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여행 포토에세이 #39 _ Zurich, Switzerland
25 국가 107일의 여행 기록:
6월 중순 무렵의 스위스는 너무 더웠다. 아니 잦은 이동과 무거운 짐을 이고 다녔기 때문에 더욱 덥게 느껴진 것일 수도 있다. 약 2주가 조금 안 되는 시간 동안 스위스에서만 7개의 도시를 방문해 그런지 정신없는 일정의 연속이었다.
이번 유럽여행을 통해 가장 크게 느꼈던 부분은 여행에서도 여유가 중요한 것이었다. 처음 온 유럽이었기에, 또한 배낭여행이었기에, '지금 아니면 또 언제 오겠어'하는 마음이었다. 아쉽지 않게끔 방문하고 싶은 도시와 장소들을 모두 계획에 녹여냈고, 그렇게 여행 중 바쁜 일정을 강행했다.
아침에 스위스 인터라켄을 출발해 점심쯤 스위스 루체른에 잠시 들러 그곳의 유명한 관광지들을 잠시 둘러보았다. 더운 여름 날씨의 땡볕 아래 2-3시간을 걸어 다니고 다시 중앙역으로 돌아와 그날 계획의 종착지인 스위스 취리히로 향했다. 하지만 취리히에 도착하기 전, 늦오후 해가 아직 넘어가기 전, 이미 나는 녹초가 되어 여행에 지쳐가고 있었다.
취리히 도착 후 짐을 두기 위해 숙소를 찾아가는 길에 정신이 점점 혼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추측컨대, 햇빛을 많이 받고 날씨가 너무 더워 탈수증세와 열사병이 온듯했다. 온몸에 힘이 빠지고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으며, 오르막길을 오르는 게 두려워졌다. 여행 중 가장 힘들었던 순간 중 하나였다. 그러니 시간적으로, 금전적으로 여유가 있다면 최대한 여유 있는 일정을 짜도록 하자.
만약 지금 다시 똑같은 유럽여행을 하기에는 절대 엄두가 안 날 것이다. 많은 곳을 방문한 즐거움과 고통은 비례했기 때문이다. 또한 여행 중 특별히 기억에 남았던 장소들에 있어 그곳의 분위기를 더 여유롭게 즐기지 못했다는 생각에 작은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지금처럼 젊은 이 시기에만 소화할 수 있었던 여행이었기에 모든 여행이 끝난 지금은 정신없이 지나갔던 유럽여행을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
한국 사람들에게 가장 친숙한 스위스 도시들은 아마 '취리히'와 '제네바'일 것이다. 이 두 도시가 다른 여타 스위스 도시들에 비해 더욱 널리 알려졌고, 규모 면에서도 훨씬 거대하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스위스의 수도가 '취리히'인 줄 착각하는 경우가 있지만, 실제로 스위스의 수도는 '베른'이다.
'취리히'가 스위스의 수도로 종종 오해받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스위스 내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상업적으로, 문화적으로도 제일 중심 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큰 국제공항까지 보유하고 있어 국내에서 인천 취리히 직항도 매주 운행되고 있으며, 타 유럽 국가들에서도 취리히를 경유해 목적지로 가는 경우가 많다. 이에 취리히는 스위스 최대도시인 것은 맞지만, 가끔 스위스 수도로 오해받는 것이다.
지금까지 방문했던 스위스의 다른 도시들 '제네바, 베른, 바젤, 인터라켄, 루체른 등'에 비해 취리히는 훨씬 더 도시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스위스 다른 도시들이 자연과 함께 어우러져 여유 있고 한적한 모습이었다면, 취리히는 반대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유럽의 대도시 풍경과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스위스'하면 가장 유명하고 쉽게 떠올릴 수 있는 것들 중 하나는 바로 '금융업'이다. 현재 스위스에서 유명한 거대 은행들의 본사가 다수 이곳 취리히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므로 취리히는 금융업, 상업의 도시라는 인식이 강하고, 거액의 자금이 도시 내에서 활발하게 움직이다 보니 그 수혜를 전적으로 얻어 '스위스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사실상 스위스를 넘어 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들 중 하나이다.
특히 스위스 은행들은 그 안전성과 함께 고객의 신상과 재산 등 여러 민감한 중요 정보들을 철저히 기밀로 유지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에 전 세계 많은 부호들이 스위스 은행을 선호하며 많은 자금을 거래하고 있다. 가끔은 부정부패를 일삼는 권력자의 재산이나 출처가 불분명한 불법으로 의심받는 자금도 예치시킴으로써 몇몇 스위스 은행들의 경우 지탄을 받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높은 신뢰도'라는 가치를 바탕으로 지금도 전 세계 금융자금을 운용하고 있다.
실제로 내가 스위스 취리히를 방문했을 때, 취리히 중앙역 출구로부터 발을 내딛자마자 받은 도시의 첫인상은 '부유함'이었다. 도로 위에는 높은 가격대의 고급 브랜드 자동차가 줄줄이 이어져있고, 국내에서 쉽게 보기 어려운 자동차들을 자주 목격할 수 있었다. 또한, 거리를 걷는 대다수 사람들의 행색과 분위기마저 매우 지적이며 전문적인 느낌이 들었다.
스위스의 높은 물가는 악명이 높다. 스위스를 처음 방문하는 여행객들은 모두들 하나같이 상상 이상의 높은 가격표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한다. 그나마 식료품점이나 프랜차이즈 패스트푸드점은 양반인 편이며, 식당에 방문해 조금이라도 좋은 퀄리티의 음식 메뉴를 시키면 1인 기준 한 끼에 최소 10만원 이상 나오는 것은 스위스에서는 별로 놀랍지 않은 이야기다.
나는 스위스를 일주일 넘게 여행하고 있었기에 이미 스위스 물가에 적응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취리히의 물가는 또 다른 세상이었다. 스위스에 방문한 만큼 스위스 대표음식 중 하나인 '치즈퐁듀(퐁뒤)'를 현지에서 먹어보고 싶었다. 특히, 퐁듀 맛집이 취리히에 많다는 정보를 접하였고, 스위스에서 퐁듀 먹는 것을 지금껏 미뤘다. 그렇게 추천받은 식당으로 자신감 있게 입성해 기다리고 기다린 퐁듀를 먹으려 식당 메뉴를 보았고, 나는 그대로 한없이 작아질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작은 양은냄비 크기의 팟(pot)에 와인을 곁들인 치즈와 감자, 버섯 등 다양한 재료들이 들어간 메뉴가 기본 5만원 이상으로 시작했다. 여기에 애피타이저, 사이드 디쉬, 드링크까지 추가하면 그 금액은 곱절로 올라가게 된다. 아무래도 혼자 하는 배낭여행 중에 한 끼 식사비용을 15만원 가까이 쓰는 것은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현지에서 치즈퐁듀를 먹는 것은 귀한 경험이기에 쓸 때는 써야 한다는 마음으로 음식을 주문했고, 결과적으로 독특한 향과 맛에 너무나도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나는 미국과 유럽, 일본, 동남아, 중남미 등 세계 다양한 지역들을 직접 방문해 보았지만, 스위스를 여행하는 내내 '과연 스위스만큼 살기 좋은 나라가 있을까'하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물론 짧게 방문한 것이고, 직접 살아보지 않았기에 내가 모르는 부분도 많이 있겠지만, 단적으로 보이는 모습들에 있어 가장 이상적인 국가에 가깝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들이 가진 부유함과 제도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인생은 원래 불공평하다.
익숙해져라.
빌 게이츠
나는 학부대학 당시 정치학과 경제학을 복수 전공했다. 고등학생 당시 대학교 진학을 앞두고 전공과 진로에 있어 고민이 많았었다. 대학 특성상, 한 번 전공이 정해지면 대부분 그 분야로 직업적 커리어가 이어진다고 생각했기에 어떤 학과를 선뜻 선택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성격상 인생에 있어 하고 싶은 건 꼭 해야 하고, 선택한 분야에 있어 늘 최고가 되고 싶어 했기에 더욱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특히, 나에게 내신이나 수능 성적에 맞춰 전공을 선택하는 것은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미래의 진로를 두고 한참을 고민하던 어느 날, 단번에 이 전공으로 선택해야겠다고 다짐하는 사건이 있었다.
2013년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시기, '하이옌'이라는 큰 태풍이 필리핀을 강타했다. 무려 6천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사망했고, 천만명이 넘는 인구가 물질적, 재산적 피해를 입었다. 그러고 반년이 지난 2014년 여름, 우연한 기회가 닿아 해당 지역에 직접 방문해 피해복구를 돕고, 현지인을 위로하는 단기봉사에 참여하는 활동을 했다. 해외 관광객들이 잘 방문하지 않는 필리핀의 소도시들과 어촌 마을들을 방문하며, 현지인들과 어울리고, 그들의 생활을 간접적으로나마 지켜볼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한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개발 국가이며 관광지도 아닌 재난피해지역에 방문한 경험은 어린 나이에 가히 충격적이었다. 태풍 때문에 보인 그곳의 단상이겠지만, 무너진 건물들과 그 잔해 속 신발 없이 뛰어다니는 아이들, UNHCR(유엔난민기구)의 지원을 받아 생활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속에서 웃음을 잃지 않고 생활을 만들어가는 현지인들. 우리와는 많이 다른 그들의 환경, 삶의 방식, 생각과 태도 모든 것이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나는 세상에 대한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다. 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와 환경은 모두 다르며, 어떻게 지금에 이르렀는지, 또 살기 좋은 세상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인지 고민하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나만의 꿈을 가지고 정치학과 경제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학부동안 해당 전공들을 공부하며 세상에 대한 많은 의문들이 풀리고, 마치 퍼즐들이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근현대사와 철학, 다양한 이론들을 배우며 각 국가들마다 어떤 사건이 있어 현재에 이르게 되었는지, 왜 이렇게 국가별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다방면으로 차이를 보이는지, 과연 어떤 시스템이 이상적 일지 등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적용될 수 있는 부분에 있어 즐겁게 공부했다.
해당 학문들을 학부 과정으로 짧게 공부한 것이지만, 그 끝에 얻은 나만의 답은 하나였다.
세상은 불공평하다.
그러나 이게 자연스러운 거다.
어릴 때부터 우리는 '노동'의 가치를 배우며 자란다. 시간과 노동을 들여 그 대가로 자본을 얻는 것이 당연한 듯 배웠다. 그러나 사실상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는 절대 그렇지 않다. 시간과 노동을 들이지 않아도 얻을 수 있는 수익이 있으며, 그렇게 누군가는 평생을 일해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누군가는 매일 놀아도 재산이 늘어나는 것이다. 분명히 불공평한 것이 맞으며, 옳다고 할 수 없다.
인간과 자연이 끊임없이 복잡하게 상호작용하는 역사 속에서 누군가는 성실히 혹은 우연히 기회를 잡았다. 그 과정에서 모든 사람들은 부를 얻거나 잃기를 무수히 반복했다. 아무리 사회 시스템 안에서 정직하게 부를 축적했다 하더라도 그 과정 속 누가 물질적, 감정적 피해를 보았는지, 어떤 파급효과가 있었는지 알지 못할 일들이다. 이런 얽히고설킨 사건들의 실타래 안에서 원인과 결과를 따져 잘못을 규정하고, 제도적으로 바로잡기엔 거의 불가능하다.
지금까지 많은 이상적인 철학가들과 정치가들이 단순 평등을 위해 사회의 다양한 시스템을 구축해 보았지만, 우리는 역사를 통해 모두 실패했던 것을 알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생물학적으로 다르게 태어나고, 태어난 환경, 성격, 가치관, 꿈 등 모든 것이 다르기에 하나의 이상적인 시스템으로 통제한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것에 가깝다. 그나마 현재의 제한적 자본주의는 신변과 재산의 안전을 보장하고, 타인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자유가 허락되기에 대다수 사람들의 사회적 합의에 다다랐고 지금처럼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제한적 자본주의도 시대적 흐름에 따라 미래에는 잘못된 시스템이 될 수 있으며, 꼭 정답은 아니다.
결론적으로 어쨌든 대다수의 사람들은 여러 이유로 인해 대체적으로 지금보다 더 소유하기를 원하기에 삶에 주어진 다양한 기회와 한정된 자원 속에서 모두가 '제로섬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런 게임 속 부작용으로 늘 누군가는 불공평을 느끼기 마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므로 세상이 불공평한 것은 인간사회의 늘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다만 이것이 자연스러운 상태라고 해서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옳다'라고 판단하는 것은 모두 개개인의 몫이다. 누군가는 자신이 받았던 피해의식 혹은 자신이 들인 노력에 대한 과한 평가로 다른 이들의 재산을 빼앗는 걸 합리화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부족함에도 나누는 덕을 알아 자발적으로 본인의 재산을 환원하기도 한다. 제도 안에서 본인의 가치관에 따라 살면 되는 것이고, 그 행실에 대한 평가는 후대가 정해줄 것이다.
한 가지 유의할 부분은 법을 만드는 것도 인간이고, 제도를 만드는 것도 인간인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법과 제도는 시대적 상황에 따라 늘 변하는 것이고, 그 당시 합법적이라 하더라도 '옳음'과는 다른 문제다. 가치관에 있어 절대적 옳음보다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생각이면 뭐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세상은 혼자 살아갈 수 없다. 혼자서 절대 할 수 없는 영역이 많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개인적으론 모두가 사회에 대해 고민해보았으면 한다. 사람들 간 신뢰를 바탕으로 최고치의 공리주의를 이룬 이상적 사회에 근접하려 노력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인생에 있어 부와 재산은 중요하다. 그러나 부와 재산에 가치관이 너무 매몰되는 것은 피하고 싶다. 인생의 성적표는 부와 재산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생에는 보다 더 중요한 가치들이 많이 존재한다. 가족이 있고, 사랑이 있으며, 다양한 경험들, 감정들, 때론 아픔과 힘듦까지 사람으로서 살아가며 느껴볼 수 있는 가치라 생각한다.
또한 이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모든 걸 포기하지 않았으면 한다. 어차피 끝이 안 보일 터널을 걷는다면, '안 될 거야'를 되새기며 부정적으로 스스로 한계를 정하기보다는, '갈 수 있는 데까지는 가겠다'는 긍정적 희망을 가지고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 부딪혀 보는 것이 성공에 대한 확률을 조금이나마 더 높이는데, 아니 살아온 인생을 덜 후회하는 것에 대한 확률이 높지 않을까.
행복노트 #36
가치를 만들고 부여하는 것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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