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차원 그녀(3)

두 시공을 경험하게 되는 여인의 이야기

by Keep Walking

그와 헤어진 후 그녀는 찻집에서 나와 집까지 걷기로 했다. 그녀의 마음속 흥분이 아직 가라앉지 않았다. 그녀가 열망했던 젊은 민준을 실제로 만나 그의 눈빛을 보며 얘기를 나눴고 그의 숨소리를 듣고 목소리를 들었으며 온전히 그를 느꼈던 것이다. 그녀는 지금의 현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걸까? 그녀는 남산아래 집으로 향해 있는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마주쳐 불어오는 바람이 차가왔다. 좀 전에 느꼈던 더위는 사라지고 체감되는 쌀쌀한 기온으로 외투를 여며야 했다. 주변을 지나치는 사람들 중에도 반팔차림의 여름옷을 입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두 개의 세상을 동시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대학병원에서 의사 선생님이 얘기해 준 인지능력에 이상이 온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이상이라기보다는 인지능력의 확장이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전전두 부위에서 자라는 종양이 자신의 인지 능력을 확장시켜 놓은 것이다. 보통의 인간이 현재 살고 있는 세상만 인지할 수 있는 것에 비해 그녀는 두 개의 시공을 인지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닐까? MRI검사를 했을 때 별의 일주 운동처럼 스쳐 지나가던 수많은 시공의 이미지들이 실재한다고 느껴졌던 이유도 그 순간 수많은 시공을 자신이 인지하게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사실 세상은 사차원의 시공으로 모든(every) 시간대의 세상이 동시에 공존하고 있지만, 단지 인간이 하나의 시공에 귀속되어 존재하는 유기체이기에 느끼지 못할 뿐, 모든 시공은 현재 이 곳에 겹쳐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녀는 가끔씩 풍경이 어긋나게 느껴졌던 이유가 시공의 전환에 따른 자신의 인지 부작용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런 어긋남의 부자연스러운 느낌도 이제는 거의 사라졌다. 그녀는 오버랩 되어 있는 시공 속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선택하여 오갈 수 있었지만, 그녀의 무의식속에 자리 잡은 본능이 그 선택에 더 크게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며칠 후 그녀는 민준을 다시 만났다. 처음 만났던 버스 정류장에서였다. 거기에서 서성이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민준을 버스 안에 타고 있던 그녀가 먼저 발견하고 버스에서 내린 것이다. 민준은 그녀가 어디에서 내리는지를 알 수 없었기에 그녀를 처음 만났던 장소에서 무작정 기다렸던 것이다. 그만큼 그녀를 만나야 할 이유가 있었다.

그는 놀라움과 반가움으로 그녀를 맞았다. 그녀도 두 번째로 보는 젊은 민준이 무척 반갑고 좋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녀는 왜 그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알고 있었지만 짐짓 모른 체 하며 물었다.

“여기에서 무얼 하고 있는 거예요?”

“당신을 만나기 위해 며칠 동안 여기서 이 시간대에 기다리고 있었어요”

“저를요?”

그는 주변을 살피다가 그녀의 손을 낚아채듯 끌고 처음 만났던 찻집에 들어가 앉혔다. 그녀는 당황하며 끌려가긴 했지만 자신의 손을 꼭 잡은 그의 손이 싫지 않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민준이 흥분한 어조로 다짜고짜 물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거예요?”

“혹시 당신도 펀드 매니저에요?”

“어떻게 분석했기에 이 종목들이 뜰 거라는 걸 안 거죠?”

“알려준 종목들이 모두 며칠씩 상한가를 치는 건 우연치고는 너무나 희박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실제로 일어났어요. 도대체 어떻게 분석한 거죠? 미래에서 살다 오지 않는 한 이런 일은 절대 가능하지 않아요.”

민준은 쉴 새 없이 질문을 퍼부어댔지만 그녀는 뭐라 딱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다가 말했다.

“...미래에서 살다 온 걸로 해 두죠...그럼”

“뭐라고요?” 민준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그녀를 보고 있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잠깐 동안의 침묵이 흐른 뒤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제가 종목에 대해 분석한 방법을 알려드릴 수는 없어요. 왜냐하면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에요.”

“.......”

무엇인가를 생각하던 민준이 다시 물었다.

“좋아요...그러면 하나만 묻죠. 나를 도와주려는 이유가 뭐죠?”

“그것은...그것은...” 그녀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당신을 도와주는 데는 이유가 없다. 그저 당신을 사랑하기에 당신을 돕고 싶을 뿐이다. 이렇게 당신을 도와주는 구실로 나는 당신을 계속 만나고 싶기 때문이다. 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 당신을 잘 아는 분이 당신을 돕고 싶어 하기 때문이에요”

그녀가 자주 언급하는 ‘자신을 잘 아는 분’의 정체가 궁금하긴 했지만 그는 더 묻지 않기로 했다. 그녀를 계속 만나가면서 알아나가자고 생각했다. 미스테리하게 자신의 일상에 갑자기 나타난 그녀가 사차원 세상에서 온 것처럼 느껴졌지만 처음부터 그는 그녀에게 호감이 갔고 그녀에게 끌렸다. 그는 만남을 이어가고 싶었다.

“그런데 내가 당신을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핸드폰 번호라도 서로 알아야 하지 않아요?”

“핸드폰으로는 연락할 수 없어요. 단지 저만 당신에게 연락할 수 있어요. 우리 이렇게 해요...제가 먼저 당신에게 연락을 할게요. 그때 만나는 걸로 해요. 헤어지기 전에는 다음에 만날 날과 장소를 약속하자고요”

민준은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녀의 제안에 동의하고 그녀에게 자신의 핸드폰 번호를 알려주었다. 그의 핸드폰 번호는 그녀가 이미 알고 있던 번호와 일치했다.

그로부터 한동안 그녀가 사는 세상은 20년 전의 시공이었다. 그녀는 일주일에 서너 번 씩 젊은 민준을 만났고 간간히 주식종목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었다. 그러나 만남의 목적이 주식정보 교환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사실 그 목적은 구실에 불과했다. 주식 투자로 젊은 민준이 큰 부를 쌓은 것도 사실이지만 두 사람은 더 큰 것을 쌓아갔다.

만남이 이어지면서 두 사람은 급속도로 서로에게 빠져 들어갔다. 그녀는 젊은 민준의 육체와 정신을 모두 사랑했고 민준 역시 지금껏 만나보지 못했던 자신의 이상에 딱 들어맞는 여인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간혹 중년의 그를 만났다. 그도 여전히 민준이었지만,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뜨거움이 아쉬웠다. 그러나 중년의 민준에게는 부드러움과 관대함이 있었고 그녀를 편안하게 해주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녀는 한 남자로부터 젊음의 열정과 패기, 중년의 포용력과 이해심을 모두 느낄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3개월이 지나갔다. 약국 달력에 표시해 놓은 수술날짜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 날짜를 넘겨 종양을 제거하게 되면 위험할 수도 있다고 의사가 말했었다. 그러나 종양제거 수술이 끝나면 그녀의 확장된 시공 인지능력도 사라질 터였다. 의사가 말하기를 종양이 제거되면 정상적인 사람들처럼 인지할 수 있게 된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이제 자신이 살고 있는 두 개의 세상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그녀는 중년의 민준도 사랑했지만 그와 더 오래 사랑하며 사는 방법을 선택하기로 했다. 젊은 민준이 사는 세상을 선택한 것이다. 젊은 민준이 사는 세상에서 수술을 하게 되면 수술이 끝난 후에 정상적인 인지능력으로 돌아가도 수술 당시에 속해있던 그 세상에 영원히 남게 될 것이다.

생각을 정리한 그녀는 중년의 그를 만나기로 했다. 그에게 이별 아닌 이별을 통보해야 할 때가 온 것이었다. 20년 전 세상을 선택한 이상 이제 현재의 그는 더 이상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중년의 그를 잃는 상실감과 실연의 슬픔을 느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를 영원히 잃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감정 상태였다.

“오랜만이군...전에 만났던 이후로 근 한 달은 지난 것 같아...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거야?”

자주 만나주지 않았음에 화를 낼 만도 하건만 중년의 그는 여전히 부드럽고 따뜻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녀는 가슴속 깊은 곳이 저려오는 것을 느꼈다.

“미안해요...그동안 일이 좀 있었어요.”

“그랬군...오늘은 어쩐 일로 이렇게 시간을 내 주었지?”

“저...당신에게 할 말이 있어요” 그의 눈빛이 불안으로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그는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리며 눈을 깜빡거렸다.

“........” 숨이 막힐 듯한 잠시 동안의 침묵을 깨고 그녀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이제 당신을 더 이상 못 볼 것 같아요”

“......”

“왜? 어디라도 떠나는 거야?”

“예...”

당신을 만나기 위해 당신을 떠나야만 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의 눈에 슬픔이 비쳤다. 그러나 떠나는 이유에 대해서는 그녀에게 더 묻지 않았다. 한참을 말없이 있던 그가 갑자기 화제를 바꾸며 쓸쓸한 목소리로 물었다.

“전에 내 과거여자에 대해 물은 적이 있었지?”

“그때 당신이 물었을 때는 기억에 없었는데... 당신을 만나지 못했던 지난 몇 주간 다시 생각해보니 기억나는 여자가 한명 있었어.”

그는 생각에 잠겨 우물에서 기억을 퍼 올리듯 천천히 말을 이었다.

“한남동 시절...짧지만 뜨겁게 사랑했던 여자가 있었어...지금의 내가 벤처 캐피탈리스트로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준 여자였지. 왜 그게 기억에 없다가 지금 생각나는지 모르겠네...”

“...아!”

그녀는 외마디 탄성을 질렀지만, 그 후 그녀와의 관계가 어찌 되었는지는 더 묻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의 행복을 빌어주며 헤어졌다. 그녀는 헤어진 것이 아니라 애써 생각했고, 그는 새삼스레 기억에 떠오른 젊은 시절 만났던 그녀가 지금 헤어진 그녀와 너무 닮았다고 생각했다.

주변을 정리한 그녀는 20년 전 세상에서 수술을 받기 위해 병원을 향했다. 이 시공에 머무르기로 결심한 이후 제일 먼저 OO대학 병원을 찾아 수술예약을 했다. 다행히 새로 예약된 수술날짜는 이전에 정밀검사를 받은 지 3개월이 지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병에 대해 젊은 민준에게 상세한 내용을 알리진 않았다. 단지 수술하는 날 병원으로 자신을 찾아와 달라 고만 했다. 그것으로 충분하리라. 그 때 모든 사실을 알려주면 되리라 생각했다.

수술을 받기 위한 준비를 모두 마치고 그녀는 수술대 위에 눕혀졌다. 머리 위로 환하게 비추고 있는 무영등이 보였고 그 주변으로 마스크를 쓴 의사와 간호사들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때 갑자기 수술이 잘못되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이 찾아왔다. 그때까지는 기억에 없었는데, 갑자기 정밀진단이 끝나고 담당의사와 상담할 때 들은 얘기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10년이나 그 전쯤에 수술을 받으셨다면 수술 후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고 말했었다. 지금은 그 때 그 의사가 얘기한 때 보다 20년 전이 아니던가? 불길한 공포가 밀려왔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는 뭐라 소리치려 했지만 이내 깊은 잠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그러나 그녀의 무의식에 자리 잡은 공포는 그녀를 과거가 아닌 현재의 시공으로 전환시켰고 수술을 집도하던 의사와 간호사들은 두개골이 열려 있는 상태로 환자가 실종되는 황당한 사건을 접하고 말았다.

몇 시간이 흐른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마취에서 깨어났다. 극심한 통증이 찾아왔다. 그녀는 주위를 살폈다. 옆에서 손을 잡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어야 할 그는 보이지 않았다. 누워있던 수술실의 풍경도 낯설었다. 순간 그녀는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젊은 민준이 있는 세상이 아님은 확실했다. 그렇다면 중년의 그가 있는, 그녀가 살아왔던 세상으로 온 것일까?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그녀는 생각하기를 멈추고 현재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집중했다. 주변에 의사와 간호사가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다. 놀라움과 당황스러움이 섞인 고성이 오갔다.

“어찌된 일이야? 이 환자가 어떻게 갑자기 수술대에 있는 거야? 지금 수술할 환자는 이 환자가 아니잖아?” 집도의로 보이는 사람은 그녀가 세 달 전에 정밀검사를 받고 상담했던 의사 김 요한이었다.

“지금 수술할 환자분은 남자분인데요...지금 수술실 밖에 대기하고 있어요. 그런데 갑자기 여성 환자가 수술실에 누워있어요. 저희도 어찌된 일인지 알 수가 없네요” 간호사는 거의 울음을 터트리며 소리쳤다.

오늘, 지금 이 시간에 수술할 환자가 수술실에 막 들어오려는 찰나에 그녀가 갑자기 수술대에 두개골이 열린 채로 나타난 것이었다.

당황한 그들의 목소리가 점차 희미하게 멀어져 가고 있었다. 그녀는 젊은 민준이 살고 있는 세상 속으로 가지 못했고 물리적으론 중년의 그가 살고 있는 세상으로 다시 돌아온 것으로 보였지만 그녀의 입장에선 그마저도 아니었다. 그녀는 무수히 많은 시공 중에서도 시간이 흐르지 않고 멈추어버린 세상 속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시간이 멈추어 있는 세상은 난생 처음 겪어보는 시공이었다. 아니 결코 겪을 수 없는 시공이었다. 그녀는 종양제거 수술이 진행되던 와중에 죽었다. 시간이 멈추어 아무것도 인지할 수 없는 또 다른 시공 속으로 영원히 갇혀버린 것이다. 삶의 시간을 멈춘, 다른 모든 인간들이 가게 되는 두 번째 시공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녀가 죽은 다음 날, 중년의 민준의 핸드폰 벨이 울렸다. 그는 낯선 전화번호를 보고 전화를 받을까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핸드폰을 들었다.

“김 민준씨 되시죠 ?”

“그렇소만....”

“여긴 OO대학병원인데요... 오늘 우리 병원에서 사망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사망하신 분이 우리 병원을 내원했던 환자분이었고 그 환자분 신원기록카드에 선생님이 보호자로 등록되어 있어 연락드렸습니다. 사망한 분의 신원을 확인해주셨으면 합니다.”

“......”

민준은 당황하여 잠시 말을 잊었다. 불길한 예감이 스쳐 지나갔다.

이어지는 전화 목소리는 그녀의 이름을 언급했고 그는 핸드폰을 들고 있던 손을 아래로 떨구었고 눈가엔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에서는 계속해서 통화음이 들렸지만 민준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보호자 분 듣고 계신 거죠? 사망한 분은 원래 수술하기로 예정되었던 날보다 하루 전에 갑자기 우리병원에 나타났고 어찌된 일인지 이미 수술이 진행 중이던 상태였습니다. 병원에서 손 쓸 틈이 전혀 없었습니다. 여보세요?...우리 병원 담당 전문의 말로는 사망한 분에게 시술되었던 방법도 오래전에 시행되었던 의술로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 방법이라고 합니다. 어떤 경로로 우리 병원으로 오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우리병원은 사망하신 분에 대한 어떠한 법적 책임도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후속 절차에 대해 논의해야 하니 우리병원에 꼭 방문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보세요? 보호자분 이해하셨나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민준은 전화를 끊었다. 깊은 슬픔이 가슴속으로부터 올라오고 있었다. 20년 전부터 품고 있던 그녀에 대한 궁금증이 비로소 풀리며 쉴새 없이 눈물이 흘렀다.

20년 전, 자신에게 병원에 와달라고 부탁하고 정작 그가 병원을 찾았을 때는 아무런 연락도 없이 사라졌던 그녀가 이제야 죽은 채로 자신에게 돌아왔다는 것을...그리고 20년 전의 그녀가 현재의 그녀였음을......

keyword
작가의 이전글사차원 그녀(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