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의 발견]을 읽고.
끝나지 않았다는 믿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 아마도 영원히 교육에 필요한 것은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일기는 다른이에 의해 평가받는 결과물이 될 수 없다는 것. 고3이 마지막 기회는 아니라는 것. 대학교 졸업이 인생의 시작이라고 할 수만은 없다는 것. "아... 내가 늦었다고 생각했던 그때 다른 시작을 했다면 지금은 조금 달랐을 텐데..." 아이를 낳고 뒤늦게 후회했지만 사실은 그때도 몰랐던 것이다. 그때도 무엇이든 늦지 않았음을. 멈칫거리는 순간에도 지구는 돌아가고 수많은 밤과 낮을 보내며 무뎌진다. 그럴 수밖에 없었음을 합리화시키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만다.
이토록 치열하게 눈과 마음에 담으며 읽은 책이라니. 읽고 생각하며 사유함을 멈출 수 없었다. 늘 해왔던 병렬 독서고 나발이고, 이 책에, 아니 타라 웨스트 오버에게, 빠져들었다. 그녀가 1986년생임에 놀랐고, 같은 시대를 살아왔던 나의 공백기가 사뭇 헛헛해지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 속에서 나만의 발견을 했다고 믿는다.
결핍과 풍요가 주는 교육적인 영향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것은 이 시대의 부모들의 로망인 창의성과도 연관되어 있지만, 무엇보다 결핍은 배움에 대한 의지의 근간이 된다. 풍요로운 놀잇감과 체계적인 시스템 속에서 창의성과 배움에 대한 갈망을 얻을 수 있을까. 수면 깊은 곳까지 다다르기 위해선 수영의 기술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숨을 참는 용기, 괜찮을 것이라는 믿음,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의지. 그 모든 것이 합해져서 깊은 자유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음을.
주도적인 삶이란, 결국 배움의 과정 속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과에 의한 커다란 성취감보다, 과정 속의 자잘한 고난과 녹록지 않은 과정을 견디며 자연스레 체화되는 것이 아닐까. 아이들에게 자기 주도 학습을 가르치기 위해 기관이나 학원을 보내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지 않나. 주도성을 가지고 배움을 즐기기 위해 필요한 첫 번째는 학습에 대한 이유를 찾을 수 있어야 함이 아닌지. 내가 하고 있는 공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의미 말이다.
타라는 의미를 찾기 위해 모든 것을 감수하며 삶을 더듬어 나갔다.
폐쇄적인 사고를 가진 부모를 통해 고립되고, 온갖 혐오와 차별을 겪지만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할 수 조차 없었다. 가족은 작은 사회이기 때문에. 잘못된 신념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게 해 준다.
종교의 힘으로 이루어냈다는 말들과 믿음이 어떤 이에게는 힘이 될지 몰라도 잘못된 신념을 가지게 되면 삶 전체를 위협받을 수 있다는 것. (문득 이번 코로나 19로 인해 알게 된 종교단체가 떠올랐다.)
아픔이 아픔인 줄도 몰랐던 일상이 그녀를 에워쌌다.
어린 시절의 고립, 절망과 두려움 속에서 자신을 지지해준 한 사람, 타일러 오빠. 덤덤하게 용기를 전해주고, 어쩌면 다른 세상을 보는 시작이었을지도 모를 음악을 접하게 해 준 사람.
책의 첫 장에 그 이름이 나온다. "타일러 오빠에게 이 책을 바친다."
그녀의 삶을 흔들어 놓았던 숀 오빠와 아버지, 글로 다시 쓰며 생각을 되짚어갈 때 그녀는 아팠을까, 혹은 시원했을까. 덤덤하게 서술하는 그녀의 삶이 잔인하고 고달파서 마음이 아팠다. 감정의 흔들림도 객관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애쓴 것 같다. 감정을 누르며 쓴 글 속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타라는 아버지를 묘사할 때 감정을 섞어 비판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한다고 했다. 용기를 내고, 다시 뒷걸음질 치고, 고민하고, 좌절하고, 일어나는 그 모든 과정이 아름다웠다.
그녀는 자신을 성공한 사람으로 특별하게 묘사하지 않는다. 무심하게 그려낸다.
그녀가 이룬 성공에 대한 예찬이나 스스로의 용기에 대한 자부심이 아닌, 힘들어서 주저앉았으며, 버티며 다시 고민하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는 고된 삶이 나와있어 감동이 배가되었다.
모든 것을 해내고야 마는 타라. 학교에 가본 적도 없던 그녀는 케임브리지 박사가 되었다. 자아를 찾아가기 위해 고초를 자초하는 모습을 통해, 진정한 용기가 무엇인지 알게 해 준다. 타라는 그렇게 성장해서 자아를 되찾았다.
이 책을 읽을 수 있음에 너무나 감사했다.
바람이 지나가면서 밀밭이 움푹 패지만 그 모양은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만다. 그러나 그렇게 팬 모양이야말로 우리가 바람을 볼 수 있는 제일 확실한 방법이 아닐까.
누구의 책임도 아니었다. 삶을 이루는 모든 결정들, 사람들이 함께 또는 홀로 내리는 결정들이 모두 합쳐져서 하나하나의 사건이 생기는 것이다. 셀 수 없이 많은 모래알들이 한테 뭉쳐 퇴적층을 만들고 바위가 되듯이.
차분하고 질서 잡힌 분위기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조용조용히 대화를 나누는 것 모두. 그 집에서 느껴지는 모종의 기운 같은 것을 감지한 나는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지만 본능적으로 소리를 지르거나 누구를 때리거나 부엌을 전속력으로 가로질러 뛰어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물론 진흙이 잔뜩 묻은 신발은 현관문 옆에 벗어 두라는 주의를 받았지만 말이다. 아주 여러 번에 걸쳐서.
호기심의 씨는 이미 뿌려졌다. 그 씨앗을 기르는 데는 시간과 지루함 말고는 다른 것이 필요 없었다. 라디에이터에서 구리를 빼내거나, 쇠뭉치를 한 500번째쯤 통에 던져 넣다가도 문득 타일러 오빠가 공부하고 있을 교실을 상상하곤 했다. 폐철 처리장에서 보내는 죽을 듯이 지루한 시간이 쌓일수록 내 관심은 점점 더 커졌고, 결국 어느 날 정말 괴상한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학교에 다녀야겠다는 기상천외한 생각 말이다.
아직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참고 읽어내는 그 끈기야말로 내가 익힌 기술의 핵심이었다.
불확실성을 인정하는 것은 약하고 무력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가 자신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는 행동이다. 나약하지만 그 나약함 안에 힘이 들어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이 아니라 자기 자신 안에서 살겠다는 확신.
바람을 받으며 서 있을 수 있는 것은 바람을 받으며 서 있는 것에 관해 생각하지 않아서예요. 바람은 그냥 바람일 뿐이에요. 지상에서 이 정도 바람을 맞고 쓰러지지 않는다면 공중에서도 이 정도 바람에 쓰러지지 않아요. 아무런 차이가 없어요. 유일한 차이는 머릿속에 있을 뿐이지요.
자신이 누군지를 결정하는 가장 강력한 요소는 그 사람의 내부에 있어요. 일단 그 믿음이 생긴 후에는 그녀가 무슨 옷을 입고 있는지가 전혀 중요하지 않게 됐지요.
아버지가 내게 준 것 이상의 진실을 보고 경험하고, 그 진실들을 사용해 내 정신을 구축할 수 있는 특권. 나는 수많은 역사와 수많은 시각들을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스스로 자신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믿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