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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예담 Mar 20. 2023

포르투갈 리스본,
"고생하는 여행"

유럽여행 포토에세이 #12 _ Lisbon, Portugal

25 국가 107일의 여행 기록:

포르투갈 리스본,

첫 번째 이야기: 고생하는 여행.




    '포르투 캄파냐'역에서 아침 8시 30분에 출발하는 기차에 올라탔다. '리스본 산타 아폴로니아'역을 향해 약 세 시간 반 이동시간의 여정이었다. 포르투갈 서부 푸르른 대서양 해안을 따라 내려오는 기찻길은 드문드문 초록빛의 싱그러운 포도밭을 가로질러 지나갔고, 나는 이동 내내 풍경을 감상하느라 시간이 얼마나 흐르는지도 몰랐다.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리스본에 도착해 있었다.




산타 아폴로니아역



산타 아폴로니아역 승강장

    오후 12시쯤 되어 기차의 창문 너머로 드넓은 '테주' 강 (Tejo, 타구스 강) 하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정오의 강한 햇빛이 잔잔히 일렁이는 물결에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고, 반대편 창문에는 겨우 3, 4층 정도 돼 보이는 작고 아기자기한 파스텔 톤 색깔의 건물들이 줄을 지어 옹기종기 모여있었다. 기찻길 옆 도로로 통행하는 차들이 많아지고, 테주 강 위에 유유히 떠다니는 하얀색 작은 요트들과 다수의 무역선들을 확인하고 리스본에 거의 다다랐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리스본에 곧 도착한다는 안내 방송과 함께 기차에 탑승하고 있던 승객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 짐칸에 있던 본인들의 짐을 찾으러 가기 시작했다. '28인치 대형 캐리어'를 이끌고 여행하는 나도 혹여나 누군가 내 짐을 몰래 가져갈까 분주히 자리에서 일어나 열차의 이음부 쪽 짐칸으로 향했다.


    공간이 협소해 빈틈없이 층층이 쌓인 가지각색의 수하물들 사이로 매우 육중해 보이는 내 캐리어를 단번에 발견했다. 성인 남성의 어깨 정도되는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고, 무게가 약 25kg에 육박해 지상으로 내리는데 꽤나 애를 먹었다. 그리고 이는 잠시 후 있을 또 다른 엄청난 시련의 작은 징조였다.


리스본 산타 아폴로니아역

    산타 아폴로니아역에 도착해 기차에서 내린 나는 리스본의 첫인상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천장이 시원하게 뚫린 승강장 위로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바라보며, 말 그대로 뜨겁게 내리쬐는 햇빛의 직사광선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 "뜨겁고 쨍한 햇빛"이 리스본의 첫인상이었으며, 앞으로 이어질 리스본 여행 내내 나를 괴롭힐 고약한 녀석이었다.


    승강장에 설치되어 있는 작은 그늘막에 숨어 잠시 숨을 고른 뒤, 같은 열차를 타고 온 승객들을 따라 산타 아폴로니아 기차역 내부로 향했다. 승강장 자체의 거리가 꽤나 길어 대합실까지 가기 위해 한참을 걸어야 했다. 이동하는 동안 기차역 내부를 구경하며, 선로 위 또 다른 여행객들을 기다리는 기차들을 보았다. 잠시 정차하고 있던 그들의 행선지를 우연히 확인하였는데, 스페인, 프랑스 등 다양한 도착지들이 표기되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기껏 멀리 가야 서울과 부산이지만, 여기서는 기차를 통해 먼 다른 나라까지 갈 수 있다는 게 흥미로웠다. 저 멀리 역 출구가 보이기 시작했고, 역을 벗어나 외부로 나와보니 빨간색으로 예쁘게 칠해진 산타 아폴로니아역 건물이 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리스본과 언덕



    기차역 외부에는 리스본의 옅은 베이지색 택시들이 줄을 지어 고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트램과 버스를 기다리는 여행객들도 보였다. 역에서 숙소까지 구글 지도를 통해 찾아본 결과 약 40분 정도 걸어야 하는 거리였다. 택시를 타자니 이동 비용이 필요 이상으로 많이 들 것 같았고, 버스나 트램을 이용하자니 작은 화폐 단위의 현금이 없었다. 추후 "리스보아 카드 (교통 무제한 및 관광 명소 입장 카드)"를 구입할 예정이었기에 따로 교통카드를 구입하고 싶지 않았다. 거리를 걸어가며 도시의 작은 모습들을 천천히 구경하는 것도 여행의 묘미라 생각했던 나는 40분의 거리를 직접 걸어가기로 결심하였다. 28인치 캐리어와 10kg가 넘는 백팩과 함께.


    기차역을 나선 지 5분 정도만에 후회하기 시작했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고 출발했던 것과는 달리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체력이 고갈되기 시작했다. 그날 오후 리스본의 기온은 영상 40도에 육박했었다. 강한 햇살은 피부를 직접적으로 내리쬐며 온몸을 태우는 듯했다. 뜨겁게 달궈진 도로 위로 올라오는 열기 또한 나를 지치게 만들었다. 이미 온몸은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테주 강의 습기 때문인지 그늘도 시원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드문드문 있는 그늘에 숨어 잠시 쉬던 중 걸어가기로 한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었다.


    리스본에는 '언덕'이 많다. 몰랐던 사실이었다. 리스본은 "일곱 언덕의 도시"라는 별명과 함께 구릉 위에 지어진 도시로 유명했다. 언덕의 높이도 보통 높은 게 아니었다. 언덕을 하나 오를 때마다 등산하는 느낌이었고, 급격한 경사의 언덕을 연속으로 몇 개씩 만날 때의 그 고통은..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일곱 개는커녕 숙소까지 걸어가는 길에 스무 개의 언덕은 만난 듯하다. 그렇게 온몸으로 경험한 리스본의 더위와 언덕은 나에게 의도치 않은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지금까지도 이미 충분한 고생길이었지만, 더위와 언덕을 넘어 더 큰 문제가 따로 있었다. 바로 그 유명한 유럽의 '돌바닥'이었다. 대도시로써 당연히 한국처럼 보행자 도로 시설이 잘 구비되어 있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리스본의 바닥은 울퉁불퉁한 돌바닥과 고르지 못한 아스팔트 도로로 가득했다. 25kg의 28인치 캐리어를 끄는 나에게 이 순간은 지옥과도 같았다. 평소 웨이트 운동을 싫어하는 내가 '여기서 운동을 다 하는구나'라며 실소했다. 무거운 수화물을 끌고 언덕을 오르며 상체와 하체를 동시에 골고루 다질 수 있었다. 거기에 엄청난 더위와 40분이라는 거리를 꾸준히 이동하며 유산소까지..


    매우 고된 시간이었지만 최대한 긍정적인 마음을 잃지 않았다. 너무 힘들면 멈춰 서서 잠시 쉬기도 하고, 몇 번을 반복하다 보니 마침내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지도상 40분의 거리였지만, 실제로 1시간 이상은 걸린 듯하다. 이미 힘은 다 쓰고 지칠 대로 지쳐서 숙소에 도착하는 순간 쓰러질 것만 같았다. 총 40kg에 달하는 짐을 들고 온 나 스스로가 야속하게 느껴졌다. 갈증과 함께 탈수 증세가 느껴져 1.5리터 물병을 원샷하고, 숙소의 시원한 바람과 함께 몇 시간은 꼼짝 않고 누워 있었다.






편안한 여행과 고생하는 여행



    언덕을 오르며 고생을 좀 하고 나니 작고 사소한 부분에서 감사함을 많이 느낄 수 있다. 여행 중 겪은 고생들을 통해 늘 아무 생각 없이 누리고 살아왔던 당연한 것들에 대한 소중함을 많이 깨닫게 되었다.


    이번 여행을 하며 "여행 스타일"에 대한 내 나름의 철학을 가지게 되었다. 여행에 대한 취향과 재력에 따라 여행하는 방식이 달라지겠지만, 편안한 여행과 고생하는 여행은 각각 그 장단점이 뚜렷하다.


    고생하는 여행은 최대한 어린 나이에 경험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젊을 때 고생은 사서 한다"는 말도 있듯, 어린 나이에 많은 경험을 해보며, 그에 맞는 본인만의 통찰과 철학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 여행 중 겪는 고생을 이른 나이에 경험하고, 직접 이겨내는 과정을 통해 인격적으로 성숙해지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다. 어릴 때 하는 여행이 더욱 좋은 점은 여행 중 막 굴러도 그게 고생하는 건지 모르고 패기 있게 여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단, 몸이 힘들다는 단점이 있다.


    나이가 조금씩 들수록 점점 편안한 여행을 추구하게 된다. 나도 아직 젊은 나이이지만, 하루하루 시간이 흐를수록 체력이 감소하는 것이 느껴지고, 일정을 소화하는데 한계가 생긴다.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것보다 한 곳에 머물며 휴양하고, 유명한 좋은 식당을 가고, 편안한 호텔을 찾으며, 걷는 것보단 택시를 이용해 편리하게 이동하는 것이 더욱 선호된다. 너무 좋은 여행의 방식이지만, 어쩌면 여행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또 다른 많은 부분들을 놓치는 것도 아닌가 생각이 든다.


    이제는 나도 나이가 조금씩 들어서 그런지 쉬는 여행이 좋아진다. 이것저것 최대한 많이 보고 돌아다니는 것도 좋지만, 그것도 며칠 지나고 나면 지쳐 편안한 것을 찾기 시작한다. 하지만, 앞으로 남은 생에서 오늘의 내가 제일 젊은것처럼, 어쩌면 이때 이렇게 고생스러운 여행을 할 수 있었다는 게 참 다행이라고도 느껴진다. 소중하고 기억에 많이 남는 순간들을 보내며, 여행 중 재미있는 추억을 하나씩 만들어 가는 중이다.


행복노트 #9

여행하며 겪었던 고생은 시간이 지나 재밌는 이야기가 되어 추억으로 남는다.





하루의 끝, 전망대



    숙소에 도착하고 너무 지친 나머지 도저히 식당에 가서 밥 먹을 힘이 나지 않았다. 숙소 앞의 작은 마트에서 간단하게 장을 본 뒤 숙소로 돌아왔다. 리스본의 전체적인 물가가 상대적으로 저렴해 로제와인과 오븐에 구운 치킨, 빵과 음료수, 물 등 여러 물품을 담았지만 단돈 10유로(약 14,000원)를 간신히 웃도는 가격이었다. 맛있는 음식들을 적은 가격에 풍족히 먹을 수 있음에 행복했다. 이른 저녁을 먹고 휴식을 취하고 나니 다시 힘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대로 하루를 끝내기 아쉬워 전망대에 한번 방문해 보기로 했다.


     외출을 위해 샤워를 하고 보니 오른쪽 새끼발가락 발톱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아무래도 무거운 짐을 끌고 리스본의 높은 언덕을 수차례 등반(?)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다친 것 같았다. 조금은 당황스러웠지만 다행히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고, 한국에서 가져온 구급약으로 간단한 조치를 취하였다. 아까의 힘들었던 고통은 벌써 말끔히 잊은 채 또다시 리스본 시내로 발걸음을 향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무식한 여행이었다.


상조르주 성

    여행 첫날인 만큼 리스본 시내 전경을 한 번 둘러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높은 곳에 올라가 어디를 어떻게 방문할지 미리 한번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숙소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전망대(Miradouro da Senhora do Monte)를 찾았고, 그곳을 향해 걸어갔다.


    그렇다. "전망대"라 함은 대체적으로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 리스본의 언덕과 돌바닥을 걸으니 다친 부분이 자극되어 발이 점점 상한 게 느껴졌다. 포기하고 숙소로 돌아가 쉴 법도 했지만 이상하게 '힘들다'는 생각보다 '즐겁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꿋꿋이 전망대를 향해 걸어가며 천천히 리스본의 모습을 감상하였다.


    리스본의 햇빛은 늦오후까지도 꾸준히 뜨거웠다. 심지어 햇빛이 너무 눈부셔 선글라스 없이 눈을 뜨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리스본 거리에 많은 관광객들을 볼 수 있었다. 골목마다 리스본의 감성을 느낄 수 있었고, 리스본도 매력이 많은 도시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전망대에 올라 리스본 전경을 바라보았을 때, 오렌지색 지붕들이 온 도시를 덮고 있음이 인상 깊었다.


    다음 날은 어떤 고생스러운 하루가 또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여행 중 겪는 재밌는 추억이라 생각하며 즐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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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인스타그램: @domdomkim_trav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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