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부터 경기도권만 전전했던 나는 항상 서울살이를 동경했었다. 사원증을 목에 걸고 한 손엔 커피를 든 채 바쁘게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밤이 되어도 꺼지지 않는 불빛, 시끄러운 차의 경적소리와 하늘 높게 솟은 고층 빌딩들. 유독 더 빠른 속도로 시간이 흐르는 것 같은 그런 도시, 서울에서 산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내가 동경하는 그들의 모습 이면엔 얼마나 묵직한 책임감이 자리하고 있는지는 감히 짐작하지 못한 채 어린 날의 나는 그 복잡하고도 아름다운 도시에 나만의 공간을 마련하는 일을 원대한 꿈처럼 여겼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서울에서 산다는 것은 기대했던 만큼 실현 장벽이 높은 일이 아닌 거였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서울 자취방은 최소 몇천만 원의 보증금은 있어야 구할 수 있는 것 아니냐며 내가 살짝 흘린 말을 듣더니 그것보다 훨씬 저렴한 예산으로도 충분히 구할 수 있다며 직거래로 방을 구하는 어플을 알려주었던 것이다. 어플에 올라온 매물들을 살짝 훑어보니 나의 예상보다 훨씬 적은 보증금과 월세로도 구할 수 있는 방들이 꽤 검색이 되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자기 전에 침대에 누워 그 어플을 둘러보며 내 수중에 있는 돈으로도 구할 수 있는 방들을 찾아보는 일이 습관이 됐다. 어두운 방 안에서 몇 시간 동안 핸드폰 화면만 보고 있다 보면 종종 눈이 아파왔지만, 멀게만 느껴졌던 서울 자취 생활이 한 발짝 눈앞으로 다가온 것만 같아서 설레는 마음에 쉬이 잠에 들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내가 그때까지 생각 못한 사실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6년이라는 기간 동안 유학생활을 하다가 귀국하지 얼마 되지 않은 외동딸인 내가 홀로 사시는 아버지께 따로 사는 것에 대해 동의를 구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편부가정에서 자란 내가 이제야 진정한 식구(食口)의 의미처럼 같이 밥을 먹고 살을 부대끼며 살 수 있을 거라고 오매불망 기대하셨을 노부에게 분가를 선언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보통의 순서처럼 직장을 먼저 구한 다음 자취방을 잡아 독립을 하는 것이 아닌, 우선 독립부터 하고 그다음 순서를 진행하고 싶다고 말하면 허락을 해주실지 가늠이 안 됐다. 몇 날 며칠 몰래 속앓이를 하던 나는 결국 아버지와 함께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어렵게 말을 꺼냈다.
아버지, 저 연기하고 싶어요.
아무런 계획 없이 일단 서울에 가서 자취를 시작하겠다는 얘기보다 내가 서울에 가서 자취를 해야만 하는 이유를 먼저 꺼내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아버지 입장에서는 갑자기 연기라니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생각하셨을 테지만 사실 나에게 연기는 그저 서울 자취생활을 위한 핑계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남들이 비전 좋다고 해서 중국 유학길에 올랐고, 남들이 전공은 취업 생각 하고 정해야 한대서 문과 중에서도 상경계열을 전공했던 나였다. 그렇게 남들 오지랖 따라 인생을 살아오던 내가 스물네 살이 되던 그 해에 처음으로 나만을 위한 이기적인 선택을 하고 싶어 졌던 거였다.
나는 선 '당돌한 선언' 후 '눈치보기' 스킬을 사용하면서 아버지가 거절하는 말을 꺼낼 수 없도록 자연스럽게 내가 연기를 하고 싶은 이유와 이 꿈을 위해 서울에서 자취를 해야 하는 필요성까지 장황하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동안 숟가락도 내려놓으시고 나의 이야기를 집중하여 듣던 아버지가 별안간 고개를 끄덕이시며 "그래,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라고 하시는 게 아닌가. 예상보다 쉽게 떨어진 허락에 어벙벙할 새도 없이 아버지는 "대신 자취를 한다는 건 경제적으로도 완전히 독립을 하겠다는 뜻이야. 그래도 좋다면 나가서 살아."라는 주의사항을 덧붙였다. 당연히 스스로 벌어먹고 살 생각을 했었던 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나의 <서울에서 첫 자취방 찾기 프로젝트>는 본격적으로 막이 오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