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사람만 사진빨이 있는 게 아니네

by 최예또


아버지의 허락이 떨어진 후 <서울에서 첫 자취방 구하기 프로젝트>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예산이 충분하지 않았던 고로 많은 부분은 포기하고 몇 가지 최소한의 조건만 내세우기로 했다.


첫째, 보증금은 500만 원, 월세는 관리비 포함하여 40만 원 이내일 것. (싸면 쌀수록 가산점을 줄 것.)

둘째, 역에서 걸어서 15분 이내의 거리일 것.

셋째, 집주인의 인품과 인상이 고즈넉할 것. (관상은 과학이다.)

넷째, 굳이 고르자면 반지하보단 옥탑방. (옥탑방은 낭만 있으니까!)


일단 위치를 먼저 정해야 했는데, 나는 무조건 연극의 메카인 대학로와 가까운 곳에서 살고 싶었다. 하지만 대학로가 위치한 혜화동은 근처의 성균관 대학교 때문에 원룸의 수요가 많아서인지 시세가 너무 비싸서 조건에 맞는 방을 찾을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눈을 돌려 성북구와 동대문구 쪽까지 찾아보니 그제야 조건에 맞는 괜찮은 방들을 몇 군데 찾을 수 있었다. 나는 일일이 집주인들께 연락을 돌리고 동선과 이동시간을 고려하여 순서를 정한 다음 방문 약속을 잡았다. 부동산 복비를 아끼기 위해선 내가 부동산이 해야 하는 일까지 하는 수밖엔 없었다.


그렇게 아버지의 차를 타고 서울 곳곳을 누비며 집을 둘러보던 두 번째 날, 우리는 그날도 더 저렴하고 더 괜찮은 방을 얻기 위해 다섯군데가 넘는 집을 보며 발품을 팔고 있었다. 8월 중순 서울의 태양은 중천을 넘어간 오후에도 적지 않은 열기를 내뿜고 있었다. 장시간 운전과 집주인들과의 대화에 지친 아버지가 먼저 백기를 들어 보였다.


"방금 봤던 집 괜찮아 보이던데 그만 그걸로 계약을 하는 것이 어떨까?"

"아냐. 그곳은 깨끗하긴 한데 가전 가구가 아무것도 없어서 들어갈 때 돈이 꽤 많이 들 거야."

"그럼 두 번째로 봤던 곳은?"

"거기는 다 좋은데 역이랑 거리가 너무 멀어. 그리고 큰 길가랑 너무 가까워서 시끄러울 것 같아."

"아이고. 나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네가 안 본 새에 많이 꼼꼼해졌구나. 그런데 해도 해도 너무 꼼꼼한 것 아니니?"

"한 번 구하면 최소 일 년은 넘게 살아야 하는 집인데 당연히 꼼꼼해야지. 맘에 드는 곳이 없는 걸 어떡해."

"나는 힘들어서 못하겠다 이제. 어제, 오늘 이틀동안 열 군데를 넘게 봤는데 마음에 드는 곳이 없으면 어떡하니?"

"조금만 더 찾아보면 마음에 드는 집이 나올 것 같아. 일단 오늘은 이만 돌아가자."


몇 년째 장롱면허만 소지하고 있던 나 역시 연세도 지긋한 아버지를 복잡한 서울 바닥에서 하루 종일 운전대를 잡게 시키는 것이 절대 마음 편했던 것은 아니었다. 결국 그런 아버지를 봐서라도 내 마음에 쏙 들진 않더라도 여태껏 봤던 곳들 중에서 그나마 나은 곳으로 곧 마음을 정해야 할 것 같았다.


결국 내가 선택했던 곳은 성북구 정릉동에 위치한 보증금 100에 월세 40짜리 여성전용 원룸이었다. 1층엔 상가가, 2~3층엔 원룸 그리고 4층엔 집주인이 직접 거주를 하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특히 여성전용이라는 점과 인상 좋고 젊은 집주인 부부가 한 건물에 거주하며 CCTV를 통해 출입자를 엄격하게 통제한다는 점을 꽤나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다.


집 계약은 부동산을 끼지 않고 직거래 방식으로 진행되었던 터라 건물의 등기부등본 등 꼼꼼하게 살펴봐야 할 점들이 많았다. 나는 계약 전 날 새벽까지 계약 시 숙지해야 하는 부분들을 꼼꼼히 체크하는 한 편 어차피 한 번 가는 김에 내 짐도 같이 옮겨놓는 게 나을 것 같아 간단하게 짐을 꾸려 준비해 두었다.


그리고 대망의 계약 날. 나는 계약을 하기에 앞서 혹시나 하는 맘에 지금 벌이가 있는 게 아니라서 염치를 불구하고 월세를 조금 깎아줄 수는 없냐고 물었고, 집주인은 내게 보여줬던 방 말고 리모델링이 안 되어 있는 다른 방은 월세에서 5만 원을 빼줄 수 있다고 했다. 한 달에 5만 원이면 1년에 60만 원 돈이었으니 그때의 나에겐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나는 일단 저렴한 방을 한 번 보고 싶다고 했다.


전에 봤던 깔끔한 화이트톤의 인테리어와는 거리가 먼 촌스런 하늘색 페인트가 얼룩덜룩 칠해진 조금 낡은 방은 미세하게 퀘퀘한 냄새도 나는 것 같았지만 사는 데에 크게 문제가 될 것 같진 않았다. "이 방 어제 빠진 거예요. 타이밍이 좋네요."라는 집주인의 부가설명은 나의 망설임에 마침표를 찍었다.

"저 이 방으로 할게요."



나는 계약을 무사히 마치고 꾸려온 짐들을 장롱에 쑤셔 넣었다. 엄마는 나가서 청소용품을 좀 사서 방바닥부터 닦아야겠다고 부지런을 떨기 시작하셨다. 비록 땅바닥에 사람 두 명이 나란히 눕기도 벅찬 4평의 낡은 원룸이었지만 서울에 나만을 위한 공간 한 칸을 마련했다는 사실은 나를 가슴 벅차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나는 정리부터 빨리 시작하려는 엄마를 만류하면서 에어컨부터 냅다 켰다. 에어컨이 있는 집을 처음 가져본 나는 더울 땐 마음껏 에어컨을 켤 수 있게 된 사실이 감격스러웠다.


그런데 이게 웬 일. 에어컨을 키자 시원해지라는 공기는 안 시원해지고 두 명이 앉아있기도 답답한 좁은 방 안이 곰팡이 묵은 퀴퀴한 냄새로 가득 차는 게 아닌가. 싱크대 수전을 계속 만지던 엄마는 물살이 아주 세거나 아주 약하게 밖에 나오지 않는다며 사용하기 전에 고쳐야 할 것 같다고 했다. 순식간에 방 안을 가득 메운 에어컨 곰팡이 냄새에 숨이 막힌 엄마와 나는 일단 가져간 짐은 그대로 두고 급하게 차로 피신했다.


집주인은 연락도 되지 않고 집을 찾아가 문을 두드려도 나오지 않았다. 결국 오늘은 그 방에서 잘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린 엄마와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고 그날 저녁에서야 연락이 닿은 집주인은 강경하게 집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만 했다. 그녀의 태도는 월세 깎아달라고 해서 더 저렴한 방으로 준 건데 당연히 싼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느냐는 식이었다.


나는 월세가 5만 원이 더 저렴한 방을 골랐다고 해서 기본적인 관리조차 되어있지 않은 점까지 감안하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공격적인 태도오 대응하는 집주인과 이미 감정적인 갈등까지 빚어버린 나는 결국 입주 첫날 다시 그 계약을 무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꼼꼼히 준비한다고 했는데도 결국 문제가 생기고야 마는 것이구나. 나는 그때 큰 깨달음을 얻었다. 사람이나 사물이나 겉보기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되는 거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