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여행 포토에세이 #56 _ Assisi, Italy
25 국가 107일의 여행 기록:
짧지만 길었던 4박 5일의 로마 여행을 끝마쳤다. 그리고 다음 여행 행선지로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내 마음속 목소리는 이탈리아 반도를 크게 한 바퀴 돌기 위해 남쪽 나폴리를 지나서 팔레르모, 시라큐스 등 시칠리아 섬까지 한 번 구경하고 다시 이탈리아 북부로 돌아오고 싶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시간, 자금의 한계로 인해 이탈리아 남부 순회여행은 불가능한 일정임을 깨닫게 되었다. 여행 계획을 세울 당시 무모해도 도전하는 나였지만, 이탈리아 남부를 방문한다면 유럽여행 전체 계획이 크게 틀어질 것을 염려해 과감하게 포기하기로 했다. 이에 남부 여행은 다음을 기약했고, 이탈리아를 또 방문해야 할 이유를 하나 더 남겨둔 채 다시 이탈리아 북부로 올라올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밀라노, 피렌체, 로마 등 유명 관광도시 위주로 다녔기 때문에 여행 중 걷는 것에 많이 지쳐 있었다. 앞으로 남은 두, 세어 달의 여행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휴식은 절실했다. 이에 남들이 잘 모르는 숨겨진 작은 도시를 찾아 쉼의 시간을 가지기로 마음먹었다. 이탈리아 마지막 여행 도시는 베네치아였고, 지도를 보며 로마에서 베네치아까지의 경로를 찾던 중, 작은 도시 아시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시시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이 작은 도시에 흥미가 생긴 뒤 하나하나 아시시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했다. 일단 한국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점, 언덕 위에 지어진 예쁜 마을이라는 점, 그리고 가톨릭 성인(Saint)을 배출했던 유서 깊은 도시라는 점이 나에게 매력으로 다가왔다. 이에 이 작은 도시에서 2박 3일을 머물며 조용히 휴식의 시간을 가지기로 다짐했다.
'로마 테르미니역'에서 트렌 이탈리아 기차를 타고 약 3시간을 북부로 달렸다. 이탈리아는 지중해 한가운데 위치한 나라답게 6월 여름의 날씨는 늘 화창하고 하늘은 늘 맑았다. 로마 메트로폴리탄 권역을 벗어나니 시골의 모습을 한 풍경들이 나타났고, 어느새 여행으로 지친 몸과 피로는 벌써부터 회복되고 있는 것 같았다. 아시시의 기차역은 실제 아시시 마을로부터 자동차로 약 20분 떨어져 있다. 언덕 위에 지어진 마을이기에 마을 중심으로 기찻길을 내는 것이 어려웠을 것이다. 숙소는 아시시 마을이 아닌 기차역 근처로 잡았기에 아시시 마을보다는 훨씬 더 현대적인 주택단지 사이로 발걸음을 옮겼다.
기차역 근처의 동네는 정말 평화로움과 여유 그 자체였다. 로마에서 먹었던 마르게리타 피자가 너무 맛있어 아시시에서도 피자를 먹기 위해 피제리아를 찾아 나섰다. 시내를 돌아다니며 근처를 구경하고, 가까운 마트에 가서 장도 보고, 마치 이곳의 동네 주민이 된 것처럼 거리를 노닐었다. 시골 작은 마을임에 치안에 대한 걱정도 없었다. 아시시에 도착한 첫날은 그렇게 아무런 관광 일정 없이 그저 푹 쉬는 휴식의 하루를 보냈다.
아시시에서 둘째 날 아침이 밝았다. 여행 중 늘 새벽 일찍 일어나 움직이는 것을 좋아했던 나였기에 오늘도 얼른 씻고 나와 새벽 5시부터 자동차도 아닌 발걸음으로 아시시 언덕 위의 마을까지 걸어갔다. 음악을 들으며 풍경사진을 담고, 하루를 일찍 시작하는 현지 분들과 인사도 나누며, 해바라기 밭을 가로질러 여유롭게 4-50분 걸어가니 금세 어느덧 마을 입구에 도착해 있었다. 이렇게 이탈리아 아시시, 내가 이탈리아에서 가장 만족하고 애정했던 소도시, 아시시에서의 여행은 시작되었다.
3개월이 넘는 유럽여행에서 이탈리아에만 3주가 넘는 일정을 보냈다. 여행 중 가장 오랜 기간 머문 나라이며, 방문한 도시가 10군데나 된다. 이렇게 긴 시간 이탈리아만 여행하는 걸 의도하지는 않았다. 그저 계획을 세우는 과정 중 이탈리아에 유독 볼거리가 많아 도시를 일정에 하나씩 추가하다 보니 이런 긴 여행을 하게 되었다.
사실 방문했던 이탈리아의 10개의 도시 모두 좋았던 건 아니다. 어떤 도시들은 수많은 관광객과 더위로 지쳐 하루 일정이 빨리 끝나기만을 원했던 곳도 있고, 다른 어떤 곳들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너무 아름다운 풍경에 감동을 받아 행복에 겨웠던 곳도 있었다. 사람들마다 여행 스타일이 다르고, 취향과 관심사가 다르기에 함부로 특정 도시를 비판할 수 없지만, 이탈리아 유명 관광 도시라고 해서 늘 좋았던 건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방문했던 10개의 도시들 중 가장 좋았던 곳이 어디냐'고 나에게 물어본다면, 나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바로 아시시라고 대답할 것이다. 아시시는 그저 휴식을 위해, 빽빽하게 채워진 여행 일정 중 잠시 몸을 쉬게 하기 위해 우연히 발견한 그리고 큰 기대 없이 일정에 추가했던 도시지만, 이탈리아 여행 중 가장 많은 행복을 느꼈던 도시다.
이탈리아는 소도시가 매우 매력적이다. 큰 관광 도시들보다 아시시, 스펠로, 시에나와 같은 소도시들이 가장 지금까지도 기억에 가장 많이 남아있다. 유명한 볼거리들은 우리가 사진이나 매체를 통해 자주 봤고 쉽게 접할 수 있지만, 소도시들의 경우 관심을 가지고 직접 찾아보지 않으면 그곳에 대해 잘 모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한 번 방문하기로 결심하고 실제로 그 낯선 도시에 떨어진다면, 그때부터 여행은 하나하나 탐험과 발견의 영역이 되어 내가 이전에 알지 못했던 세상에 대한 새로운 부분이 채워지기 시작한다.
이탈리아 소도시의 가장 큰 매력은 바로 아름다운 자연경관, 역사의 흔적이 그대로 녹아있는 건물들, 한적한 거리와 여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아직까지 관광업에 때 묻지 않은 정 많은 현지인들이다. 특히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들은 중세시대 혹은 그 이전에 형성돼 옛날의 그 터를 그대로 간직한 채 도시를 확장해 나간 경우가 많다. 이에 사람 한 두 명이 겨우 지나갈법한 좁고 미로 같은 복잡한 거리들이 많으며, 언덕 위에 지어진 성터와 많은 계단들이 특징이다. 이탈리아 소도시를 방문하게 된다면 가장 먼저 언덕 제일 꼭대기 전망대를 방문하는 것을 추천한다. 높은 곳에서 전체를 둘러보는 경관은 마치 내 시선이 닿는 모든 곳이 하나의 거대한 풍경화로 느껴질 정도다.
보통 관광객들은 여행지를 고를 때 사람들이 많이 가는 곳, 정보가 많은 곳, 그리고 편하게 여행할 수 있는 곳들을 선호한다. 하지만 진정한 여행이 무엇인가를 고민해 볼 때, 쇼핑이나 휴양, 액티비티 체험, 맛있는 음식 등 다양한 대답들이 존재하겠지만, 나에게 진정한 여행이란 낯선 곳의 이방인이 되어 새로운 사람들을 마주하고, 그들만의 삶의 양식이나 문화를 새롭게 경험하며, 내가 잘 알지 못하는 배경에서 자라온 사람들과 대화를 통해 생각의 영역을 넓혀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아시시에서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여행의 모든 요소를 충족할 수 있었다.
아시시의 좁고 복잡한 골목길에서 배회할 때 우연히 만난 현지인들은 나에게 미소로 눈인사를 건네주었으며, 좁은 골목길로 인해 매우 가까이에서 그들의 삶을 지켜볼 수 있었다. 작은 잡화점에서 장을 보는 할머니, 화분에 담긴 푸릇한 식물에 꽃을 주는 아저씨, 실내가 훤히 보이는 식당에서 날파리를 쫓아내며 점심 지나 다음 장사를 준비하는 젊은 직원들, 그리고 벤치에 앉아 수다 떠는 할아버지와 그 옆 그늘에서 졸고 있는 할아버지까지 현지 분위기를 그대로 느끼며, 이 여행이 단순히 스쳐 지나갈 장면이 아닌 마음속 아름다운 사진으로 오래 남아있길 바라게 되었다.
이탈리아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도시를 많이 보유하고 있지만, 내 마음속 절대 변하지 않을 이탈리아 도시 일 순위는 아시시다. 규모가 작은 한적한 도시, 아름다운 풍경 안에서 여유를 느낄 수 있는 곳, 이탈리아의 진정한 매력은 그들이 보유한 작은 소도시들임을 깨닫게 되었다.
아시시에서 제일 유명한 랜드마크가 한 곳 있다. 그곳은 바로 '성 프란치스코 성당'이다. 이곳이 가장 유명한 이유는 가톨릭에서 가장 존경받는 성인들 중 한 명인 '성 프란치스코'가 이곳에서 태어나 활동했기 때문이다.
아시시에 대해 처음 접했을 때, 먼저 인터넷 검색을 하며 도시의 풍경, 골목의 모습을 보고 그곳의 분위기가 어떤지 파악하고 있었다. 그중 아시시를 대표하며 인터넷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사진이 이 성 프란치스코 성당을 중심으로 찍은 사진들이었다. 특히 성당 입구에서 성당까지 이어주는 약 50미터 정도 길게 이어진 회랑 사진이 있었다. 회랑과 성 프란치스코 성당을 함께 담은 이 풍경사진에 나는 매료되었고, 이곳을 방문해 나만의 사진을 꼭 남기겠다는 목표가 생겼다. 이렇게 성 프란치스코 성당은 나를 아시시로 이끌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가톨릭 종교인이 아닌 이상 우리에게 그리 잘 알려진 인물은 아니다. 아시시를 방문하기 위해 조사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평생 모르고 살았을 인물이다. 그는 부유한 상인 집안에서 자라 가문의 명예를 위해 그리고 그의 야망을 위해 전쟁에 참가하고 군인이 되려 하였지만, 우연히 하늘의 음성을 듣고 자신의 길은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성직자의 길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그의 모든 재산과 상속을 포기한 채 수도승이 되어 죽을 때까지 이탈리아의 많은 지역을 누비며 포교 활동과 각 지역 교회를 세우는데 헌신한 인물이다.
그의 영적인 믿음과 각종 선행 그리고 교회를 세우는 행동은 가톨릭교 관점에서 충분히 존경받을 인물이다. 다만 세상의 관점에서 바라보았을 때 그는 편하게 아버지의 많은 재산을 상속받고 상인으로써 부유하게 살아갈 수 있었지만, 그런 세속적 욕심과 야망을 버리고 자신의 신념과 가치관을 따라 살았다는 사실이 새삼 대단하게 다가왔다. 실제로 그는 수도승의 길을 걸으며 무소유 철학을 따랐고, 음식을 동냥했으며, 교회를 보수하고 짓기 위한 돌들도 구걸하는 등 사회의 상류층에서 가장 낮은 계급으로 스스로 돌아간 것이다.
분명 물질적 부족함은 많은 불편함을 야기하고, 어떤 모욕이나 자존심에 큰 상처를 남기는 사건들도 겪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절대 후회하거나 방황하지 않았다. 그는 꿋꿋이 그만의 신념을 따랐고 오히려 더 완벽한 종교인의 삶을 살아 모범을 보였으며 이에 그는 일반 시민들뿐만 아니라 가톨릭의 높은 주교들까지 그를 존경하고 인정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성 프란치스코가 세상을 떠난 뒤 가톨릭에서는 그의 많은 업적을 인정해 성 프란치스코를 가톨릭에서 가장 위대한 성인들 중 한 명으로 추대했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존재는 아시시를 여행하는 내내 많은 영감을 주었다. 무엇보다 그가 세상의 부귀영화를 안정적으로 누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의 신념을 따라 평생을 수행과 베풂으로 삶을 살았다. 이상적 성향이 강한 나도 물질이 아닌 나만의 이상향과 가치를 쫓아 살려 노력하지만, 세상의 시련은 숱하게 찾아오기 마련이고 그럴 때마다 무너지는 순간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런 힘듦을 겪고 고뇌하였기에 성 프란치스코의 삶은 나에게 더욱 훌륭한 삶의 표본으로 다가왔다. 특히 그의 신념의 삶이 나에게 제일 큰 영감으로 다가왔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많은 것을 소유하는 삶이 행복한 삶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경제적인 안정을 이루고 많은 재산이 있어야 성공한 인생으로 여긴다. 그리고 그렇지 못할 경우, 타인을 연민의 대상 혹은 멸시와 조롱거리로 치부하는 극단적 사례들도 있다. 이처럼 현세대의 사람들은 물질적인 것을 추구하지 않았을 경우 마주할 수 있는 여러 안 좋은 상황들과 타인의 평가에 불안을 느끼며, 세속적 성공에 집중한 삶을 살아간다.
비교와 경쟁의 본능을 가진 인간으로 삶을 살다 보면 누구나 사회적 구성원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다. 하지만 암울한 것은 단순 인정에 대한 욕구로 그치는 것이 아닌 그것을 한참 더 넘어 어떤 사회 속 우월한 존재, 높은 사회적 지위를 추구하는 게 인간 본성이다. 단순 인정만을 바랬다면 적당한 생활수준을 유지하기만 해도 만족감과 행복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시시각각 변하는 환경과 상황들 속 우연히 일어나는 상대적 열등감을 견디지 못하고, 우리 지위를 안정적으로 지키고 싶어 하며, 더욱 높은 지위를 확보함으로 예상치 못한 환경으로부터 자유로움 그리고 우월감 등 더욱 많은 것들을 바라게 된다. 만에 하나 바라는 것을 취하지 못했을 경우, 우리는 수치심 혹은 불안을 느끼게 된다.
나는 불안을 많이 느끼는 사람이다. 가능한 벌어질 수 있는 경우의 수를 생각하고, 각각의 경우마다 대비책을 세우는 등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싶어 한다. 혹여나 상황이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을 경우, 스트레스를 동반하며 여기에 매몰되는 경우도 많다. 이에 당연한 것일까 항상 미래에 대한 걱정과 불안을 늘 품은 채 살아간다. 작년 개봉했던 영화 '인사이드 아웃 2'에는 '불안이'라는 캐릭터가 등장한다. 이 캐릭터를 단편적인 시선으로 봤을 때 답답하거나 악역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오히려 나는 이상하게 영화를 보는 내내 불안이의 심리에 공감하며 영화를 시청했던 기억이 있다. 영화에서 '불안이'로 인해 주인공인 '라일리'는 많은 시련에 빠지지만, '불안이'의 행동 원인 깊은 내면에는 상황을 더 잘 헤쳐나가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불안을 느끼는 사람이다. 평소 타인의 시선과 판단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 길을 걸을 때도, 직장에서도, 지인들과의 모임 속에서도 '눈치'를 많이 보며, 그들 대부분은 아무 생각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괜히 그들의 시선과 판단을 늘 신경 쓰게 된다. 이는 어쩌면 타인의 인정에 대한 욕구, 사회적 지위와 명예에 대한 갈망, 그리고 내 존재가치를 타인을 통해 느끼는 마음에서 비롯된 불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범한 삶이 모욕적이고, 천박하고, 초라하고, 추하다고 생각할수록,
그 삶으로부터 멀어지고자 하는 욕망도 강해진다.
알랭 드 보통 '불안', p. 306
물질적인 것과 사람관계 그리고 일상적인 상황 속 나는 왜 불안을 달고 살아가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어쩌면 내가 너무 높은 이상향을 꿈꾸고 그 사이 현실과의 간극을 견디지 못하는 건 아닐까, 명예와 인정에 대한 욕구가 너무 높은 것은 아닐까, 많은 돈을 벌지 못하면 실패한다는 인식을 가진 것은 아닐까. 행복한 삶을 추구할 때에 이런 불안 심리는 마치 짙은 안개처럼 인생의 앞길을 한 치 앞도 볼 수 없게끔 만드는 느낌이었다. 이런 불안에 대한 고뇌의 연결고리 속 나만의 해답을 찾기 위한 긴 생각의 여정을 떠났고, 알랭 드 보통 작가의 '불안'이라는 책이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지위가 낮은 사람은 눈에 띄지도 않고, 퉁명스러운 대꾸를 듣고, 미묘한 개성은 짓밟히고, 정체성은 무시당한다" p. 16
"속물의 독특한 특징은 단순히 차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와 인간의 가치를 똑같이 본다는 것이다." p. 29
" 무시와 외면은 속물적인 세상이 중요한 상징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에게 내리는 감정적 형벌이다." p. 38
"박탈감 ... 우리와 같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조건과 우리의 조건을 비교하여 결정된다." p. 56
"능력주의 체제에서는 가난이라는 고통에 수치라는 모욕까지 더해지게 된다." p. 114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물질을 쫓아 살 수밖에 없다. 부와 자본을 추구해야 남과 비슷한 삶을 영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알랭 드 보통에 따르면, 과거에는 사회적 계층이 뚜렷이 분리되어 있고, 그 안에서의 이동이 쉽지 않았기에 가난과 낮은 사회적 지위에 대한 불안 혹은 불만이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회적 계급 체계는 무너지고, 모두가 평등한 세상이 도래함에 따라 개인의 능력으로 가난을 극복하거나 사회의 높은 지위로 올라갈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다. 이에 현대에서 가난과 낮은 지위는 개인의 능력부족, 개인의 탓으로 돌려 가난하다는 이유로 불명예를 얻고 지위가 낮다는 이유로 무시받는 사회가 온 것이다.
'유한 계급론'을 서술한 미국 경제학자 소스타인 베블런에 따르면 '상업사회에서 능력주의가 적용됨에 따라 "돈"이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 척도가 되었다'고 서술했다. 이런 인식의 부작용으로 덕과 능력이 있는 사람은 절대 가난할 수 없으며, 반대로 가난한 사람들은 덕과 능력이 없는 사람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재밌는 현상으로 과거 경제학의 아버지 아담 스미스가 시장의 완벽성, 인간의 합리적 소비를 주장한 것과 달리, 사람들은 자신의 지위를 표현하고 나타내고자 과시적 소비를 하는 경향이 있음을 발견했다. 이는 인간이 합리적 소비를 한다는 경제학의 대전제에서 벗어난 현상이고, 베블런이 사회를 조금 더 냉철하고 면밀하게 들여다본 결과였다.
"아무리 물질주의적인 태도와 거리가 먼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도 부를 축적하여 그것을 보여줌으로써 불명예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요구를 느낄 것이며, 그렇게 하지 못하면 불안한 마음과 책임감에 시달릴 것이다." p. 231
이처럼 세속적인 속물근성에서 아무리 멀리 떨어진 이상향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도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와 높은 사회적 지위에 대한 열망을 완전히 무시하기란 쉽지 않다. 이에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었는지 다시 한번 새삼 깨닫게 되었다. 아무리 1,000년 전 중세시대 계층, 계급이 확실히 구분된 사회였어도 사람의 상승적 욕망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속물적인 것보다 더욱 높은 가치를 지닌 자신만의 무언가를 인식하고 그 삶을 살았다. 이는 확고한 신념이 있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
윌리엄 제임스의 자존심 방정식이 있다.
자존심 = 이룬 것 / 내세운 것
방정식에 따르면, 인생에서 이룬 것이 많을수록 자존심 혹은 자존감이 올라가고, 반대로 인생에서 내세운 것 혹은 바라는 게 많을수록 자존심은 당연히 낮아질 수밖에 없다. 높은 자존심을 위해서는 바라는 것을 줄이거나 많은 것을 이루어야 하는데 둘 다 쉬워 보이지는 않는다.
"우리는 적은 것을 기대하면 적은 것으로 행복할 수도 있다. 반면 모든 것을 기대하도록 학습을 받으면 많은 것을 가지고도 비참할 수 있다." 윌리엄 제임스, p. 79
윌리엄 제임스가 이렇게 방정식을 통해 설명한 것처럼 다른 많은 철학자, 위인들도 입을 모아 같은 이야기를 했다. 책 '불안'에서는 대표적으로 '인간 불평등 기원론'과 '사회계약론'을 집필한 장자크 루소, 미국의 유명 철학자이자 시인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주장을 근거로 위 자존심 방정식의 예시를 들었다.
장-자크 루소
"부란 우리가 갈망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이다. 부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부는 욕망에 따라 달라지는 상대적인 것이다. 우리가 얻을 수 없는 뭔가를 가지려 할 때마다 우리는 가진 재산에 관계없이 가난해진다. 우리가 가진 것에 만족할 때마다 우리는 실제로 소유한 것이 아무리 적더라도 부자가 될 수 있다." p. 78
"사람을 부자로 만드는 방법은 두 가지라고 생각했다. 더 많은 돈을 주거나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다." p. 78
존 러스킨
"자신의 삶의 기능들을 최대한 완벽하게 다듬어 자신의 삶에, 나아가 자신의 소유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의 삶에도 도움이 되는 영향력을 가장 광범위하게 발휘하는 그런 사람이 가장 부유하다." p. 251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사람은 없이 살 수 있는 것이 많아질수록 행복해진다." p. 337
"돈이 없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 자신의 에너지를 사업 말고 다른 활동에 쏟는 쪽을 택했고, 그 과정에서 현금이 아닌 다른 것에서 부유해졌다는 뜻일 수도 있다." p. 337
"영혼에 필요한 것을 사는 데 돈은 필요하지 않다." p. 337
나는 특히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언행들이 인상 깊었다.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과 척도로 속물적 시선에서 벗어나 다른 평가 기준들도 제시하며, 가난과 사회적 낮은 지위를 향한 부정적인 선입견을 개선하기 위한 작은 노력들을 실천했기 때문이다. 그의 말처럼 사람의 영혼에 필요한 것을 얻는 데는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 같다. 나의 짧은 인생 경험을 되돌아봤을 때, 내 깊은 내면의 행복과 만족감을 채워주는 것은 자연과 교감하며 느꼈던 평온함, 타인을 도와줄 때 느꼈던 뿌듯함, 그리고 조건 없이 타인을 사랑함에 내 마음이 풍족해지는 걸 느꼈다.
한편으로 나는 육체의 풍요로움을 위해 물질이 필요하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적당한 삶의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물질은 필수불가결한 존재다. 우리는 차가운 비를 피하기 위해 지붕이 있어야 하고, 매서운 바람과 추위로부터 우리를 지킬 옷이 필요하며, 낯선 이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벽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수확하기 위해 땅이 있어야 하고, 이동하기 위해 신발이 필요하다. 이처럼 물질적인 부분을 간과할 수 없다. 다만, 속물적 관점에서 한 발자국 벗어나 조금 더 깊은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성숙한 시선은 보다 더욱 필요하다.
높은 사회적 지위에 대한 열망과 속물근성은 내면 깊은 불안감을 지속해서 형성한다. 목표에 도달하지 못할 경우 심한 박탈감을 느낄 수 있으며, 목표에 도달했을 경우 과시와 사치로 이어질 수 있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고, 채워지지 않는 항아리에 계속해서 물을 들이붓는 것과 마찬가지다. 잠깐의 만족감은 있을 수 있지만, 결국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 속에서 방황하며 남들의 인정과 새로운 물질에 대한 욕망을 계속 느낄 수밖에 없다.
"우리는 어떤 것을 이루고 소유하면 지속적인 만족이 보장될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행복의 가파른 절벽을 다 기어 올라가면 넓고 높은 고원에서 계속 살게 될 것이라고 상상하고 싶어 한다. 정상에 오르면 곧 불안과 욕망이 뒤엉키는 새로운 저지대로 다시 내려가야 한다고 말해주는 사람은 드물다." p. 247
"인생은 하나의 불안을 다른 불안으로 대체하고, 하나의 욕망을 다른 욕망으로 대체하는 과정으로 보인다." p. 247
그럼 여기서 우리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나만의 기준과 나만의 가치관을 확립할 필요가 있다. 나를 평가하는 기준이 속물적 가치관, 타인이 되어버리면 우리의 가치관은 외부적인 것에 지속 흔들리게 되고, 절대 인생을 내 주도하에 살 수 없다. 내가 늘 불안을 느꼈던 것처럼 계속해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높은 지위를 갈망하며, 가난을 통해 사회적 박탈감을 느끼는 삶의 반복이다.
이런 불안, 불행을 느끼며 살기에 우리 인생은 너무나도 짧다. 행복만 느끼기에도 부족한 소중한 우리 인생에 불행이 끼어들 틈을 내어주는 것이다. 그렇게 인생의 주권 없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살다가는 시간이 훌쩍 흘러 뒤돌아봤을 때, 내 인생을 보다 더 진실되고 다채롭게 살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가 많이 남을 것 같다. 우리가 왜 이 세상에 태어났을지, 존재하는지에 대한 정답은 없겠지만 오답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인생을 남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혹은 돈을 조금 더 벌기 위해, 사회적으로 으스대며 높아 보이기 위해 사는 것은 절대 아닌 것이 분명하다.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많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그들을 필요 이상으로 존중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p. 155
"우리 자신의 소멸을 생각하다 보면 우리가 마음속으로 귀중하게 여기는 생활방식을 향해 눈길을 돌리게 된다." p. 276
그래서 우리는 세상의 다른 것들이 아닌 우리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내면의 목소리를 집중해 듣기 위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어떤 것에 행복을 느끼는지, 꼭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누구와 함께 있고 싶은지,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지 등 자신 스스로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하고 알아가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자기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우리는 뭘 하며 인생의 시간을 보낼지, 누구와 시간을 보낼지 신중하게 선택하며, 인생의 소중한 순간순간을 심도 있게 보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무작위 집단에게 어떻게 보이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p. 157
결론적으로 나도 과거 프란치스코 성인이 그의 신념을 따라 살았던 것처럼 나만의 신념과 가치관으로 세상을 살아가겠다고 다짐했다. 물질적 부귀영화도 좋지만 그것의 목적은 사회적 인정이나 우월감 따위가 아닌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제약 없이 다채롭게 살아가기 위한 물질적 자유를 위해 살아가기로 했다. 그리고 내면의 행복을 위해 내가 사랑하는 소소한 것들에 충분히 만족하고 기뻐하며 감사하는 삶을 살기로 했다. 내 존재의 가치는 내가 가진 명예와 재산이 아닌, 내가 나 스스로를 인정하고 사랑하는 마음이다.
"삶에서 성공을 거두는 데는 하나 이상의 길, 판사나 약사의 길과는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위로와 확신을 얻을 수 있다." 알랭 드 보통 '불안', p. 357
행복노트 #53
성공한 삶이란 나 자신이 스스로를 인정하고 사랑하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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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인스타그램: @domkim.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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