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탕 가던 날

영화[행복 목욕탕]을보며 들었던 생각

by 예담



어렸을 때는 엄마와 목욕탕을 가는 것이 주말 아침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토요일에도 학교를 갔던 유년을 보냈으므로 일요일 아침은 유일하게 늦잠을 자며 이불속에서 실컷 게으름을 피울 수 있었다. 뭐랄까, 평일의 성실했던 균형을 놓아버리며 철퍼덕 힐링을 한달까. 위안을 받고 마음의 안정이 되는 일요일 아침이 좋았다. 느지막이 일어나서 네모난 박스처럼 투박하게 생긴 티브이 앞에 다가가 엄지와 검지로 타닥! 돌리며 만화를 틀고, 동생과 엎드려 시시덕거리며 만화를 보았다. 그런 소소한 행복들은 작은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임이 깊어서 기억에 선명하다.


엄마는 일요일의 느긋함을 바라봐주었지만 단 하나 목욕탕에 있어서만큼은 절대 예외가 없었다. "엄마, 오늘은 가기 싫어요. 친구랑 놀기로 약속했어요."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었다. 목욕탕을 안 가면 전쟁이라도 날 것처럼 엄마는 어떤 사명감을 가진 듯 꼬박꼬박 데리고 다녔다. 어떤 날에는 반쯤 우는 얼굴로 끌려가서 엉덩이를 찰싹찰싹 맞으며 엄마가 박박 때를 밀어 델 동안 물과 눈물이 범벅이 된 채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엄마는 살갑게 말을 붙이며 풀어주려 했지만 딸내미는 엉킨 마음을 쉽게 풀어주기가 싫다.


"뜨거운 탕에 더 들어가서 있다가 와!" 아직 덜 불었다며 어깨까지 푹 담그고 앉아 있으라는 엄마의 말에 온탕에 엉거주춤 앉으면 마치 삼계탕이 되어서 내가 끓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엄마는 나를 끓여먹을 거예요?"라고 볼멘소리를 하며 입이 툭 틔어 나오면, 엄마는 한 술 더 떠서 대답했다. "아이고 뼈밖에 없어서 뜯어먹을 살도 없다! 그러니까 통통하게 살을 더 찌워야지! " 피식 웃음이 나왔다. 엄마는 기어이 나를 웃게 했다.



목욕탕 가는 날이 기다려지기도 했다. 장수탕 선녀님의 덕지처럼 요구르트가 좋아서이기도 했지만 그냥 좋았다. 굳이 요구르트가 아니라도 그날은 주말이었고, 엄마와 손잡고 걸을 수 있었으며 종알종알 이야기하는 다정한 시간도 좋았다. 목욕을 마치고 나오는 길! 어쩜, 시간이 이렇게나 흘렀는데도 그때의 향과 상쾌함, 바람 같은 것들이 생각 속에 흐르고 있는 느낌이 든다. 목욕탕을 나와 집으로 걸을 때 덜 말린 머리카락을 스치고 흐르는 바람이 시원했다. 뽀득뽀득 엄마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때를 밀어주고 로션을 꼼꼼히 발라줘서 온몸이 보들보들해졌다.


상쾌함을 가득 안고 집에 오면 솔솔 졸리기 시작했다. 그때의 노곤함도 기억 속에 스며있다. 일요일이 아까워서 낮잠 따윈 자지 않으려고 눈을 부릅뜨고 놀았던 기억, 뜨끈한 목욕탕에서 일주일치의 몸과 마음의 피로를 풀어내면 개운해졌다. 꼬맹이에게도 그렇게 다시 월요일을 시작할 조금의 용기가 생긴다. 나에게 일요일은 엄마가 전해준 향기와 용기로 기억된다.







영화 [행복 목욕탕]에서 엄마(후타바)와 딸 (아즈미)는 둘이서 살고 있다. 어느 모녀지간과 다름없이 투닥투닥 다투기도 하고 언제 그랬냐는 듯 웃는다. 아즈미는 학교에서 왕따(이지메)를 당하고 있다. 아침마다 학교를 가기 싫어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며 버티는 아즈미는 엄마에게 이유를 말하지 않는다. 엄마에게 틱틱거리지만 엄마가 걱정할까 봐 말하지 않고 견디는 아즈미의 마음과, 딸의 상황과 힘듦을 짐작하지만 스스로 이겨낼 수 있게 하기 위해 냉정하고 단호하게 대하는 후타바의 마음은 닮아있다. 우리의 영화나 드라마라면 엄마가 나서서 학교로 찾아가 한바탕 하고야 말 텐데, 그러지 않는 후타바의 태도가 생소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여기서부터 빠져들었던 것 같다. 무엇이든지 스스로 이겨내야만 하며 분명히 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아즈미는 다시 학교로 향한다. 수치와 모욕감을 딛고 일어나 상황을 해결하고야 만다. 그 부분에서 반감이 들기도 했다. (그렇게까지 해서 이겨내야만 했나 하는. 디테일한 상황은 생략.) 분명한 것은 부모의 도움으로 모면한 아이와 스스로 컨트롤하며 이겨낸 아이의 깊이는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지나고 보면 알게 될 수면 아래의 깊이 차이는 나중에 아이가 자라면서 더 큰 태풍이 몰아닥칠 때 큰 힘을 발휘하게 될 터이다.


이쯤되면 떠오르는 합리적인 의문. 아빠는 어디 갔는가? 망할 놈인가? 암요!

부모에게 목욕탕을 물려받아서 해오던 오디기리 죠 는 일년전 집을 나가서 깜깜무소식이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후타바는 암 선고를 받고 탐정을 고용해서 남편을 찾아 나선다. 기껏 찾은 남편은 내연녀가 낳은 딸과 둘이서 살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넷은 함께 살게 되고, 다르고도 같은 가족 이야기가 시작된다. 어이없는 날들도 따뜻하게 보듬어주고 힘든 하루도 어떻게든 견뎌내고야 마는 가족의 이야기가 이제야 시작되나 싶지만 반전에 신파를 거듭한다. (중요한 스포가 되기에 생략)


마른하늘에 날벼락으로 암 선고를 받은 후타바는 아즈미에게 살아가는 법을 하나씩 알려준다. 홀로 이겨내는 법, 받아들이는 법, 행복을 음미하는 법, 아파도 고름을 터뜨리는 법을 가르쳐준다. 네 가족은 처음엔 엇갈려 있었지만 마지막은 함께였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목욕탕은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라는 의미를 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목욕탕이 주는 노곤함은 상대에 대해 따져보지 않고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있으니까. 알고 보면 비슷하게 불완전하기에 굳이 흠을 가리려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고. 서로가 서로의 빛이 되어주고 가림막이 되어주기도 하면서 걸으면 되었다. 그런 생각이 들면서 눈물이 났던 영화였다. 서로를 위하는 마음은 따뜻한 목욕탕과 닮았구나.


오디기리 죠는 철없는 아빠 캐릭터가 어쩜 그리 찰떡인지! 슬픈 장면에서도 그의 연기에 웃음이 났다. 찐하게 생긴 생김과 책임감도 능력도 없는 캐릭터는 분명히 별로임에도 꾸역꾸역 이해하고 싶어 졌다.

여담이지만, 결혼 전인 누군가가 글을 읽는다면 남자뿐만이 아니라 여자에게도 결혼에 있어 중요한 것은 능력보다 책임감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물론 능력과 책임감이 동시에 파워업이라면 더할 나위 없겠다. 능력이 책임감보다 앞선다면 자만하며 지키지 못할 작은 약속들이 하나 둘 고개를 디밀며 마음을 뾰족하게 만들게 마련이었다. 시간이 지나고 책임감이 앞서가면 서로가 애틋해진다. 그런 순간이 오면 비로소 나의 사랑은 고유하므로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가 불가능해진다.



+

카모메 식당이나 리틀 프레스트 같은 특유의 잔잔한 감성의 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이 영화로 마야자와 리에와 스기사키 하나는 일본 아카데미상 여우 주연상과 여우 조연상을 받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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