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의 감동을 만끽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밀려드는 육아의 힘든 점을 꼽으라면 모자라고 불규칙한 잠이다. 양질의 수면을 취하지 못하면 누구나 예민해지고, 상대에게 받았던 그간의 수많은 배려와 사랑이 사소한 말 한마디, 작은 행동 하나로 모래성처럼 와르르 무너져 내리기도 한다. 첫아이를 재우다 까무룩 함께 잠들었다가 깨면 건조함을 넘어선 안구의 뻑뻑함에 신경이 곤두섰지만 밤중 수유를 하려면 몇 시간에 한 번씩 렌즈를 끼웠다 뺐다 반복해야 했다. (그 당시엔 눈이 많이 나빠서 안경 착용도 힘들었다.)
모자란 잠은 둘째치고 내 품에 잠든 아기를 안고 토닥일 때, 졸음이 파도처럼 밀려와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기 싫을 때, 몇 분만 눈을 붙이고 싶을 뿐이었다. 간신히 잠든 아기를 내려놓고 다시 렌즈를 빼고 나면 졸린데도 정신이 말짱해졌다. 몽롱한 기분으로 아기를 들여다보다가 달콤한 잠의 기운이 스르르 나를 부르면 어김없이 아기는 몸을 뒤척이며 울음으로 나를 깨웠다. 다시 후다닥 렌즈를 끼고 오는 밤 시간이란 꽤나 고되고 지난했다.
엄마는 결혼한 딸의 라식수술을 제안하고 아시는 안과의사에게 연락도 하며 종종거리셨지만 당시에 일을 하고 있었던 나는 도무지 시간을 내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눈이라 최소 이틀은 쉬어야 했고 수술 전 후로 병원에 다녀야 했기에 당장 급하지 않다는 이유로 우선순위에서 늘 밀려났다. 둘째가 세살이 되던 해에 안과에 가서 진료를 받고 수술 일정을 잡았다. 수술 전의 떨림과 긴장이 민망할 정도로 수술은 전혀 힘들지 않았고 잠깐 불편할 정도였다. 수술을 마치고 얼마간 시린 눈 덕분에 안약과 눈물로 아련하게 빛나는 눈이 연출된 건 덤이다.
세상에! 수술을 끝내고 적응기간을 거쳐서 신세계에 당도했다. 잠깐 졸기라도 하면 뻑뻑해진 눈에 두통까지 밀려왔었는데 이젠 마음껏 졸 수 있다니, 여행 갈 때 렌즈 세척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니, 책을 보며 자연스레 잠들 수 있다니, 무엇보다 가장 놀라웠던 건 아침에 눈을 뜨면 보이는 세상! 안개 낀 듯 흐리게 보였던 아침은 선명하고 맑은 아침으로 바뀌었다. 눈을 뜨고 또렷한 사물에 놀라 아마도 수십 번 렌즈를 끼고 잔 줄 알고 당황했었다. 매일 아침의 전경은 눈을 뜰 때마다 잠깐 어리둥절했고 오래도록 황홀했다.
수술을 마치고 아이들을 데리러 친정에 갔을 때 엄마와 남편이 나누던 대화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임서방 미안하네. 수술을 진작 했어야 했는데 바쁠 텐데 시간을 많이 빼서 어떡하나. 수술비는 내가 줄게."
"아유 어머님 무슨 말씀을요. 괜찮습니다. 수술비는 당연히 제가 내야죠. 제가 이제 보호자입니다. ㅎㅎㅎ"
주거니 받거니 한참을 나누는 대화를 듣다가 빵 터져서 웃으며 대화에 끼어들었었다.
"왜들 그래요? 내 수술비 내가 내면 되는데! 그리고 엄마는 뭐가 미안하데? 누가 들으면 입양 보낸 아이인 줄 알겠어요 아이쿠야"
결국 보호자를 운운하며 수술비는 남편이 냈지만 엄마는 그 후에도 몇 번이나 결혼 전에 시킬걸 놓쳤다며 본인의 책임을 탓했다. 그럴 때마다 남편은 난처해하며 가당치도 않는 유머를 이어가며 아재 개그를 해댔다. 우리는 기어이 웃고 말았다. 좋은 사람.
삼십 대 초반이었던 나이가 무색하게 아직 나의 보호자는 엄마였다.
참말 애틋한 외할머니와 손녀
그로부터 6년 뒤, 건강검진을 통해서 엄마의 뇌혈관에 이상이 있음을 알게 되고 정신이 아득해졌다. CT, MRI를 찍고 입원을 했고, 조영술을 한 다음날 수술이 결정되었다. 뇌혈관 중 하나가 부풀어 있어서 뇌동맥류 코일 색전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첫 검사를 받은 병원에서는 개두술이 불가피하다고 하였는데 이 병원에서는 개두술 없이 수술이 가능하다고 했다. 의사 선생님마다의 계획이 있겠으나 개두술은 피하고 싶었다. 엄마는 서울말을 쓰는 의사 선생님의 사근사근하고 친절한 설명에 믿음이 간다고 하셨다. 의사도 사람을 대하는 직업이기에 친절함은 믿음을 배가시킨다. 내가 같이 진료실에 들어갔을 때 느낀 의사 선생님은 서울 억양의 한마디 한마디에 소신과 강단이 뚜렷이 묻어났다. 그게 친절함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엄마는 서울남자 특유의 부드럽고 사근사근한 억양을 타인에 대한 배려와 친절함으로 믿고 계신다. 평생을 함께 한 경상도 남자의 타고난 무뚝뚝함 플러스 크고 권위감 가득한 목소리에 길들여지셔서 그런가봉가.
엄마가 입원을 하고 우리 남매는 하루에도 수십 번 연락을 주고받으며 병원을 들락날락거렸다. 잠긴 마음으로 병실에 당도했을 때 큰 목소리의 유쾌하고 친화력 좋은 아빠가 웃으며 이야기 나누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빠는 간호사와도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간병인들과도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었다. 뭐지! 저 인싸스러움은? 의아함은 빠르게 스쳐 지나갔고 아빠의 표정이 밝아서 되려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덕분에 엄마도 수술에 대한 불안감이 조금은 누그러지지 않으셨을까? 아빠는 걱정이 우리보다 많으셨겠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시며 더 밝고 건강한 모습으로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웃으셨다. 그런 아빠의 모습이 고맙고도 아팠다. 수술 날이 되었을 때의 초조한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빠는 내내 감추던 긴장을 그제야 들어냈다. 한참 뒤에 하신 말씀이지만 산소통이 수술실로 들어가는 것을 보곤 아찔함을 느꼈다고 하셨다.
천만다행으로 수술이 잘되었지만 엄마는 회복이 더디었고 의식을 찾으며 많이 힘들어하셨다. 두통과 흉통, 팔과 허벅지에는 혈관을 찌르다 생긴 멍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수술은 잘 되었습니다."라는 두 손을 모아 기다렸던 말을 듣고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건강검진 중 발견되어 다행이었고 수술이 잘 되어서 감사했다.
병원비야 아빠가 다 정산하셨지만 나중에 엄마에게 삼백을 드렸다. 살다 보면 꼭 돈이 돈(재화)으로서의 목적이 아닌 마음으로서의 가치를 지닐 때가 종종 있다. "우리가 옆에 있으니 걱정하지 마. 사랑해 엄마" 서울말을 좋아하는 우리 엄마는 이런 살가운 말을 원할 텐데, 그건 간지러워서 못하겠고 다만 당연한 것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필요할 때 함께 있어주고 부모의 괜찮다는 빈말을 흘려듣지 말아야지. 크고 적음을 떠나 병원비는 우리가 책임질 수 있도록 신경 써야지. 자주 연락해서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을 나누어야지. 오늘은 뇌 건강에 좋은 호두와 블루베리를 친정으로 보내고 아버님이 간식으로 드실 에그 포테이토 샌드위치를 가져다 드렸다.
이제야 겨우 책임감을 바꿔서 짊어지기 시작한다. 마흔이 되며 부모의 보호자가 되는 법을 배워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