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서울에 300에 20짜리 투룸이 있다고요?

by 최예또

그렇게 고대했던 첫 계약이 실패하고 나자 실망감이 꽤 컸던 탓인지 방 구하는 일은 잠깐 뒷전이 되었다. 돈 몇 푼 아끼자고 괜히 직거래를 알아봐서 겪지 않아도 될 일을 겪는 건가 싶다가도 부동산에 맡겼다가 지인도 경험도 없는 서울 초짜인 내가 이리저리 휘둘리느니 차라리 내가 직접 일을 그르치는 게 낫다 싶어 마음을 고쳐먹고, 또다시 불안해하길 반복하는 나날들이었다. 그래도 시간이 약이라고 어느 정도 마음이 추스러지자 나는 다시 의지를 다잡을 수가 있었고 열 군데 넘게 방을 직접 보고 온 경험을 통해 직접 가보지 않고 손품만 팔아도 그전엔 안 보였던 방의 장단점들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와의 약속 자리에 가기 전에 혼자 약수동에 위치한 방을 둘러보고 있었던 나는 이곳이 가장 최선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역에서부터 걸어야 하는 거리가 조금 있긴 했지만 분리형 원룸이라 요리를 해도 방에 냄새가 배지 않을 것 같았고 가격대 치고는 방도 넓게 빠진 편이었다. 집에 돌아가면 아버지께 말씀드리고 이삿날을 잡아야겠다고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마지막으로 어플을 다시 한번 둘러보는데 방금 올라온 파격적인 조건의 매물이 눈에 띄었다.


흑석동 / 지층 투룸 / 300에 20 / 장기거주 불가능.


약식 도면 사진 한 장과 구구절절한 설명 없이 간단히 조건만 올려놓은 그 매물은 조건에 비해 가격이 너무 저렴하게 나와 있어서 순간 사기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퍼뜩 들었다. 그렇지만 이내 다시 사기인지 아닌지는 직접 보고 판단하면 되는 문제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더 이상 지체할 필요 없이 첨부되어 있는 연락처로 바로 전화를 걸었다.


잠깐의 신호 대기음이 흐르고 한 남성이 전화를 받았다. 최대한 빨리 방을 보고 싶다고 하니 그는 내일 시간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미리 설명하길 이 구역이 재개발지역이라서 언제 이주 공고가 떨어질지 모르니 장기거주는 불가능하다며 서울 자취방 시세에 비해 저렴히 올린 이유도 이 때문이라고 했다. 그때만 해도 서울에서 한 1-2년 정도 연기활동을 하다가 다시 해외로 나가고 싶었던 마음이 컸던 나는 서울에서 오랫동안 정착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흑석동이면 대학로까지 가깝진 않지만 한 번에 가는 버스도 있는 터였다. 여러모로 나에게 딱 맞는 조건의 집이었다.


다음 날 약속된 시간에 맞춰 엄마와 함께 흑석동을 찾았다. 그 동네는 흑석동이라는 이름도, 중앙대 근처라는 지리도 무엇 하나 익숙한 것이 없었다. 전화로만 얘길 나눴던 집주인아저씨는 직접 만나보니 건물주치고는 소탈하고 점잖은 인상이셨다. 아저씨께서는 이 집을 매입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아 본인도 내부 모습은 본 적이 없다고 하셨는데, 그제야 나는 아저씨가 방 사진 한 장 없이 약식 도면만 덩그러니 어플에 올려놓으신 연유가 이해가 되었다. 이삿짐 준비에 바쁜 세입자에게 방 사진을 찍어서 보내달라는 말을 하기가 겸연쩍어 간단히 방구조라도 알 수 있게 도면을 그려 보내달라고 하신 건 아저씨 나름의 배려였던 것이다.


20190911_153516.jpg
20190911_153547.jpg
20190911_153554.jpg


집 내부엔 세월의 흔적이 진하게 묻어있었다. 으레 옥색 몰딩이라고 표현하는 구식 인테리어 스타일에 촌스러운 꽃무늬 벽지는 원래의 색이 무엇이었는지 짐작할 수 없을 만큼 바래 있었다. 대학교 재학 시절부터 혼자서 8년을 이곳에서 거주하셨다는 전 세입자분은 이 동네가 좁은 골목이 많긴 해도 치안은 좋은 동네니 혼자서 지내는 데에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며 나를 안심시켰다. 그러면서 학생들은 주로 학교 정문 근처에 많이 살기 때문에 근방의 거주자들은 대부분 할머니, 할아버지의 연령대이고 위층에 거주하시는 아주머니께서는 집주인처럼 실질적인 건물 관리를 도맡아 하신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전 세입자는 청약에 당첨되어 자가로 이사를 가는 터라 가전·가구를 모두 새것으로 구매할 예정이라며 본인이 쓰고 있던 것들은 모두 두고 가겠다고 했다. (심지어 벽걸이형 에어컨은 바꾼 지 1년밖에 되지 않은 신형이었다!). 나에게 맞는 자취방을 구하기 위해 그때까지 집을 총 스무 군데 정도 둘러봤던 나는 전 세입자와 집주인이 방을 빨리 빼기 위해 집을 보러 온 사람이 솔깃하게끔 하는 말에 대해 어느 정도 눈치를 채고 있었다. 그러나 시세보다 터무니없이 저렴한 금액으로 새 세입자를 들이는 이유가 그저 공실방지를 위해서라고 하시는 말씀을 들으니 의심으로 시작했던 나의 마음이 확신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서 나는 바로 가계약금으로 보증금의 10%에 해당하는 금액을 송금하고 전 세입자분의 전출일에 맞춰 내 전입일을 잡았다. 그렇게 나와 흑석동의 인연은 드라마처럼 갑자기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