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랜서 통번역사로 살아남기 31

하루하루 다시 돌보기

by 예도하
아끼고 아끼면...


라벤더 비누 이론(Lavender Soap Theory)이라는 게 있다.

아까워서 아껴둔 물건이 결국 쓰이지 못한 채 사라지거나
가치를 잃는 것을 막기 위해,


지금 이 순간,

가장 좋은 것을 쓰자는 삶의 태도.


프리랜서 생활을 시작하고 나니 일주일 중 집에 있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아졌다.

바쁜 집순이인 나는 일정이 있는 날을 제외하면 침대와 책상 사이만 오가며 하루를 보낸다.


그나마 1.5룸이라 다행이지, 원룸이었다면

침대의 자기장에 너무나 강력해 포획된 사람들 협회장이라도 맡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집에서 밥을 해 먹고, 글을 쓰고, 공부를 하다 보니 그제야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먼지만 쌓여가던 내 물건들.


신작 <여행은 늘 나보다 늦게 온다>를 준비하면서
아침에는 글을 쓰고,
오후에는 카페에서 아이디어를 정리하고,
저녁에는 집에서 편집과 디자인을 했다.


하루의 대부분을 집에서 보내다 보니
그동안 여행지에서 사 왔거나 선물로 받았던 물건들이 하나씩 눈에 밟히기 시작했다.


예전의 나는
손님용으로 아껴둔 예쁜 컵과 평소 내가 쓰는 컵을 구분했다.

보여주기 좋은 것들은 아껴두고, 일상에서는 아무거나 썼다.


그런데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니 막 쓰던 물건들이 먼저 사라졌다.

남은 건 손님용이거나 그보다 더 아껴두었던 것들뿐이었다.


“이런 것도 있었네.”


하나씩 꺼내보다 보니 식품은 유통기한이 가까워져 있었고,
잊고 있던 물건들이 조용히 시간을 버티고 있었다.


그래서 떠올랐다.

라벤더 비누 이론.


이제는
누군가를 위해,
혹은 언젠가를 위해
아껴두지 않기로 했다.


지금,
내가 필요해서
내가 아끼는 것을 쓰기로 했다.


물건을 아끼는 사람은 안다.

쓰고 닳고, 결국 사라진다는 사실이
은근히 괴롭다는 걸.


그래서 처음 개봉하고, 처음 사용하는 일이 유난히 어렵다.


생각해 보면 허리띠를 졸라매며 사는 프리랜서는 아끼는 방식조차 현실적이어야 한다.

그렇게 쌓아두기만 하면 결국 집은 물건으로 가득 차게 된다.

내가 다이어트를 못 한다면, 내가 사는 공간이라도 숨을 쉬게 해야 했다.


그래서 작은 결심을 했다.

예쁜 찻잔을 꺼내고, 몇 개 남지 않은 티백을 뜯어 물을 끓였다.

처음이 어렵지, 한 번 하고 나니 그 물건에 대한 집착이 조금은 느슨해졌다.


그다음은
선물로 받았던 것들.


퇴사하며 받은 바디 로션을 개봉하고,
유럽 여행에서 사 온 장미향 포르투갈 비누도 뜯었다.

오가닉 디퓨저를 열어 스틱을 꽂고 책장 위에 올려두었다.


머리가 터질 듯한 날에는 동생에게 선물 받은 유칼립투스 오일을 열었다.

친구가 캐나다에서 사 온 에스프레소 잔에 따뜻한 물을 담고 몇 방울 떨어뜨리니

오일이 잔잔히 퍼지며 은은한 향이 퍼졌다.


그리고 문득 들었다.

“이렇게 좋은 걸 나는 왜 이렇게 오래 아껴두고 있었을까.”


아끼면 0이 된다는 말처럼,
쓰지 않으면 결국 아무 의미도 남지 않는다.

같은 일상인데 조금 더 좋은 것을 쓰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달라졌다.


나를 챙길 수 있는 건 결국 나뿐이니까.

이제는 서랍을 열고 아껴두었던 것들을 하나씩 꺼내 쓰기로 했다.




⛵ 예도하, 오늘도 강을 건너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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