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여행 포토에세이 #57 _ Spello, Italy
25 국가 107일의 여행 기록:
스펠로는 아시시 옆의 작은 마을이다. 아시시에서 기차를 타고 10분 정도 한 정거장 지나면 스펠로에 다다를 만큼 이 둘은 가깝게 붙어있다. '스펠로'라는 도시 또한 한국사람들에게는 낯선 이름이다. 유럽을 여행하며 이렇게 작고 숨겨진 소도시를 찾아 시간을 내어 방문하기란 쉽지 않다. 유럽 내에는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아름답고 아기자기한 작은 마을이 많이 있는데, 유럽에 거주하지 않는 한 방문하기 어렵고, 그저 도시와 도시 사이 이동하며 잠깐 스쳐 지나가는 정차역일 뿐이다.
아시시 여행 중 우연히 주변에 꽃과 관련된 작고 사랑스러운 마을이 있다는 얘기를 접했다. 매년 6월 가톨릭과 관련된 축제가 열리고, 그 축제일을 위해 온 마을은 집과 거리를 꽃으로 장식한다는 것이었다. 마침 내가 스펠로를 방문할 때 6월 중순이었고, 나는 얼른 카메라를 챙겨 스펠로로 향했다.
늘 그렇듯 6월 이탈리아의 날씨는 맑았다. 스펠로역에서 내리자마자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이 나를 반겨주었다. 따뜻한 햇빛을 맞으며 마을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평일 대낮이었지만, 전체적으로 마을은 조용했으며, 꽃으로 장식된 한적한 거리를 천천히 걸으며 여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관광객들은 물론 현지인들조차 보이지 않았으며, 마치 시간이 멈춘 동화 속 마을을 걸어 다니는 느낌이었다. 반나절의 짧은 시간 동안 스스로 스펠로의 이방인이 되어 마을 속 소외받은 모든 것들에 관심을 가지며 스펠로를 알아갔다.
스펠로의 마을 입구부터 언덕 꼭대기 위 '성 세베리누스 교회'까지 거리 곳곳엔 푸릇푸릇한 화분들과 화려한 꽃들로 수놓아져 있었다. 아무도 가지 않을 것 같은 후미진 외진 곳일지라도 모퉁이까지도 꽃들이 피어 있었고 모든 꽃들로부터 환영받는 느낌이었다. 많은 꽃들이 온 마을을 채우고 있었던 덕분일까 마을에 사람들이 많이 없었음에도 싱그러운 향과 함께 마을 전체가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해가 긴 여름 오후 한 시에 스펠로에 도착해 두 시간 정도 걸어 다니니 마을 전체를 벌써 다 둘러본 것 같았다. 작은 마을이기에 큰 골목을 따라 언덕 꼭대기까지 한 시간이면 도착하지만, 골목 곳곳에는 내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아름다운 소소한 풍경들이 많았다. 아무렇지 않게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것에 관심을 가지며 이 작은 벽돌, 나무, 동상과 골목길 등 어떤 이야기들을 품고 있을지 궁금해했다. 아무도 듣지 않는 시시한 이야기라 할지라도, 혹은 비밀을 간직한 숨겨진 이야기일지라도 이들이 들려줄 이야기에 호기심을 가지고 천천히 다가갔다.
그렇게 스펠로는 좋았다. 스펠로에서 산책과 상상으로 여행을 채워나갔으며, 마을이 지닌 작은 이야기들을 찾는 재미가 있었다. 현실과 꿈속을 넘나드는 백일몽을 꾸듯 거리에서 들리는 이탈리아어와 이국적인 풍경은 계속해서 시간이 멈춘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고, 나는 이런 느낌이 좋았다. 영원히 이 풍경 속에 갇힌다 해도 행복할 것 같았으며, 오히려 현실로 돌아가기 싫을 만큼 이곳이 좋았다.
우스운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살면서 초능력 단 한 가지를 얻을 수 있다면 어떤 능력을 얻고 싶을까.' 어릴 적 상상이 풍부했던 나에게는 꽤나 진지한 고민이었다. 슈퍼맨처럼 힘이 세고 하늘을 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 어떨지, 혹은 IQ 500이 넘는 두뇌를 가져 세상의 모든 지식을 얻고 수능에서 만점 받는 상상을 했었다. 어른이 된 지금은 세계제일 기업을 소유한 베트맨과 아이언맨이 가장 매력적(?)으로 다가오지만, 어쨌든 남들과 다른 어떤 이상적인 능력을 얻어 세상을 보다 자유롭게 즐기며 살아가고 싶었던 것 같다.
어릴 때의 진지한 고민을 거듭 거친 끝에 제일 갖고 싶은 초능력은 '시간을 멈추는 능력'이었다. 내가 사랑한 모든 순간들에 더욱 머물고 싶었고, 그리운 모든 사람들이 떠나가지 못하도록 붙잡고 싶었다. 시간이 흘러 내가 아는 익숙한 것들이 조금씩 변하는 게 싫었다. 현실은 앞으로 계속 나아가지만 나는 순간 속 그대로 머물러 있고 싶었다. 나는 아직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못 즐긴 것 같은데, 이 순간이 지나는 게 아쉬움만 계속 남는데, 나를 제외한 다른 모든 것들은 흐릿한 잔상만 남긴 채 기억 속으로 서서히 사라지는 게 싫었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모두가 교육과정 중 한 번쯤 배웠던 시, 그리고 내가 너무 사랑하는 시, 윤동주 시인의 '서시'가 있다. 그리고 이 '서시'에서 내가 좋아하는 구절이 있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윤동주, '서시' 中
서시에 대한 해석은 사람마다 각각 다르겠지만, 나에게 이 구절은 잊혀가는 모든 것들에 작은 관심을 가지고 사랑하겠다는 말로 들렸다. 별로 중요하지 않아 평범한 것들, 자세히 보지 않으면 깨닫지 못하는 것들, 존재를 숨긴 채 살아가는 잊힌 것들에 작은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또한 이 부분은 포토그래퍼로써 나의 사명감이기도 하다. 미처 놓치고 지나간, 무심코 스쳐 지나간 것들을 담아 또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끔, 마냥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아무것이 될 수 있게끔 작고 소중한 아름다움을 다시 한번 더 붙잡는 것이다.
'관심을 가진다는 것'을 자칫 잘못 이해할 경우, 넓은 오지랖 성격 혹은 주변 일과 다른 사람들에게 간섭하는 것을 합리화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진정한 관심은 자신을 위한 관심이 아니라 정말 상대방을 위한 관심임을 명심해야 한다. 주변에 일어나는 이야기들을 한낱 오락거리로 치부하고, 자신의 잣대로 다른 이들을 판단하며 참견하는 것은 관심이 아닌 관심을 가장한 폭력이다. 진실된 관심은 혹여나 이런 위선적인 관심과 간섭, 폭력이 되지 않도록 본인의 행동을 조심한다.
진정한 관심은 주객이 바뀌어 관심이 꼭 필요한 곳에 진실된 관심을 주는 것이다. 사회에서 소외된 이웃들을 챙기는 것, 무리에 어울리지 못하는 친구와 대화하는 것, 도움이 필요한 이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미는 것, 상처받은 사람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것들을 다시 한번 더 돌아보는 것, 그리고 이러한 행동들이 상대방에게 부담되지 않도록 선을 잘 지키는 것이다.
올바른 관심은 따뜻함을 주어 무심코 스쳐 지나갈 수 있는 세상의 많은 것들에 또 다른 관심을 받을 수 있게끔 온기의 흔적을 남긴다. 그렇게 세상을 꾸리고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스스로 중요함을 느낄 때 나는 그 세상을 '살아있는 세상'이라 명명하고 싶다.
세상에는 우리의 시선을 앗아가는 아름다운 것들이 많이 있다. 엄청난 아름다움은 남다른 존재감으로 다가와 깊은 인상을 남기게 된다. 또한 예쁜 것들 혹은 귀여운 것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뇌에서는 도파민이 분비돼 큰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그렇기에 아름다운 것에 더욱 눈길을 주고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평범하고 별로 특별하지 않다는 이유로 존재조차 인식 못하는 것들도 있다. 다만 이런 평범해 보이는 것들에는 숨겨진 아름다움이 깃들어있다. 자연스럽게 눈길이 가지 않지만, 스스로 의식하여 수동적인 집중력을 발휘해 바라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것은 집중해서 자세히 잘 들여다보지 않으면 쉽게 찾을 수 없다. 그래서 이런 숨겨진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사람과 볼 수 없는 사람 사이의 어떤 경계선이 존재하는 것 같다. 쉽게 볼 수 없는 것들을 보는 능력, 관찰하고 고유한 매력을 찾아내는 능력은 매우 귀하고 값진 것이다. 이유인즉슨, 보잘것없고 하찮아 보이는 것들도 다시 돌아보고 충분히 사랑할 수 있을 마음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나태주, '풀꽃'
누구나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 보여주고 좋은 관심을 받으며 살아가고 싶어 한다. 보여주기 싫은 모습은 애써 가리고 부정하며 하나의 콤플렉스로 자리 잡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으려 꽁꽁 숨기려 한다. 하지만 스스로 볼 때 단점 같아 보여도 결국 자신을 이루고 있는 중요한 부분이며 오히려 나에게 꼭 필요한 부분일 수도 있다.
아름다운 꽃에는 늘 우리의 시선을 이끄는 꽃망울만 있는 것은 아니다. 꽃을 튼튼하게 지지하기 위한 줄기가 있으며, 꽃 주변으로 초록색의 아름다운 잎들이 존재한다. 또한 지면 속에는 어떻게 보면 예쁘지 않고 지저분해 보이는 뿌리가 있다. 꽃에 붙어있고 존재하는 모든 부분이 꽃에게는 꼭 필요하다. 아니 그런 부분들 덕분에 예쁜 꽃망울을 피울 수 있었다. 초록색 잎사귀는 햇빛을 받아들이고, 뿌리는 양분을 흡수한다. 그리고 줄기를 통해서 꽃망울은 계속 예쁘게 유지될 수 있다.
꽃은 시기가 되면 잠깐 피었다 다시 시들기를 반복한다. 꽃처럼 자신이 스스로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것들도 잠깐 피었다 사라져 영원하지 않을 수 있다. 다만 자신 스스로 콤플렉스라고 느껴 땅 속 깊이 묻어뒀던 뿌리가 단단히 자리 잡고 있으면, 그 아름다움은 언제고 다시 피어날 수 있다. 단점이라 생각해 땅 속 깊이 안 보이게끔 숨겨뒀지만, 단점의 존재를 겸허히 인정하고 오히려 성장의 동력으로 삼아 양분을 계속 빨아들이려 노력한다면 더욱 큰 꽃이 되어 관심받고 사랑받는 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진실된 관심과 사랑을 주는 사람들을 만나자. 나의 모든 단점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고 크게 개의치 않아 하며 그 단점까지 사랑해 줄 수 있는, 깊은 땅 속 뿌리까지 스며들어 따뜻한 양분을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을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들도 모두 사랑해 줄 수 있는 그런 사람 말이다.
행복노트 #54
진실된 관심과 사랑은 쉽게 드러나지도 쉽게 사라지지도 않는다.
아름다운 것들은 관심을 바라지 않지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中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에서 이 같은 대사가 나온다. 이 대사는 말 그대로 아름다운 것들이 관심을 전혀 바라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가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들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있음을 꼬집은 대사 같다. 평소 우리가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순간들, 별로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들, 부끄러워 숨기고 싶은 부분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를 구성하고 우리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만드는 삶의 아름다운 일부분이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것들은 우리의 관심을 바라지 않고 묵묵히 우리 삶을 계속해서 지탱하고 있었다.
평범한 척 아름답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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