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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ep Walking Aug 24. 2023

등관악산

 집에서 가까우면서도 오를만한 산으로 청계산과 관악산이 있다. 관악산은 청계산보다 더 가깝기도 하고 바위가 많아 보폭과 디딤이 수시로 변하여 지루하지 않기에 더 자주 찾게 된다. 관악산은 해발 632m로 서울의 최고산인 836m의 북한산보단 낮지만 오르내림에 3~4시간은 소요되고 험한 코스를 선택하면 반나절 동안 등산의 재미를 느끼기에 적당한 산이다. 처음 등산을 하게 된 계기는 만성적인 요통 때문으로 걷는 것이 허리근육 강화에 도움을 준다기에 자연스레 산을 찾게 되고 집 가까이에 있는 관악산을 수시로 오르게 되었다. 등산을 시작한 계기가 무엇인가와 상관없이 습관이 되면 계속 오르게 되는 것이 산인 것 같다.      

 왜 사람들은 등산을 하는 걸까?

산을 오르면서 혼란스러운 마음들을 정리하고 새로운 계획을 세우거나 영감을 받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는 오히려 집중이 안 되고 생각이 없어진다. 무념무상. 걸으면서 자연스레 명상의 상태를 느낄 수 있는 것이 등산을 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아닐까? 처음에는 잡다하고 얕은 생각들이 이것저것 떠오르고 연이은 다른 생각들로 이어지긴 하지만 그것들은 오래 머물지 못하고 흩어져 버린다. 깊게 생각하고 싶은 주제나 집중하고 싶은 문제들은 머릿속에 머무는 시간이 더 짧다. 그러다 몸이 지치기 시작할 때면 생각하는 것조차 귀찮아지고 시선은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는 발등으로 고정된다. 등산화의 발등을 보고 있지만 내 머릿속에는 어떤 생각도 머물러 있지 않다. 그저 다리가 움직이고 다리에 얹힌 몸통을 이동시키고 있을 뿐, 이러한 운동에 내가 개입하고 있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몸은 계속해서 이동하고 있지만 생각은 없어지고 육체의 노고로 인한 고통만이 지속적으로 감지될 뿐이다. 마라톤에서 사점(dead point)을 넘어 몸이 이완되는 구간과 비슷하다고 할까? 아무튼 등산을 할 때는 물이 담긴 유리컵을 창가에 놓아두면 불순물이 가라않고 맑은 물만 남듯, 머릿속에 잡다한 생각들이 가라앉고 머릿속은 텅 비어진다.        

 이렇게 생각 없이 걷다보면, 시각으로 느낄 수 있는 자연경관을 지나치기 쉽다. 그렇다고 해서 자연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다양한 자극들을 다 놓치지는 않는다. 모퉁이를 돌아 방향을 바꿀 때, 능선을 넘어서며 새로운 풍광을 마주할 때 비어있던 머릿속은 문득 각성되어 시각신호를 받아들이고 눈앞에 펼쳐진 자연경관을 담아내며 대자연의 품속에 속해 있는 자신을 인식하게 된다. 시각뿐만이 아니다. 자연은 전 방위로 우리의 감각을 자극하며 접근해 온다. 새소리는 어떤가? 길게 뽑아내는 소리, 규칙적으로 단절되는 소리, 청랑한 소리, 탁한 소리 등 다양한 소리가 제각기 다른 높낮이로 청각을 자극하지만 전혀 소음이 아니며 조화롭고도 빈틈없이 귓속을 채우고 명랑한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계속해서 걸어보자. 정상에 가까울수록 벼랑이 많아진다. 벼랑을 만나 그 위에 서면 공간에 대한 우리의 평소 무관심은 첨예한 관심으로 바뀌게 된다. 우리는 벼랑에 서야 비로소 공간을 실감하며 잠자던 촉각이 깨어 살아나는 것을 느낀다.       

 이제 정상이다. 정상에 오르면 머릿속은 완전히 각성되고 지속적으로 괴롭혔던 육체의 고통이 일시에 사라지고 차오르는 성취감으로 그간의 고통을 보상받는다. 정상에서 느낄 수 있는 상쾌함은 사우나의 열기로 달구어진 육체를 냉탕에 담금질할 때 느끼는 개운함과 비슷하다.  미세한 세포들의 수축과 이완이 반복되면서 묻어있던 피로를 떨구어 낸다. 보통은 정상에서 가벼운 요기를 하게 되는데, 주로 컵라면과 김밥, 시원한 오이, 과일 등을 먹는다. 산에서 먹는 식사가 맛있는 줄은 바다에 사는 사람도 알 것이다. 등산이 주는 즐거움 중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관악산은 높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 높이에 비해 다양한 등산코스를 가지고 있다. 여러 등산 루트 중에 나는 주로 세 가지 코스를 즐겨 찾는다. 첫 번째 코스는 서울대 공대 넘어 산 중턱까지 버스를 타고 가서 시작하는 코스인데, 버스가 반은 데려다 주기 때문에 매우 짧은 시간에 정상을 밟을 수 있지만 상당히 가파르다. 대부분 바위로 이루어져 있어서 소박한 릿지 코스라 부를 만하다. 빠르게 쉬지 않고 등산하면 1시간 만에 정상을 밟을 수 있고 암릉을 타며 보는 경치도 만족스럽다. 

 두 번째 코스는 관악산에서는 장거리 코스로 관악산을 빙 둘러 오르는 경로다. 관악산 입구를 시작으로 가운데로 직진해서 오르게 되면 무너미 고개를 만나게 되고 무너미 고개를 넘어 한숨 돌리기 시작할 무렵, 진정한 등산이 시작된다. 이 코스는 팔봉코스라고 불리는데 관악산 정문에서 보이는 뒤편 봉우리들을 하나하나 정복해 가며 모두 여덟 개의 봉우리 능선을 타고 연주대로 가는 코스이다. 다양한 모양의 봉우리들을 감상하며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하다보면 등산이 주는 대부분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즐겨찾기 마지막 코스는 관악산 정문을 통과하여 걷다가 오른쪽 샛길로 빠지며 시작되는 코스로 삼성산 코스라 이름 붙여본다. 이 코스는 비교적 완만하여 등산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이 천천히 오르며 산에 적응하는 코스로 적당하다. 또한 다른 코스보다 파트너와 함께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오르기에도 좋다.         

 날씨가 흐렸지만 어제 마음먹은 대로 관악산 등산길에 오른다. 오늘은 삼성산 코스로 길을 잡았다. 비가 안 왔으면 하는 바람은 샛길로 빠지기가 무섭게 무너져버렸다. 그래! 기왕지사 비도 오는데 오늘은 완보로 천천히 가보자. 다행히 비는 보슬보슬 소리 없이 시작되었고 천천히 걷는 발걸음 속도와 어울렸다. 완보로 걷자니 무심하게 지나쳤던 자연의 생명들이 빗속에서 말을 걸어온다. 바위에 빽빽이 앉은 녹색의 이끼들은 그 푸름을 더욱 짙게 드러내고, 나무아래 고사리들은 줄기를 빳빳이 세우고 싱그럽게 비를 맞고 있다. 물을 머금은 소나무 줄기의 명암은 더욱 뚜렷해지고 입체감이 더해져 울퉁불퉁 생명력이 넘친다. 살짝 습기를 머금은 흙은 쿠션 좋은 스펀지처럼 발바닥을 부드럽게 받아주어 빗속에서도 아늑함이 느껴진다. 비가 내려도 산은 생명력으로 가득하다. 그 가득한 생명의 정령들 속으로 또 하나의 생명이 느리게 걸어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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