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법에 대하여.
선생님이 마음에 차지 않았다. 지나치게 아이들을 통제하는 것도, 매우 열심히 수학 공부를 시키는 것도, 동그라미 가위표를 크게 하는 것도, 그냥 껄끄러웠다. 그것이 매일 쌓이면 아이들에게 어떤 강박과 스트레스를 주는지 알기에. 그렇다고 내가 뭐라고, 선생님 나름의 철학이 있을 터인데 부분을 보고 전체를 평가할 순 없기에 숨 한번 길게 들이쉬며 삼켜버렸다.
카톡! 단톡 방에 벨이 울렸다. 아이반 학부모 단톡 방이다. 한 아이 엄마가 그런다. “반대표 엄마! 우리 담임은 왜 사진을 안 올려줘요? 건의 좀 해주세요. ” “네 알겠어요. 건의드릴게요.” 여느 때 같았으면 보고도 못 본 척 듣고도 한 귀로 흘렸을 터인데, 단톡 방에서 나는 한참을 미간에 주름을 세우며 다시 읽고 생각했다. 도무지 이상했다. 질문도 이상하고 답변은 더 요상하고. 담임이 왜 사진을 올려줘야 하는 건지. 그리고 그것이 왜 당연히 건의할 수 있는 일인 건지. 미취학 아동을 보육하는 어린이집도 아니고, 보육과 교육의 선에 걸쳐져 있는 유치원도 아니고, 그저 공교육을 하는 학교인데. 왜 무사히 잘 학습하고 있다는 사진이 필요할까 싶었다. 그것이 sns용인지, 부모의 불안인지, 혹은 부모의 땅콩인지. 사랑일까. 사랑 그것은 그 자체의 믿음인데 확인이 필요할까. 필요하다면, 그 확인이라는 것이 사진 한 장으로 가능할까?
그것이 부모의 위안이라는 것이 짠하다.
나라고 뭐가 다를까? 굳이 대놓고 바라지는 않지만, 사진이 반갑고 할머니 아빠 누구에게든 보여주고 떠들고 싶은 마음은 늘 소란하다. 그렇지만 티 내지 말길. 아끼니까. 소중하니까. 지켜야 할 믿음 같은 것은 들추지 말고 흙에 씨앗 심듯이 꼭꼭 토닥이며 사랑 담아 눌러주자 한다.
아무튼 선생님은 그 후로 한 달이 넘게 지난 지금까지도 사진은 올려주시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그 강단에 뭔가 작게나마 믿음이 생겼다. 학부모의 말에 일희일비하지 않는다는 것. 교육의 시작은 믿음이고, 그 믿음은 학부모에서부터 비롯된다. 확인이 주는 작은 위안을 핑계 삼아 큰 믿음을 놓치지 말자 한다.
내 아이는 내가 믿는다. 타인이 주는 시선과 관심을 구걸하지 말자. 눈과 귀를 바짝 대고 최선을 다해 서포트 해주는 것보다 조금 덜 보고 흘려들으며 덤덤하게 믿어주는 마음이 아이에겐 큰 거름이 된다는 것을,
조금 울퉁불퉁해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면 그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