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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세상의 시작

나의 세계를 향해 달린다.

by 예담




체육시간.


선생님이 콘을 쌓으며 라인을 만들고 아이들은 그룹 달리기를 하며 몸을 풀었다. 선생님이 룰을 설명해 주시고 나는 3번 코트에 서있다. 내 옆은 덩치가 작은 남자애였다. 달리기는 체중관리도 중요하다. 너무 무거우면 속력을 내기 힘들고 또 가벼우면 중심을 잡지 못해 넘어질 수 있다.


그럼 호루라기가 울리면 시작하는 거다. 너무 무리하지 말고.


그저 들판만 가볍게 달리던 내게 줄 앞에 나란히 서서 하는 달리기는 처음이었다. 다리에 힘을 주었다. 삑 신호가 울리고 나는 튀어나갔다. 운동장의 모래알들이 샅샅이 흩어지며 어딘가로 향했다. 심장이 쿵쿵거리며 터질듯한 포만감에 나는 완전히 빠져버리고 말았다.


일등을 향해 뛰지 않았다. 다만 내 온몸으로 느껴지는 쾌감과 스치는 바람들, 내 마음의 소리까지 모든 오감을 열어 제꼈다. 긴장감은 이미 하늘 높이 떠오른 뒤였다. 결승점에 도착하고 가뿐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들었다.


“승원아 일등이구나. 역시 실력이 더 늘었다.”


한 아이가 기세등등하게 웃고 있다. 실력이 대단한 아이가 많았다. 선생님은 나에게 다가와서 자세가 좋으니 조금만 더 연습을 하면 훨씬 좋은 기록이 나올 거라고 북돋아 주셨다. 선생님은 앞으로 우리에게 지켜야 할 것들을 알려주셨는데 라면이나 과자는 되도록 먹지 말고 수면시간은 8시간으로 유지하라고 하셨다. 체력관리를 잘하고 당일 컨디션도 최고로 만드는 것이 실력만큼이나 중요하다고 하셨다. 주말에 연습을 해야 하니 학교로 나오라는 선생님의 말에 대답을 하고 나니 대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 와닿았다. 틀림없이 해내고야 말 것이다.


좋은 말을 해주는 어른을 만나면 그 말을 하루종일 외우고 또 외워서 내 것으로 만들고 마는 습관이 있다. 좋은 어른이 내 주위에 이토록 많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낀다. 오직 은주에게 기대었던 지난날의 나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날들이 지금 펼쳐지고 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


아침에 있었던 일들이 오래전 일만 같이 느껴진다. 아줌마가 집에 오기 전에 잠을 자야겠다.. 나는 아직 이야기를 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상자를 열어 마주할 용기가 하나도 나지 않는다. 현관문을 열고 서둘러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누군가 있다. 깜짝 놀라 딸꾹질이 나왔다.


“영애 왔니. 손 씻고 옷 갈아입고 나오렴 과일 깎아줄게.”


아줌마는 말없이 사과를 깎아서 가지런히 놓아주고 콩나물을 다듬었다. 아무래도 아줌마는 내가 말을 하고 싶을 때를 기다려주는 것 같다. 여기 온 지 벌써 7달이 지났다. 그러고 보니 조금 있으면 내 생일이다. 나도 태어날 땐 엄마가 있었겠지 묘하고 아득한 기억을 더듬어보려고 하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4살 때 고아원에 왔다고 했다. 조금이라도 엄마 얼굴이 그려진다면 힘들 때마다 머릿속에 그려볼 수 있을 텐데. 아무리 떠올려도 생각이 나지 않아 늘 상상을 하며 그림으로 그려보았었다. 이렇게 내 생일이 다가오면 더욱 애달파졌다.


달력에 동그라미를 쳐두었다. 내 생일. 내가 누군가의 뱃속에서 열 달 동안 소중히 키워지고 태어난 날이다.

띠링.


알람소리에 나는 꽤나 많이 익숙해졌다. 습관처럼 휴대폰을 뒤집어 들었다.


- 뭐해? 너무 심심해서

- 내래 달력보고 있었어.

- 달력은 왜?

- 곧 내 생일이 다가와서리 세알려보고 있었어.

- 우와, 나는 1월생이라 지났는데 내가 생일선물 사줄게. 생일파티 하자!!

- 일없다. 기딴걸 내가 왜 하갔어.



생일파티를 검색해 보았다. 남조선 동무들은 어떻게 생일파티를 하는지 궁금했다. 수빈이에게 일 없다고 했지만 생일이 기다려진건 처음이었다. 기쁨보다 더 커다란 행복은 언제나 기다리는 설레임이다. 그 감정을 아주 오랜만에 느꼈다. 나의 첫 번째 생일이 다가온다. 아줌마와 아저씨, 그리고 수빈이의 축하를 받으며 나도 나에게 축하를 전할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예쁜 보석 영애에게


안녕 영애야


네가 우리 곁으로 오고 계절이 벌써 3번이나 바뀌었구나. 길었던 지난 겨울, 사시나무처럼 덜덜 떨며 지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었는데 요즘 잘 웃는 너를 보면 기뻐서 눈물이 나곤 한단다. 너는 부상을 입고 이곳에 도착했지만 사실 마음의 상처가 훨씬 더 깊었지. 하지만 너는 네가 생각했던 것보다 강한 아이였어. 상처를 치료하고 곪았던 부분을 소독하면서 많이 아팠을 텐데 견디고 이겨내 줘서 고맙다. 아줌마 아저씨는 너를 절대로 혼자두지 않을 거야. 네가 우리를 밀어낼 때마다 더 안아주려 노력할 거야. 그런 너를 이해하고 사랑하니까.

눈치챘겠지만 아줌마는 북에서 왔단다. 낚싯배를 타고 너만큼 만신창이가 되어 온 나를 아저씨가 구해주었어. 그렇게 은주와 은주아빠를 기다리며 몇 번이나 중국으로 가서 은주아빠와의 만남을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단다. 가슴이 천갈래 만갈래 찢어지는 길고 긴 세월을 견디고 살아온 나에게 너는 은주가 보내준 마지막 선물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구나. 우리 은주에게 영애 같은 좋은 친구가 있었다는 것이 감사하고 기쁘기도 하단다. 강한 척 하지만 누구보다 마음이 여리고 착한 영애야. 아줌마는 다 괜찮아. 절대 영애의 잘못이 아니야. 네가 말하고 싶은 순간이 몇 년 후라도 기다릴게. 아줌마는 기다리는 것을 제일 잘하니까. 요즘 달리기 연습을 하러 늦은 시간까지 최선을 다하며 땀이 범벅이 된 채 집에 돌아오는 너의 모습이 너무 생기 있고 좋아 보인단다. 뭐든 최선을 다하는 영애의 노력에 찬사를 보낸다.


봄이 오는 문턱에서. 너의 팬 아줌마가






육상 대회날 아침.


운동장에는 생각보다 사람이 많았다. 신기했다. 마치 올림픽처럼 엄청난 걸 하는 기분이 든다. 심장이 쿵쿵 뛰고 기대가 되어 군중석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지만 내가 사랑하는 이들을 한눈에 찾을 수 있다. 아줌마와 아저씨. 그리고 수빈이. 아직 불편하지만 꽤 좋아진 것만 같은 현서와 우리 반 친구들.

미소를 짓고 손을 흔들어주었다. 충만한 행복감이 밀려와서 이 느낌을 잊지 않으려 모든 장면을 꼼꼼히 담았다.


선수들 준비해 주세요.


준비예령이 울리자 스타트선에서 몸을 낮췄다.



호슬이 울리고 나는 뒷발로 한쪽발을 밀어 모래알들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귀가 먹먹해지고 가슴이 벅차올랐다. 세상 밖에서 헤매던 나는 비로소 나의 세계를 향해 달린다. 결과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계속 달릴 것이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응원하고 사랑해 주는 가족과 친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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