야구를 전파하기 위해 야구 장비를 한국에 들여온 다음, 야구에 관심을 가진 청년들을 모아 야구를 가르쳤습니다. 그렇게 한국 최초의 야구팀인 황성 YMCA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2-1.png 황성 YMCA 야구단 ©국사편찬위원회



어려운 현실 속에서

질레트가 가져온 야구는 한반도 곳곳에 퍼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조선 사람이 야구하는 모습에서 자극받은 청년들은 자신들의 학교에도 야구팀을 만들기 시작했으며 몇몇 지방에서는 일본 사람들이 야구하는 모습을 어깨너머로 보고 야구를 시작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한반도 곳곳에서 야구팀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1910년대 억압의 시기를 지나서 20년대 전국 각지에서 청년회 활동이 활발해지며 활동의 하나로 야구 역시 주목받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이 시기 야구를 즐길 수 있던 대형 운동장과 다양한 야구대회들이 생겨나면서 야구의 인기는 더해졌습니다.


그리고 1920년대부터 한국의 학교들에도 일본 고교야구 전국 대회, 일명 고시엔의 문이 열렸습니다. 한반도에 있던 여러 학교가 고시엔 본선에 진출했습니다. 대부분의 학교 선수단이 일본인과 조선인이 같이 있었지만 유일하게 선수단 전원이 한국인으로 이루어진 휘문고보가 1923년 8강에 진출하며 한국 야구의 이름을 알리기도 했습니다.


3.png 휘문고보 야구단 ©뉴스톱

하지만 1932년 발표된 야구 통제령, 이후 태평양전쟁으로 인해 사회적, 경제적으로 야구를 계속하기 어려운 상황에 부닥치면서 한국 야구의 열기는 점차 식어갔습니다.



다시 빛을 본 야구

야구를 이어 나가기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람들의 가슴에는 야구에 대한 열정이 남아 있었습니다. 광복을 맞이한 이후 조선 야구협회가 결성되며 일제 강점기 당시 탄압 받았던 야구계를 재건하고자 했습니다. 자유신문과 동아일보 역시 도시 대항 야구대회, 중등야구 대회를 개최하며 야구협회의 노력에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학생들뿐만 아니라 직장인들 역시 실업 야구대회를 통해 야구 재건에 도움을 더했습니다.


여기에 더해 자유신문에서는 미군과 한국 야구인 간의 친선대회를 열었습니다. 이 경기를 통해 한국 야구인들은 미국 야구를 체험했을 뿐만 아니라 상품으로 야구 장비를 받아 한국 야구 발전에 밑거름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아픔을 딛고 일어서는 한국 야구에 희망적인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4.jpg 한-미 친선 야구대회 ©연합뉴스

조선 야구협회는 1949년 세계 아마추어 야구연맹 (이하 NBC)에 가입하여 대한민국의 첫 국제 대회 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이듬해 5월 NBC로부터 9월에 도쿄에서 열릴 대회에 대한민국 대표팀을 초청한다는 기쁜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대회 대표팀을 꾸리기 위해 야구협회는 대회를 열어 도쿄대회에 보낼 선수단을 선정했습니다. 더 나아가 대표팀을 미국에 보내 대학팀들과 경기를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야구협회의 원대한 계획은 6월 25일의 포성과 함께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세계의 마운드로 오른 첫 순간

한반도에 울러 펴진 총성으로 인해 많은 야구인이 전쟁 중에 목숨을 잃기도, 어디론가 사라지기도 했습니다. 휴전 협정이 조인되면서 한국 야구도 다시금 고개를 들었습니다. 살아남은 야구인들은 야구협회를 중심으로 모여 전쟁으로 인해 명맥이 끊겼던 대회들을 다시 이어 나갔습니다. 전쟁의 아픔을 딛는데 스포츠가 필요함을 느꼈던 신문사들의 후원이 한국 야구를 일으키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이듬해, 1954년 마닐라에서 아시아 야구연맹이 결성되었습니다. 대한민국도 대표단을 보내어 아시아 야구연맹에 가입했습니다. 아시아 야구연맹은 아시아 야구인들의 우의를 다지고 야구 기술 보급을 위해 12월 필리핀에서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를 열기로 결정했습니다. 대한민국 대표팀의 첫 국제 대회 참가가 결정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가슴 벅찬 첫 국제 대회였지만 필리핀으로 향하는 대한민국 대표팀의 상황은 지금과 사뭇 달랐습니다. 지금 대표팀이 이용하는 전세기 대신 미 공군에서 제공한 군용 수송기에 타 미군 사이에 껴서 이동해야 했습니다. 게다가 당시는 겨울이라 여름 옷감을 구할 수 없어 두꺼운 흰 천에 남색으로 염색한 옷감으로 단복을 만들어 입고 필리핀으로 떠났습니다.

5.jpg 1954년 대표팀과 이승만 대통령 ©동아일보

하필이면 당시 수송기에는 냉방 장치가 없어서 남쪽으로 향할수록 더위로 인해 선수들이 흘린 땀 때문에 단복의 남색 염료가 선수단의 흰 셔츠로 배어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럼에도 동행한 미군에게 얼룩진 셔츠를 보이기 부끄러웠는지 이동하는 내내 두꺼운 단복을 입었다고 합니다.


결국 급유를 위해 홍콩에 도착했을 때 대표팀은 시내로 나가 반소매 티셔츠를 구매한 다음 단복 대신 티셔츠를 단복으로 삼아 입었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대한민국 대표팀은 첫 국제 대회인 만큼 머나먼 필리핀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대표팀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3전 1승 2패로 3위를 기록하고 말았습니다.



6.jpg 2008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의 순간 ©일요신문

1954년 대한민국 대표팀은 첫 국제 대회에서 아쉬운 성적을 기록했지만, 그들이 흘린 땀방울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계 무대에서의 경험은 대한민국 야구인들이 한국 야구 발전을 위해 더 노력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염원이 모인 덕분에 대한민국 야구 대표팀은 1977년 세계 야구선수권대회 우승,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 2009년 WBC 준우승이라는 좋은 성적을 거두며 세계 무대에서 대한민국 야구를 알릴 수 있었습니다.



[참고문헌]

유홍락, 천일평, 이종남, 『한국야구사』 (지성사, 1999)

김효경, 최승식, "1896년 국내 첫 야구 경기 … 서재필 박사 출전", 중앙일보, 2014. 01. 21. https://www.joongang.co.kr/article/13691501, (2026. 03. 18. 접속)


(글머리 이미지: ©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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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CCO 콘텐츠팀

최원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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