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망이 되어버린 여행이 가져다준 것.

아무것도 없어도 충만한 삶이란.

by 예담

태풍으로 부지불식간에 엉망이 되고 말았다. 계획은 그저 계획일 뿐이었다. 모든 것이 다르게 흘러갔다.


비행기는 비바람 속에 흔들림이 극심했고 우는 둘째를 안고 달래며 나도 눈물을 훔쳤다. 밀려오는 공포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네 살인 첫째는 나보다 씩씩했고 담대했다. 아빠와 딸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무심하게 상황을 견디고 있었다. 놀라울 만큼. (나중에서야 물어보니 둘 다 무서웠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러하다. 나를 닮은 아들은 호들갑스럽게 겁이 많고 심지어 우리 둘은 고소공포증도 있다. 아빠를 쏙 빼닮은 딸은 무엇이든 잘 참고 온유하며 담대하다. (겁이나도 침착하며, 상대방 먼저 배려한다.)


롤러코스터를 탄 듯 아래위로 하늘에서 뱅뱅 돌던 비행기는 착륙을 못 하고 우회했다. 끔찍했던 시간을 보내고 식은땀과 함께 착륙 후 제주공항에서 둘째는 고열이 났고 우리는 곧바로 응급실로 향했다. 해열 주사를 맞고 약을 타서 호텔로 왔는데... (둘째가 태어난 후 더 마음이 가고 애달팠던 첫째 딸아이를 위한 롯데호텔 키티룸이었는데. 아이가 룸 사진을 보며 설레어했었던 곳인데.) 호텔에 들어서자마자 아들은 토해버렸다.


첫째를 위한 여행이었는데 아이의 기분을 들여다볼 새도 없이 둘째는 축축 처졌다. 여행 내내 둘째를 보살피느라 마음은 아직 하늘 속 비행기를 타고 우회하고 있는 듯 했다. 그 틈에 네 살이지만 첫째였던 아이에겐 키티룸의 설렘이 코를 막고 싶었던 냄새나는 고약한 추억이 되어버렸으리라 앞서 짐작했는데 딸아이는 좋았다고 했다. 무지무지 웃겼던 여행이라고 깔깔깔 웃어댔다. 엄마와 시온이(남동생)은 겁쟁이라고 나는 놀랬지만 울지 않았다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당당함을 뽐낸다.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없다지만 작고 잔병치레 많은 아이에게 손과 마음이 더 가듯이, 유독 더 고되었던 여행은 더 애틋하게 남았다. 추억에도 모양과 빛깔이 있다. 불완전했던 여행의 기억은 일상의 균열이 생길 때마다 우리를 위로해준다. 꺼내어 문지르고 넣기를 반복할수록 더 반짝반짝 광이 난다.


완벽히 준비했다 싶었는데 무언가 자꾸만 어그러지고, 즐거움마저 어설픈 여행이 있다. 아이들이 네 살, 두 살이었을 때 제주도 여행이 나에겐 그러했다. 억울함과 아쉬움이 교차했었는데 지나고 보니 그 또한 충만했음을 알게 된다. 특별한 것을 하지 못해도 우린 많이 웃었다.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 섞인 불평도 웃으며 나눌 수 있었던 우리는 바닥에 가라앉아도 작은 것들을 나눌 수 있는 아기자기한 마음이 있었다. 아무것도 없어도 충만할 수 있음은 내가 두는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를 말해준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 결국 우리가 된다. 고된 삶 속에 무뎌지지 않기를 바랄 뿐.



인생과 여행은 그래서 신비롭다. 설령 우리가 원하던 것을 얻지 못하고, 예상치 못한 실패와 시련, 좌절을 겪는다 해도 우리가 그 안에서 얼마든지 기쁨을 찾아내고 행복을 누리며 깊은 깨달음을 얻기 때문이다. [여행의 이유 - 김영하]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 생각해보면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
[여행의 이유 - 김영하]
진정한 여행이란 단순히 새로운 풍경을 보고 오는 것이 아닌, 새로운 시야를 갖는 것이다. [마르셸 프루스트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
산다는 것은 그런 것이지. 뚜렷하지 않은 것을 제대로 보려고 조금씩 다가가는 일. 하지만 그 무엇도 내가 다가가지 않으면 쉽게 다가오지 않으리. 당신이 움직일 수 없다면 내가 가야 하리. 그 일은 희생이 아니라 희망 이리. 무모한 일이 아니라 무한한 일이리. 어느 지독한 여름날에 문득 오늘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저지른 이 무모함이 따뜻한 한 조각의 기억이 될 수 있을까?

[ 그래도 나는 당신이 달다. - 변종모 에세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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