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한 하루

지네는 나를 물었다.

by 예담

[하이 바이 마마]라는 드라마를 보면서 마음이 동했다. 49일 동안 제자리를 찾으면 살게 해 준다지만, 그녀에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일들은 남은 가족의 안녕이다. 남아있는 가족의 안온한 삶을 찾아주기 위해 애쓴다. 몰래 엄마 아빠의 영양제를 사서 대문 앞에 놓아두고, 아이의 유치원에서 일하며 아이를 보살핀다. 왜 네 자리를 찾으려고 하지 않냐고, 찾아서 살라는, 안타까움과 사랑이 범벅된 친한 언니의 호통에 그녀는 울면서 답한다.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한 번밖에 없을 기회 앞에서 나의 안위를 챙길 엄마는 아마도 드물 것이다. 그 장면에서 눈물이 흘렀다. 드라마와 책은 종종 나의 삶의 궤적과 이어져 감동을 배가시킨다.






아빠의 고향인 남해로 가족여행을 갔을 때였다. 스파와 수영장이 딸린 펜션에서 고기를 구워 먹고 물놀이도 하고, 슬슬 걸어서 산책을 하고, 바다에서 모래놀이도 했다. 시간의 흔적을 따라 변해버린 그 옛날 할머니 댁 근처를 더듬으며 어린 시절도 떠올려보았다. 바다에서 물놀이를 하고 뛰어 올라와, 할머니 집 마당에서 온몸에 덕지덕지 붙은 모래를 씻으며 장난치던 기억, 방학이면 오는 손주들을 보며 잇몸이 드러나도록 활짝 웃으시던 작고 귀여우셨던 할머니, 기역자로 몸이 굽으셨던 꼬부랑 할머니방에서 나던 생경했던 담배냄새가 떠오른다.



펜션 옆에는 나무가 그득했다. 스파까지 했던 터라 습한 공기가 갑갑하여 베란다 문을 손톱만큼 열어두고 잤던 것이 화근이었을까. 여행이 주는 기분 좋은 노곤함이 우리를 감싸고 모두 곤히 잠이 들었던 한밤, 한쪽 어깨가 몹시 아파왔다. 눈꺼풀은 무겁고 한없이 꿈속인 듯하여 애써 잠을 청했는데 다시 너무나 아픔이 느껴졌다. 참을 수 없는 저릿함에 잠을 깨고 실눈을 뜬 채 어깨를 보는데 바늘이 어깨를 관통하는 것이 어렴풋이 보인다. '아, 역시 꿈이었어. 근데 왜 아프지?' 꿈에서의 고통이 기어이 잠을 깨우고 눈을 완전히 떴는데 뭔가 이상하다.

꿈이었는데 아프다!! 그것도 몹시 많이.


자는 남편을 불러 깨웠다. "여보, 나 어깨가 아파. 바늘 같은데 찔린 것 같아. 베개에 바늘이 있는 것 같아. 꿈인 줄 알았는데 계속 아파."

"바늘이 어딨어? 꿈이지!" 라며 몸을 뒤척이던 남편이 벌떡 일어나서 불을 켠다.

아프다는 내 말 한마디에. (그때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으나 한참을 지나 생각이 떠오르면 언제나 고마운 사람, 매사에 그렇다. 언제나 변치 않기를 바라.) 방이 환해지고 남편의 시선이 내 자리를 쫓더니 화들짝 놀라며 달려왔다. 반쯤 뜬 눈을 다시 깜박이며 치켜뜨고 경악스러워한다. 아 뭐지? 남편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지네다!!! 지네한테 물렸다.


지네의 꼬리가 잠든 어둠 속에서 바늘처럼 보였던 것. (아아... 다시 써도 소름이 돋는다. )

어깨는 금세 부어올랐고, 아프기도 했지만 그보단 끔찍함에 압도되었달까. 임시방편으로 약을 바르고 날이 새면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세상에! 내가 지네에 물렸다니.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음과 동시에 감사했다.

나를 문 지네에게, 세상의 모든 신들에게 정말 감사함을 빌었다. 수백 번을 다행이라고 되뇌었다.

내 옆에 곤히 잠들어 있던 아이들이 아닌 나라서, 내가 물려서 진심으로 감사함을.


아이들옆에 누워있던 나를 애써 찾아내어 물어서 깨워주었던 지네.

자네, 내가 엄마인 줄 알았던 겐가? 혹여 자네도 엄마였던 겐가?

아무튼 고맙네. 아직도 그 생각이 날 때면 온몸에 소름이 돋음과 동시에 고맙네.


한밤의 소란함에 자다 깨어 멀뚱하게 눈을 비비는 아이들의 천진함에, 어깻죽지의 아픔은 무뎌졌다. 내가 물려서 천만다행이라 생각했고, 무섭게 부어오르는 어깨가 다시금 아파올 때마다 더 깊게 감사함이 밀려왔다.


잊지 못할 감사한 하루로 아로새겨졌던 그날, 세상의 수많은 부모의 유일한 마음이 아마도 그럴 것이다.

지네는 나를 물었고, 나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꽤 평정을 유지했다. 온몸에 돋은 소름의 개수만큼 겁에 질렸으면서 동시에 기쁘다니.


당연하지!

부어오른 어깨는 가라앉고 아픔도 차츰 사라질 것이고, 내 옆에는 작고 온전한 아이들이 있으니까.



그 경험이 나에게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것, 그 자체가 그 경험의 영향이었다는 사실 말이다.
[배움의 발견]


우리는 그 따뜻해진 마음에서 살아가는 힘을 얻는 것 같은데요. 수녀님, 마음이란 무엇일까요?

마음이란 저를 살게 하는 뿌리 같아요. 뿌리가 흔들리면 나무 전체가 위태로워질 뿐 아니라 그 주변도 불안해지죠. 그래서 조심조심 다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내 마음이 우선 안정되면 바깥의 현상에도 더 민감하게 조응할 수 있고요. 더 진한 감동, 더 세밀한 감사가 일어나죠. 마음은 강이 되기도 하고 바다가 되기도 해요. 무한대로 흘러갈 수 있습니다.

[그 사랑 놓치지 마라] 이해인 수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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