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여행 포토에세이 #86 _ Vilnius, Lithuania
25 국가 107일의 여행 기록:
어둠이 짙은 밤, 작은 진동이 나의 몸을 흔들며 얕은 잠마저 앗아가고 있었다. 오랜만에 탑승한 야간버스 안 사소한 자극에 의해 정신이 번쩍 들어 시계를 쳐다볼 때면 이상하리만큼 정확하게 한 시간씩 지나있었다. 1시 35분, 2시 35분, 3시 35분. 빛 한 줌 안 보이는 창밖의 깊은 암흑 속, 낯선 타지에서 길을 잃지는 않을까 불안한 마음으로 가득한 새벽이었다.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출발한 야간버스는 금세 어딘지 모를 외곽으로 벗어나 북쪽, 더욱 외진 곳으로 향했다. 혹여나 중간에 이상한 곳으로 빠지거나 잘못된 길로 가지 않을까 싶어 늘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미지에서 오는 두려움이었다. 얕은 잠에서 깰 때마다 휴대폰 지도앱을 수시로 펼쳐보며 나의 위치를 계속 파악했고, 목적지를 향해 잘 가고 있음을 확인 후에야 안심하고 다시 눈을 붙일 수 있었다.
리투아니아 빌뉴스로 가는 길, 잠을 설쳐도 즐거웠다. 두려우면서도 행복했다. 탐험과 모험이었다. 살면서 절대 가보지 않을 것 같은 장소에 발자국을 남기는 것. 참으로 설레는 일이다.
이른 새벽, 저 멀리 조금씩 빛이 보이며 동이틀 때가 되어서야 버스는 빌뉴스에 도착했다. 피로 가득한 몸을 이끌고 숙소를 향해 터벅터벅 걸었다. 새벽 일찍 도착하기에 전날 게스트하우스에 미리 연락해 얼리 체크인을 허락받은 상황이었다. 시원한 아침 공기를 한숨 들이마시자 혼미한 정신이 다시 또렷해지는 것 같았다. 30분을 걸어 숙소에 도착했을 때 이미 쉬어야겠다는 생각은 사라져 있었다. 한 시라도 빨리 빌뉴스를 마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짐만 던져두고 카메라를 챙긴 뒤 곧바로 탐험길에 올랐다.
이른 아침 아무도 없는 빌뉴스의 조용한 거리, 홀로 이 낯선 도시를 거니는 것에 어느 순간 몰입하고 있었다. 아직 잠들어 있는 도시는 여행자의 시선에서 묘한 이질감을 불러일으킨다. '케놉시아(Kenopsia)', 즉 사람들이 붐비던 장소가 텅 비어있을 때 느껴지는 왠지 모를 적막과 공허함의 감정. 처음 방문하는 낯선 장소에 여행자의 감정이 개입되는 순간이며, 편안하고 자유롭게 그곳을 온전히 자신만의 방식으로 즐길 수 있는 순간이다.
유럽여행을 시작한 지 두어 달쯤 지났을까 드디어 북유럽 땅에 도착했다. 북유럽 여행의 시작이었다. 쉼 없이 달려온 여행이었고, 청춘이기에 할 수 있는 여행이었다. 아직 튼튼한 두 다리가 있음에, 밤을 새우고서도 아침에 여행할 수 있는 체력과 낭만이 남아있기에, 이러한 고생 속에서 조금씩 무언가 깨닫고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에, 앞으로 내 삶을 지탱해 줄 각별한 기억들이 쌓여가고 있음에, 무엇보다 한 번 지나면 다시는 오지 않을 소중한 순간이기에 감사함 속 여행을 이어가고 있었다.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 이곳에서 나의 새로운 이야기, 북유럽 여행은 시작되었다.
무모한 도전. 나에게 북유럽 여행은 도전이자 낭만, 청춘이었다.
나는 일을 크게 벌이는 스타일이다. 특히 관심 있는 분야와 활동에 있어서는 욕심이 생겨 원하는 목표, 수준, 결과물에 도달할 때까지 시간과 금전을 아끼지 않고 도전하는 삶을 살았다. 행여 일을 과하게 벌려 수습하는데 고통이 수반되더라도 어느 정도 그 과정을 즐겼고, 그 과정 끝 늘 새로운 배움이 있었기에 후회를 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이런 무모함과 객기 속 탄생한 여행이 바로 북유럽 여행이다. 유럽여행을 처음 기획할 당시만 하더라도 주요 국가와 도시들 몇 군데만 약 한 두 달 정도 머무르는 짧은 여행을 계획했었다. 그동안 궁금해했고 가보고 싶었던 곳들을 단순 순회하는 여행을 계획했었다. 그러나 지도를 펼쳐 동선을 그려보니 주변 다른 장소들에 호기심이 생겨 자꾸 눈에 아른거리기 시작했고, 그렇게 잠깐 알아보기 위해 조사한 도시들에 매력을 느껴 점점 한 두 곳 추가되더니, 이후 방문할 나라가 늘어났으며, 그 끝에 새로운 지역까지 추가되는 등 평범했던 나의 여행계획은 어느새 몇 개월간의 대장정이 되어 있었다.
더욱 북쪽에 펼쳐진 넓은 땅을 두고 이대로 선회하기 아쉬웠다. 서쪽으로 방향을 바꿔 독일로 넘어갈지, 혹은 조금 더 북쪽으로 우회해 북유럽을 한 번 다 둘러보고 서유럽으로 들어갈지 마음에 갈등이 생겼다. 여행계획에 북유럽을 추가할 경우, 적어도 3주 정도 기간이 길어짐과 동시에 비싼 북유럽 물가를 감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돈과 시간의 문제를 차치하고도 내가 이 계획을 감당할 수 있을지, 괜히 북유럽 여행을 추가했다 이후에 있을 서유럽 여행에 차질이 생기는 건 아닌지에 대한 걱정이 더욱 커졌다.
비행기 출국 일주일 전까지 나의 걱정과 고민은 거듭 이어졌다. 그러나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결국 나의 결단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의 선택 하나면 된다. 북유럽. 끝없이 펼쳐진 대자연의 풍경이, 해가 지지 않는 백야현상이, 높은 행복지수 속 살아가는 사람들과 그들의 삶이 궁금해졌다. 마음속 모험욕구가 연기처럼 스멀스멀 천천히 올라오더니, 결국 도전의 불씨를 지피고야 말았다. 불안은 어느새 의지로 바뀌었고, 기대와 자신감으로 바뀌었다. 이에 바르샤바에서 잠깐 멈칫했던 발끝은 북쪽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리투아니아는 생소하다. 우리가 보통 북유럽을 떠올릴 때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그 주변에 위치한 국가들을 주로 생각하지만, 북유럽을 이루는 구성원에는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의 '발트 3국'도 포함된다. 이들은 발트해와 러시아 사이, 그리고 폴란드와 핀란드 사이를 이어주며 지정학적 완충지 역할을 하고 있지만, 주변국들에 비해 존재감이 옅어 잘 알려지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다만, 동유럽과 북유럽이 만나는 접점으로써 또 다른 독특한 문화체계를 가지고 있어 '발트 3국'만의 고유한 매력이 있음 또한 사실이다.
'발트 3국' 중 첫 여행국가는 리투아니아다. 폴란드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한 때 폴란드와 병합한 역사를 가지고 있어 상대적으로 동유럽 문화적 특색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국경을 넘어 리투아니아 수도인 '빌뉴스'에 도착했을 때는 지금껏 여행하며 느낀 적 없던 새로운 분위기와 이질감이 느껴졌다. 오랜 세월 구소련의 영향을 받아 영어로 소통이 거의 불가능한 점에서 신비로웠던 것도 있었지만, 도시가 가진 낯선 질감의 공기, 사람들이 지닌 묘한 리투아니아의 정서가 이방인인 나에게는 스며듬에 있어 적응이 필요한 새로운 리듬이자 흐름이었다.
처음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Vilnius)'의 이름을 접했을 때는 고대 그리스나 로마에서 나올 법한 이름 형태로 인해 기품 있고 고상한 느낌이 들었다. 리투아니아와 빌뉴스에 대해 궁금해져 조사했을 때 '빌뉴스'의 의미가 '잔물결'이라는 것을 알고 난 뒤 이 이름을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 빌뉴스가 지닌 평화롭고 고요한 도시 분위기가 이름으로 잘 표현된 것 같았다. 이른 아침의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홀로 도시를 마음껏 활보하던 나는 이 잔잔함이 영원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고요한 떨림 말이다.
빌뉴스 여행 중 생긴 나만의 특별한 추억이 있다. 여행하며 현지 맥주를 꼭 마셔보는 나는 빌뉴스에서도 여김 없이 현지 상점에 방문해 처음 보는 신기한 맥주들을 몇 병을 담았다. 맥주와 함께 저녁을 먹는 것은 유럽여행 중 생긴 나만의 의식이자 하루를 마무리하는 방식이었다. 피로 가득한 저녁, 나는 함께 먹을 파스타를 따뜻하게 데운 뒤 범상치 않은 맥주를 기대 속 한 모금 들이켰고, 첫맛에 이 맥주가 나의 인생맥주가 될 것임을 직감했다.
새콤한 레몬향이 올라오는 부드러운 맥주였다. 여태껏 유럽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그 어디에서도 맛본 적 없는 맥주였다. 인생맥주를 리투아니아에서 찾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한 번 그 맥주의 맛을 본 나는 리투아니아에서 머무는 동안 매일같이 그 맥주만 찾았고, 리투아니아를 떠나고 나서도 그 맥주를 찾게 되었다. 최근 얼마 전 한국에서도 해당 맥주를 편의점에서 판매 중인 것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마셔보았지만, 현지에서 먹었던 그 맛을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아마 유통과정에서 맛이 변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혹은 어쩌면, 맥주의 맛이 변한 게 아닌 내가 숙성되며 변한 건지도 모르겠다.
리투아니아 여행이 아쉬웠던 점은 수도인 '빌뉴스'만 여행했다는 사실이다. 북유럽 여행은 호기롭게 시작한 반면, 리투아니아 여행에는 현실적인 제약들로 인해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없었다. 리투아니아에는 빌뉴스를 제외하고도 '카우나스, 샤울레이, 클라이페다' 등 아름다운 도시들이 많이 있다. 짧은 시간 리투아니아를 잠깐 스쳐 지나갔지만, 이곳의 잔잔한 일렁임이 그리워질 때쯤 나는 이곳에 다시 찾아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2026년의 새해가 밝았다. 벌써 한 달이 지나 2월이 되었고. 어릴 때는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는 게 기대되고 즐거웠지만, 어른이 되기만을 목 빠져 기다리다 보니 일 년이라는 시간은 매우 길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조금씩 나이가 들어갈수록 마치 롤러코스터를 탄 것 마냥 일 년이라는 시간에 가속도가 느껴졌다. 출근과 퇴근 후 잠시 쉬었다가 잠에 드는 일. 생각할 시간이나 틈 혹은 여유 없이 하루는 쏜살같이 지나가고, 이런 단조로운 하루가 모여 일주일이, 한 달이, 일 년이 되다 보니 늘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건가'하는 고민이 머릿속을 헤짚어놓는다.
영원할 것 같았던 나의 10대, 20대도 지나갔다. 30대에 들어선 나는 새해가 되는 첫째 날 왠지 모를 우울감에 빠진다. 분명 나이가 드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자연의 법칙이자 점차 성숙한 인간이 되는 단계일지 모르지만, 그 외에도 체력의 감소, 둔화된 회복력, 인생에 대한 책임감, 부담감 등의 부작용이 따른다. 젊은 시간은 지난다. 아직 나도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예전 같지 않음을 매해 지날 때마다 느끼는 중이다.
청춘은 '푸를 청(靑)'에 '봄 춘(春)'을 합친 말이다. 푸른 봄, 새싹이 올라온 파릇파릇한 봄을 뜻하는 말이며, 이를 사람에게 빗대어 혈기왕성한 젊음을 표현하는 단어다. '청춘'이라는 단어는 주로 '반항, 자유, 도전, 열정, 사랑, 성장'의 단어와 자주 연관되는데, 이는 모두 젊은 시기의 사람에게서 보이는 대표적인 특징들이기도 하다.
영화 '이유 없는 반항'과 자신의 삶으로 청춘과 반항의 아이콘이 된 제임스 딘. 그가 출연한 영화처럼 청춘의 사람들에게는 기성세대가 지닌 제도와 가치관에 의문을 품고 저항하며 흔들리는 젊은 나날의 태도가 필요하다. 세상은 그리 아름답지 않다는 점, 어른들도 불완전하고 불안정한 자아와 내면을 지닌 부족한 사람들이라는 점. 냉소한 사회와 고통을 수반한 현실에서 갓 알을 깨고 부화한 사람들은 슬픔과 아픔의 면역력을 키우고, 자신이 지금껏 가지고 있던 세계관의 파괴와 재창조의 단계가 필수다. 끊임없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현실을 인지해 나만의 둥지를 틀어 외압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새기는 것. 성장이다.
청춘과 반항의 또 다른 아이콘인 프랑스의 시인 '아르튀르 랭보'가 있다. 전반적으로 그의 시는 기성세대에 맞춰진 사회와 제도에 저항하는 자세를 보여준다. 실제로 그는 어릴 적 학문과 언어에 소질이 있는 천재였으나, 엄격한 규율과 기성세대의 보수적인 사상을 강요하는 주변 어른들에게 반감이 생겼고, 의도적인 방황과 반항의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리고 이런 성장 과정에서의 반항기는 그의 인생 전체에 영향을 미쳤고, 자유를 갈망하며 현실을 넘어 늘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려는 도전정신이 그의 작품 세계관 전체에 녹아있다.
랭보의 이런 반항적 기질, 초현실주의 사상의 매력을 지닌 그의 작품 <지옥으로부터의 자유>를 감상할 경우, 그는 사실 방향을 잡아주지 못한 어른들로 인해 방황을 겪은 청춘으로 느껴진다. 원칙, 규율이 갖춰진 제도와 그 제도를 가지고 맹목적으로 그리고 강압적으로 자유를 제한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일. 그저 이게 맞고 다른 모든 사람들도 똑같이 살아간다는 이유 하나로 모든 것이 합리화되는 일. 청소년의 랭보가 보았던 어른들의 모습일 것이다. 만약 어느 어른 한 명이라도 조금 더 통찰과 인내를 가지고 그를 이해시켜 주었더라면, 진심으로 그의 생각을 듣고 방향을 제시해 주었더라면, 인간 랭보는 현실에 덜 실망하지 않았을까.
젊은이가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한다는 자체는 옳다.
게오르그 짐멜
혹자는 말한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무수한 실패를 겪어야 한다고. 성공하기 위해 무수한 도전을 해야 한다고. '어른'으로 도약하는 '성공'을 위해 청춘은 무수한 실패를 겪어야 할 시기다. 또, 도전해야 할 시기다. 호기심을 가지고 세상을 탐구하며, 때로는 비현실적인 발칙한 상상과 방법으로 세상에 부딪혀도 보고, 또 실패한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성찰을 얻는 등 맷집을 키우고 세계관을 구축하기 위한 시간이다. 그렇지 않으면, 지속적인 방황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고, 자신의 주관이 아닌 타인의 주관에 맞춰 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회는 이런 실패를 용인하지 못한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먼저 앞서 살아온 선구자들에 의해 다른 가치관과 삶의 방식을 향한 어쩔 수 없는 억압과 폭력은 생겨날 것이다. 물론 어른의 도리로써 어긋나는 사람을 바로잡고 도와주고 싶은 마음도 이해한다. 하지만, 살면서 꼭 겪어보고 깨달아야 하는 결정적인 순간들이 있다. 아프더라도 스스로 버텨내는 힘을 기를 수 있도록 놓아줘야 할 시기가 있다. 청춘에게 관심을 가지면서도 틀린 선택을 하는 그들을 방관할 수 있는 모순된 답답함을 견뎌낼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방황이 끝나 자신만의 답을 찾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 그렇게 삶을 주도적으로 꾸려가게끔 도와주는 것. 진정한 어른의 도리라 생각한다.
현세대 미국을 대표하는 사진작가 중 한 명이자, 뉴욕 유수의 갤러리, 미술관이 주목하는 사진작가인 라이언 맥긴리가 표현한 청춘의 모습을 나는 사랑한다. 청춘들이 나체로 벌판을 뛰어다니는 그의 사진에는 그 어떠한 부끄러움이나 자제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자유와 세상을 향한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다. 빛의 향연과 화려한 색감은 어디로 튈지 모를 청춘의 불완전한 감정과 방황하는 모습들을 상징하며, 맥긴리는 청춘을 두고 낙관과 희망이라 표현했다.
어떻게 보면 내 글의 세계관을 관통하는 주제인 '주체적인 삶' 또한 방황하고 불안정했던 나의 청춘시절에서 기인한 가치관과 삶의 태도다. 특히, 우리나라의 비교하고 눈치 보는 특유 문화 그리고 정형화되어 있고 정답이 존재하는 사회상을 비판하는 글을 많이 썼는데, 이도 내가 지닌 하나의 저항이자 자유를 향한 의지다.
가진 땅에 비해, 가진 자원에 비해 과포화된 인구, 남들만큼은 살아야 한다는 정서, 그리고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최고를 추구해야 한다는 가치관은 우리 모두를 힘들고 병들게 했다. 진리를 탐구하는 철학도 언제고 기존 생각에 의심을 품고 잘못될 수 있다는 전제를 두는데, 현재 우리가 당연시 여기는 제도와 규율, 잣대와 가치관이 과연 영원한 정답이 될 수 있을까? 생각보다 자신의 편협한 사고방식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그 기준을 다른 이에게도 똑같이 적용하여 사회와 공동체를 병들게 한다. 겸손과 통찰이 아닌 경직과 강요는 늘 폭력이 되어 사회신뢰도를 낮추는 큰 요인이 된다. 그리고 이런 폭력에 가장 연약한 집단이 바로 청춘이다.
현시점의 대한민국을 봤을 때 우리나라만큼 줄 세우기에 진심인 나라는 없는 것 같다. 교육에서의 성적표와 등수 매기기는 기본이고, 학교를 벗어나서도 사람들은 대학교 순위, 아파트 급 나누기, 연봉에 따른 사회적 위치 등 경쟁사회라는 개미지옥을 스스로 만들고 있다. 평균값과 중앙값에서 멀어지는 순간 자신은 뒤처지는 사람이 되고, 그때부터는 비교와 불안, 시기, 질투라는 감정들이 따라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람의 심리다. 가치관이 충분히 형성되지 못한 청춘들에게 이런 획일화된 기성세대의 강요와 가르침은 청춘들이 앞으로 찾아야 할 삶의 방식과 인생의 태도를 영원히 찾지 못하게끔 가림과 동시에 현재의 불안감과 열등감, 패배감이라는 부작용을 자아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는 낭만이 필요하다. 아니 사람들은 낭만이 필요하다. 낭만(Romance), 과거 소설이라는 뜻에서 현실을 벗어나 이상적이고 감성적인 뜻으로 변모했다. 즉, 억압되고 획일화된 현실에서 벗어나 때로는 평범한 사람들이 하지 않을 것 같은 생각, '굳이'라는 의구심이 들만한 행동들이 필요하다. 이는 개인이 자신의 주체적 삶을 살기 위한 저항이자 세상을 또 다르게 볼 수 있게끔 도와주는 가능성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한 우리는 현실을 벗어난 영원한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다. 그것이 여행이든, 예술이든, 비 오는 날 우산을 쓰지 않는 것이든, 길바닥에 누워있는 것이든, 뭐든. 설령 누군가 손가락질하거나 눈초리를 보내더라도 개의치 않고, 기준점에서 조금 벗어나더라도 내 자유를 즐길 수 있는 낭만 말이다.
어떤 사람은 젊어도 늙었고,
어떤 사람은 늙어도 젊다.
탈무드
나이가 지긋이 든 인생선배들의 인터뷰를 모아놓은 영상을 보았다. 허옇게 센 머리카락과 주름 잡힌 그들의 피부는 그들이 살아온 인생의 흔적이자 지금껏 자신의 세계관을 완성하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왔다는 표식이다. 그들이 펼친 삶을 하나둘 정리하며 이제 삶을 마무리하는 단계에 이르렀고, 뒤를 돌아보며 인생에서 후회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했는지에 대한 생각들을 들려주었다.
영상에 등장하는 선배들 대부분의 대답에는 하고 싶었던 것에 '도전하지 못한 것, 해보지 않고 겁먹었던 것, 눈치 보며 살았던 것, 주체적으로 살지 못했던 것'의 공통된 답변이 있었다. 그리고 끝에는 '자신을 위해 살라'는 조언들로 영상이 끝났다. 이는 인간이 기본적으로 지닌 자유롭고 주도적인 삶에 대한 열망을 여실히 보여준다.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이기적으로 살라는 말이 아닌, 자신을 존중하며 살라는 말이다. 인생을 살다 보면 중요한 선택과 삶의 방향에 있어 다른 이들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나이가 들어갈수록 이런 경향은 더 심해진다. 그렇기에 한 살이라도 더 어릴 때, 책임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더 자유로운 청춘의 시기, 도전과 다양한 경험, 깨달음이 필요하고, 이는 결국 삶을 지탱하는 기반이 될 것이다.
하고 싶은 것을 못하는 것에 있어 쾌락과 행복을 느끼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리고 누구나 내면적으로 자유와 낭만을 추구한다. 그저 마음 가는 대로 살아왔는지, 가슴의 두근거림을 쫓아 살아왔는지에 대한 차이만 있을 뿐이다. 선택에는 책임이 뒤따른다. 청춘의 시기 혹은 낭만에서 기인한 판단 오류는 어쩌면 더욱 큰 고통을 가져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믿는다. 그 또한 삶의 밑거름과 영양분이 될 것이라고. 인생이라는 과업 속에서 그 실패가 절대 부끄럽지 않을 것이라고. '했을 때'의 후회보다 '하지 않았을 때'의 후회가 더 클 것이라고.
행복노트 #83
청춘은 낭만이다.
나는 아직 방황하고 있다. 어쩌면 평생을 방황하며 살지도 모른다. 랭보가 그랬던 것처럼 내가 가진 세계관을 완성하고 이해할 때까지 늘 방향성에 대한 고민이 들 것이다. 또한 맥긴리가 그랬던 것처럼 자유를 향한 기대와 열망을 가지고 있는 한 유연하지 못한 현실과 끊임없는 충돌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그 속에서 내가 유일하게 가질 수 있는 희망은 낭만이다. 현실에 대한 저항이자 어쩌면 현실을 가장 잘 사는 방법이다. 낭만을 잃어버리는 순간 우리의 청춘은 끝난다. 청춘의 사람들? 낭만을 지닌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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