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영하는 마음으로 숨을 고른다.
한 번은 남편에게 아이들이 크고, 우리가 더 나이 들면 시골에 가서 주택을 지어서 사는 건 어떤지 물어본 적이 있었다. 나는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지낼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남편의 생각은 달랐다. 도심의 타운하우스라면 몰라도 시골에서는 살 수가 없다는 말을 하곤, 다시 정정했다. 아니, 타운하우스도 안 되겠다고. 생활의 편의를 누릴 수 있는 도시가 좋고, 아주 조용한 곳보단 적당한 소음과 사람들이 있는 곳이 좋다고 했다.
"스벅 안 가도 돼? 백화점 지하에 생선은? (즉석에서 구워서 파는 생선구이를 애용한다.) "
" 음... 좀 아쉽긴 하겠지만 요즘은 반건조 생선구이를 애들이 잘 먹어서 집에서 굽고 있어! 반건조 박대는 집에서 구워도 냄새가 별로 안나거든. "
뭐 하나씩 나열하자면 내가 누리고 있는 편의가 한두 개 이겠냐만은. 또다시 하나씩 생각해보자면 내 방식대로 대체 가능하기도 했다.
평일 아침마다 남편이랑 둘이 스벅을 가곤 하는데 언제부터인가 그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나를 보았다. 밤 시간을 좋아하던 내가 아침이 기다려지던 이유이기도 했다. 커피를 사러 간다는 명목 하에 그와 걷고 이야기 나누며 신선한 아침 공기와 쨍한 햇살을 맞을 때 기분이 좋아졌다. 기분이 좋아지면 짧은 시간에도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고, 우리는 내내 웃었다. 그렇게 시작되는 하루는 다르다. 좋은 에너지와 함께 사유할 거리를 던져주었다. 혼자 하는 운동 대신 천천히 대화를 이어가며 같이 걷는 아침이 좋다. 문득문득 찾아오는 침묵도 존중해 줄 수 있는 사이라면 더할 나위 없다.
그러니까 나는 '도심의 스벅'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함께 걷는 아침'이 좋았던 거지. 어디에 있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의 옆에서 숲에 있는 것처럼 자유로운 기분을 느낄 수 있으니 되었다.
'천천히'라는 말을 즐겨한다. 바쁜 아침 등교시간에 '빨리' 대신 '천천히 해도 돼' 자러 가야 하는 시간인데 무언가 하고 있으면 '천천히 끝내고 자러 들어가.' 무얼 하든 시간이 촉박해서 아이가 당황하는 기색이 보이면 그렇게 말한다.
"괜찮아. 서두르지 마. 천천히 해. 늦어도 괜찮아."
"엄마 빨리 하라고 해야지. 왜 거꾸로 말하는 거야?"
"빨리 하다 보면 뭔가 빠뜨릴 수도 있고 실수할 수도 있거든. 이왕 늦은걸 어쩌겠어. 차분히 준비하는 게 나아. 어차피 10분도 차이 안 날걸? 깜빡해서 돌아오거나, 다시 하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 "
"응. 그건 그렇지만... 아 안 되겠다. 내일부턴 일찍 일어나야지! "
"^^"
인생은 타이밍이라고 하지만 타이밍에 맞추느라 서두르는 것보다 차라리 천천히 다음 타이밍을 기다리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허둥지둥 대느라 보지 못하고 놓친 무수한 순간들, 천천히 숨을 고르며 가다 보면 어제 보지 못했던 사람이 보이고, 계절이 느껴지고, 생각이 떠오른다. 생각이라는 녀석은 언제나 느린 시간 속에만 자유롭게 헤엄을 친다. 여유로운 마음은 사고(思考)를 확장시키고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게 한다.
새벽 운동부터 시작해서 하루가 꽉 채워진 삶, 미니멀 라이프를 표방한다지만 왠지 온기 없어 보이는 집, 잘 짜인 식단 같은 하루를 빈틈없이 보내는 것이 꼭 잘 사는 것만은 아니라 생각한다. 때론 불완전함이 더 빛난다. 완벽하지 않다고, 조금 게으름 피운다고 단번에 총을 빵 쏘는 오징어 게임이 아니니까 말이다.
다만 공백의 시간이란, 뒤보단 앞이 향긋하다. 아주 작은 것일지라도 무언가를 시작하기 전에 공백의 시간을 둔다면 시작이 반가워진다. 숨을 고르며 가벼운 마음으로 봄을 닮은 시작을 기다리게 된다.
아이들의 말에 귀 기울여 들어주고, 한걸음 뒤에서 마음을 만져주는 지금의 순간들이 귀하다. 손끝으로 잡을 수 없는 마음과 순간들을 기록하는 나의 시간도 귀해서, 어쩌면 무의미한 과정을 반복하며 나는 유의미를 꿈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