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하지만 나를 지탱하는 그 무엇.
태권도에서 아이들이 오기까지 30분, 소파엔 도복을 갈아입으며 아이들이 벗어놓은 옷들이 널브러져 있고, 싱크대엔 설거지거리가 있다. 둘러보니 식탁도 정리해야 하고 저녁 준비도 해야 한다. 무엇부터 할까? 나는 서재로 냉큼 들어와서 노트북을 켰다. 글을 써야지. 책을 읽기엔 30분은 짧아 맥이 끊길 테고, 집안일이 고요한 순간을 삼키게 하긴 뭔가 억울하다.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고요함을 음미하고 싶다. 짧은 시간에 쓸 수 있는 것은 일상이다. 타탁 타닥 자판 두드리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흐른다.
나만의 케렌시아.
소소하지만 나를 지탱하는 그 무엇.
1.
걷는다. 어림잡아 13키로(아침 4.5키로 오후8키로)정도 걷는다. 따지고 보면 얼마 되지 않는건지 모르겠지만 체력이 그만큼 떨어져 있었는지 걷기 시작한 후로 밤이 되면 곯아떨어졌다. 고요한 밤 시간 아이들을 재우고 나면 오롯한 내 시간이 빼꼼히 고개를 내미는데 "안녕?"반가운 인사가 "잘 자"가 되고 말았다.
아침이 되면 부들부들 뭔가 억울함에도 다시 걷기를 반복했다. 두통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두통약을 달고 살았는데 먹지 않고도 하루가 버텨졌다. 비가 와서 걷지 못한 날은 어김없이 두통이 찾아왔고, 참아보다 결국은 약을 삼키고 말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래서 걷는다.
운동을 해야겠다 마음먹은 지만 오래되었다. 하는 일, 정적인 취미를 즐기는 라이프스타일, 그리고 어린아이들을 키우는 엄마의 그 어느 중간 즈음에서 나름의 꽉 찬 하루를 보냈다. 생각이 많고 서론에서 결론으로 오는데 한참이 걸리는 사람이라 오다 보면 처음 가졌던 생각이 더러 길을 잃기도 했다. 맞다! 핑계다. (거 참, 핑계한번 지루하게 길게 하네...)
누군가 나에게 운동을 하라고, 같이 운동을 시작하자고 말해주어도 웃으며 넘기고 말았는데, [마녀 체력] 을 읽고 운동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미생]을 보고, [걷는 사람, 하정우]를 읽으며 걷고 있는 순간에 대한 작은 확신이 생겼다.
네가 이루고 싶은 게 있다면 체력을 먼저 길러라. 네가 종종 후반에 무너지는 이유, 대미지를 입은 후에 회복이 더딘 이유, 실수한 후 복구가 더딘 이유, 다 체력의 한계 때문이야. 체력이 약하면 빨리 편안함을 찾게 되고 그러면 인내심이 떨어지고 그 피로감을 견디지 못하면 승부 따위는 상관없는 지경에 이르지. 이기고 싶다면 네 고민을 충분히 견뎌줄 몸을 먼저 만들어. 정신력은 체력의 보호 없이는 구호밖에 안돼. [ 미생 ]
2.
놀이터를 간다. 워킹맘으로 살아가며 아쉬웠던 것 하나를 말하라고 하면 놀이터였다. 아이들이 가고 싶어 할 때 데려가지 못한다는 것. 아이들도 그것을 알기 때문에 조르지 않는다는 것이 더 마음 아팠다. 놀이터에 가자고 조르지 않는 아이를 볼 때면 늘 저릿했다. 목구멍에 뭔가가 차올랐다. 삼켜도 늘 제자리였다. 함께 감내해야 했다.
이제 매일 놀이터를 간다. 아이들이 앞서 조른다. 줄을 서서 그네도 타고 잡기 놀이도 하고 땀에 흠뻑 젖을 만큼 뛰어논다. 보통을 못해준 것이 늘 맘에 걸렸었다. 이제 보통의 어린이로 놀고 있다. 신나게 뛰어놀다가 문방구에 가서 무릎을 굽히고 오백 원을 넣어 돌려서 뽑기도 한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집에 오는 길, 실실거리는 아이의 웃음이 그렇게도 달다.
더 많이 보고 담고 싶은 말간 미소와 천진난만한 표정들을 눈으로 귀로 마음으로 담는다.
바쁜 남편을 위해 동영상을 찍어서 전송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 다시 일도 하고 싶다. 일 년도 안되었는데 나는 내가 고픈 것이 웃프다. 이렇게도 마음은 여러갈래다. 모두 가질 수 없기에 하나를 놓고 아쉬워함과 동시에 행복해한다. 부름과 동시에 고프다. 시소의 평행은 어려운거였다.
)
아무튼, 놀이터를 간다. 아이들의 손을 잡고 놀이터를 갈 수 있는 날들은 곧 지나 갈터이니 순간순간을 귀히 여기며 아이의 부름에 긍정하고 싶다.
3.
읽고 쓴다. 글쓰기에 대한 갈망은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학창 시절엔 시화전에 걸린 내 시가 그렇게나 좋아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바람빠진 풍선마냥 피식피식 웃어댔다. 영문학을 전공하고 영어를 가르치는 일을 했지만, 영미문학만큼 나를 감흥시킬 순 없었음을.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알게되며 무수한 날들이 흐르고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여전히 책이 좋고 글 쓰는 것을 갈망한다. 쓰는 것은, 결국 나를 먼저 알고 삶을 이해하고 보듬는 과정이다.
글을 쓰는 일은 우리의 고독을 덜어준다. 인생에 대한 감수성을 넓고 깊게 확장시킨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의 양식이다. 그것은 바다에서 무시무시한 태풍이 불어올 때 배 위에서 노래를 하는 것과도 같다. 당신이 화난 풍랑을 잠재울 수는 없지만, 노래는 배 위에 함께 있는 사람들의 마음과 영혼을 바꿀 수 있다. [쓰기의 감각]
좋아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삶에 스민다. 한국인 최초 쇼팽 콩쿠르 우승자인 피아니스트 조성진과 세계적인 피겨스케이터 김연아의 공통점은 어린 나이에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는 것인데 그들의 인터뷰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그냥 하는 거지. 무슨 생각을 하면서 하는 게 아니다."는 것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태도다. 그런 일 하나를 찾았다면 손에 꽉 쥐고 잘되든지 말든지 계속하는 거다. 평생 하고 싶은 일이 있는 것만으로도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이 설레었던 어느 날을 기억하면서.
[뿌리가 튼튼한 사람이 되고 싶어 - 신미경 에세이-]
사람이란 모름지기 자신이 무지하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성장할 수 있다. 그런데 아는 것만 계속해서 사용하면서 어떻게 자신의 무지를 기억할 수 있겠는가? - 월든, 헨리 테이비드 소로-
올바른 자존감이란, 내가 이 세상을 사랑한 기록. [아이를 위한 하루 한 줄 인문학]
4.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온가족이 일어나서 처음 마실 작두콩 도라지차를 끓인다. 느리지만 정성을 담아 품이 드는 요리를 한다. 오늘은 소고기 장조림과 순두부찌개를 했다. 양지를 사서 핏물을 여러 번 빼고 양파, 대파, 후추, 통마늘을 넣어 푹 삶았다. 잘 삶긴 고기를 건져낸 육수에 간장, 매실, 설탕을 넣어 끓인다. 그 사이 꺼내서 한 김 식힌 고기를 결대로 잘게 찢어서 다시 퐁당! 졸인다. (꽈리고추도 넣고 메추리알도 넣으면 그럴싸하게 한 맛 더한다. ) 어려울 거라 지레 짐작해 해보지 않았던 요리들을 하나둘씩 해보며, 작은 희열을 느낀다. 아 뭐 별거 아니네!
내가 품을 들여서 귀하게 만든 한 끼를 나의 귀한 사람이 맛있게 먹어주면, 마음이 불러왔다.
5.
조용하고 다정한 노래를 듣는다. 루시드폴, 에피톤 프로젝트, 이루마, 유키 구라모토, 노라 존스, 이적의 음악을 좋아한다. 담요처럼 포근한 음악을 듣고 있을때면, 꽉 쥐고 있느라 아픈 줄도 몰랐던 무언가를 슬그머니 풀어주는 느낌이 든다. 따뜻한 노곤함을 잠시나마 음미한다.
나의 시선과 발걸음으로 오늘의 행복을 마주한다.
그것은 가령 살에 닿는 선선한 공기의 느낌일 수도 있고, 아이의 웃음, 모두 잠든 고요한 밤, 남편의 작은 배려, 누군가의 따뜻한 말 한마디, 기대치 않고 읽었는데 마음이 번쩍 뜨이는 좋은 책, 서점의 냄새, 뽀송뽀송한 이불, 샤워 후 맥주 한 모금, 몰래 보는 아이의 일기장에도 있다.
늦은 시간 피로를 이끌고 집으로 온 남편이 늘 제일 먼저 향하는 곳은 아이들.
잠든 아이들을 바라보며 쓰다듬는다. 아빠사람으로서 하루의 끝에 마주하는 귀한 행복일테다.
#
늘 좋은 순간들만 마주하지 않습니다. 폭죽같은 행복이 늘 꿈처럼 펑펑 터지지도 않지요.
다만 손에 한 웅큼 쥐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작고 고운 행복들은 매순간 있습니다.
마주하는 나의 작고 소박한 행복들을 기록합니다.
오늘 어떤 행복을 마주하셨나요?
오, 사랑
-루시드 폴-
고요하게 어둠이 찾아오네
이 가을 끝에 봄의 첫날을 꿈꾸네
만리 너머 멀리 있는 그대가
볼 수 없어도 나는 꽃밭을 일구네
가을은 저물고 겨울은 찾아들지만
나는 봄볕을 잊지 않으니
눈발은 몰아치고 세상을 삼킬 듯이
미약한 햇빛조차 날 버려도
저 멀리 봄이 사는 곳 오, 사랑
눈을 감고 그대를 생각하면
날개가 없어도 나는 하늘을 나네
눈을 감고 그대를 생각하면
돛대가 없어도 나는 바다를 가르네
꽃잎은 말라가고 힘찬 나무들조차
하얗게 앙상하게 변해도
들어줘 이렇게 끈질기게 선명하게
그대 부르는 이 목소리 따라
어디선가 숨 쉬고 있을 나를 찾아
내가 튀운 싹을 보여 오, 사랑
내가 튀운 싹을 보여 오,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