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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첫 여행

마법같은 날이었다.

by 예담



아침 6시 반에 우리는 짐을 싸서 근처 낚시터로 왔다. 지하철을 타고 갔는데 처음 타본 지하철은 몹시 신기했다. 버스처럼 앞을 보고 앉는 것이 아니라 옆으로 쭉 늘어져 있는 것을 보면 은주는 깔깔거리고 웃을 것 같다. 옆으로 다니는 꽃게가 생각이 나서 순간 크게 웃을 뻔했다.


“영애는 낚시해 본 적 있어?”


“없습네다. 기런데 아바지랑 낚시하러 갔다는 동무의 이야기는 들어봤습네다.”


“너는 기회가 없었구나.”


“고아원에서는 많은 동무들을 데리고 가기가 힘이 드니 당연한 일입네다. 기렇게까지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안해봤습네다.”


들떴던 마음을 뒤로하고 담담히 말했다. 아저씨가 나를 불쌍히 여길 때마다 짓는 한숨과 슬픔을 보고 싶지 않았다. 낚시는 당연히 부모나 가족과 함께 가는 것인데, 가족이 없는 나는 꿈을 꿔본 적도 없었다. 고작 물고기 잡으러 가는 게 뭐가 대수라고 이런 박탈감을 느껴야 한다는 게 억울해서 학교를 마치고 고아원으로 가는 길에 씩씩대며 모래를 발로 차는 걸로 분풀이를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종종 박탈감을 느꼈지만 인민학교에서 가장 많이 체화된 것은 무력감이었다. 어떤 의견도 낼 수 없고 시키는 대로 배우고 하라는 대로 해야 하는 일상의 무력감이 나를 옭아매어 숨이 막혔다. 매일 아침 이루어지는 사상교육은 매우 열정적으로 임했으나 그 열정은 후라이였다.


남조선의 학교에 와서 가장 놀란 것은 동무들이 선생님에게 자유롭게 말하는 것이었다.


현서가 선생님에게 숙제 양이 너무 많다고 줄여달라고, 안 그래도 수학이 힘든데 숙제가 많아서 더 싫어지겠다고 불평을 토로할 때는 ‘저 에미나이 정신이 나간 건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선생님은 웃으며 현서에게 대답을 하는 것이었다. 몽둥이를 들고 나오라고 해서 따로 교육을 받으러 불려 가야 하는 상황인데 선생님은 분명히 웃었다.


“현서야 수학은 원래 좋아질 수가 없는 거야. 안 그래도 싫은데 숙제라도 없으면 어디 만날 수 있겠냐? 선생님이 수학이랑 친해지라고 숙제 내주는 거다. 알았냐? 파이팅!! 힘내도록! ”


선생님의 말씀에 아이들은 웃음보가 터졌다. 입을 내밀고 불평하던 현서는 선생님과 눈을 마주치고 깔깔거린다.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 나는 눈을 깜박거리며 상황을 입력했다.


동무에게 전해 듣는 것이 아니라 낚시를 내가 직접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사정없이 들떴다. 어떤 기분일까. 아저씨도 싱글벙글 나만큼이나 기분이 좋아 보인다. 새벽이라 사람이 없을 줄 알았는데 지하철 안은 생각보다 복작거렸다. 약속이나 하듯 사람들은 손전화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무슨 중요한 것을 다 보고 있는 건지 궁금해졌다. 같은 것을 보는 건가?


아줌마도 역시 손전화를 들여다보며 싱글벙글이었다. 슬쩍 화면을 보니 노래 부르는 가수가 보인다. 아줌마가 좋아하는 얼굴이 하얗고 잘생긴 트로트가수이다. 아줌마는 반찬가게에서 하루 종일 그 노래를 틀어놓고 일을 하고 집에 와서도 노래를 흥얼거리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멜로디와 가사를 외우게 되었다. 아줌마는 노래를 들으며 하루의 고단함을 위로받는다고 했는데 그 말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다. 마음에 바람을 쐬어주는 것이다.


나는 네모난 세상보다 직접 걸어 다니는 세상이 더 좋다. 세상은 끝도 없이 넓고 신기한 데다 다정하고 좋은 사람들이 많지만 네모난 세상은 나에게 말을 걸어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카메라로 비치는 세상이 아닌 나의 시선으로 보는 세상이 아름다웠다. 학교에서 사상교육을 받을 때처럼 정해진 내용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행위는 나에겐 더 이상 매력이 없다.


“모두들 바쁘게 살지 않니? 저 사람들 좀 봐. 모두 제 갈 길을 가며 할 일을 하는 거야. 그래서 나도 많은 것들을 하고 싶다. 쉬는 날에 축 늘어져 있지 않고 지금 건강할 때 모든 일에 열심히 임하고 싶어.”


아저씨는 마음을 읽는 독심술이라도 배운 건지 내가 하는 생각의 조각들을 정리해서 다듬어 주셨다. 열심히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아저씨의 말씀을 새기고 소중히 담아두었다.


“시원하네. 바다 좀 봐라. 너무 아름답지 않니. 와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다.”


아줌마는 호들갑을 떨며 하하 호호 연신 웃어댔다. 아저씨는 꽤나 깊은 양동이에 물을 채운 뒤 낚싯바늘에 기다란 지렁이를 달았다. 꿈틀꿈틀 거리며 목숨을 지키려 아우성치는 지렁이의 몸짓이 나는 애달프다고 생각했는데 아줌마는 징그럽다며 손사래를 친다. 지렁이를 끼운 햐얀낚싯대는 가볍게 포물선을 그리더니 곧 잠잠해졌다. 낚시는 하는 것보다 준비하는 과정이 더 흥미롭다는 생각을 했다.


“너도 해볼래?”


스스럼없이 아저씨가 건넨 지렁이를 받아 들고 바늘에 걸었다. 낚싯대를 던지는 것은 아저씨가 도와주었다. 가만히 다음 상황을 기다렸다. 아저씨를 곁눈질하는 데 표정이 태평했다.


“이제 뭘 하면 돼요?”


“기다리면 된다. 입질이 올 때까지. 무언가가 당기는 기분이 들면 낚싯대를 올려라. 실패해도 좋으니 네가 직접 해봐.”


“내래 해본 적이 없다고 기카지 않았습네까?”


“어려울 것 없어. 나도 처음에는 한 마리도 못 잡았다. 5일 때였던가, 결국 한놈을 잡았지.”


“기렇게까지 기다리란 말입네까? 시간이 아깝지도 않습네까?”


아저씨를 바라보며 나는 의문과 혼란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 기다림. 그 시간이 좋아서 낚시를 하는 거다. 물고기를 잡는 것이 좋다면 시장에 가서 한 마리를 사 와도 되지 안 그러니. 물고기를 먹고 싶은 거라면 언제든 사 먹으면 되는 것이고. 기다리고 기다려서 이루어낸 결과가 뿌듯해서도 있지만 그 평온하고 잠잠한 분위기가 좋단다. 아무 말하지 않고 유유자적 멍하니 있는 것. 가끔은 그런 시간도 필요해.”


아저씨의 미소에 팔자주름이 반달처럼 휘어졌다.


“나중에 알게 될 거야. 결과보다 과정이 의미 있는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말이야.”


아저씨는 의자에 몸을 기대더니 눈을 감았다. 잠을 자는 것도 아니고 입가에 유유한 웃음이 머무는 그 표정이 꽤나 멋있어 보여 나도 따라 해보았다. 아줌마는 저 편에서 된장찌개를 끓이며 또 트로트 가수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다.


결국 물고기는 잡지 못했다. 아저씨는 잡았지만 나는 한 번도 입질을 느껴보지 못했다. 조금 시무룩해졌지만 아저씨가 해주셨던 말을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아저씨는 잡은 물고기의 손질을 시작했다.


“이야 제법 큰 놈인데. 회를 떠먹을까, 아니면 구이를 해 먹을까. 지우는 어떤 게 좋으니?”


“아저씨는 처음 낚시하던 날 30분도 못 버티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는데 너는 대단하구나. 이렇게 오랜 시간을 인내하다니 굉장해.”


아저씨가 쉬지 않고 저렇게 길게 말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아저씨는 부드러운 손길로 내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내게 필요한 모든 결핍을 채워주는 마법 같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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