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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도르노 Aug 09. 2022

반성적 판단력은 자연과 자유를 매개하는 역할을 한다.

칸트 [판단력 비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 - 1804
[순수이성비판](1781):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실천이성비판](1788): 인간은 무엇을 행해야만 하는가
[판단력비판](1790): 인간은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

칸트의 3대 비판서. 철학이나 칸트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세 가지 답변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그 답변을 접하기 전 '비판서'라는 단어 자체에서 어려움을 느꼈다. 비판? 내가 아는 그 비판을 말하는 건가?

 칸트는 이론과 실천 두 영역에서 각각 이성이 세계를 전유할 수 있는 권한이 어디까지인가를 이성 자신이 반성적으로 검토하는 작업을 비판으로 간주했다.
 비판은 사회 역사적 행위 주체가 어떻게 삶에의 관심에 의해 인도되면서 세계를 전유할 수 있는가를 스스로 검토하는 작업이다.
- 서울대학교 철학사상 연구소

정리해보면 [판단력비판]은 이성이 자신(이성)을 비판하는 작업을 통해 인간이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지 답을 얻을 수 있는 책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다. 인간은 자연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가. 생각해보면 너무 광범위해서 말 그대로 '심연'처럼 느껴진다. [판단력비판]은 이러한 자연과 자유 사이에 놓인 커다란 심연을 매개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쓰여졌다고 한다.


미학대계 간행회 1권 [미학의 역사]에서는 [판단력비판]의 '인간은 무엇을 희망해도 좋은가'라는 통찰을 위한 필수적인 구성요소들을 8가지로 꼽았다.

미감적, 예술적 경험의 감정적 근거

관심 없는 즐거움

상상력과 오성 사이의 자유로운 공동 유희

목적 없는 합목적성

주관적 필연성과 공통감의 이념

관심과 결합된 미감적 판단

천재론과 예술장르론

도덕성의 상징으로서의 미

오늘의 글에서는 이 많은 요소들 중 가장 핵심이라고 생각되는 단 두 가지만 다루어 보았다.


[판단력비판]은 본론이 <미감적 판단력 비판>과 <목적론적 판단력 비판>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중 <미감적 판단력 비판>이 미학적 논의를 담고 있다. 칸트가 미감적 판단의 특징으로 가장 먼저 부각시키고 있는 것은 판단의 감정적 근거이다. 그리고 이 감정의 독특한 성격을 드러내기 위해 '무관심적' 내지는 '관심(사심) 없는' 즐거움이란 말을 사용했다.


무관심적 즐거움(das interesselose Wohlgefallen)

칸트는 (미감적 판단을 내리는) 주관이 욕망에서 벗어난 상태에서 대상을 정서적으로 바라보고 체험한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무관심성' 이라는 말은 '무욕적 태도'를 뜻한다. (섀프츠베리, 허치슨에서 언급했듯이)


칸트가 말하는 무관심성 개념은 또 다른 중요한 뜻을 갖고 있다. 미감적인 판단을 하는 우리의 주관은 대상의 존재에 조금도 마음이 끌려선 안 된다. 예를 들어 연극을 감상할 때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한 주인공에 대해 며칠이 지나도록 슬퍼하지는 않는다. 작품 안에 등장하는 배경이 실제로 존재하는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따지지도 않는다. 이처럼 어떠한 작품이 미감적 경험의 대상이 되는 순간, '사실'이라는 것의 진지함과 무거움으로부터 일정하게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거리는 우리의 주관이 선입견 등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느끼게 한다. 이로서 '미감적 예술'은 자유로운 예술이라고 규정되었다.


목적 없는 합목적성(Zweckmäßigkeit ohne Zweck)

미란, 합목적성이 목적에 대한 표상 없이 어떤 대상에서 지각되는 한에 있어서, 그 대상의 합목적성의 형식이다.

칸트는 쾌적과 선을 미로부터 배제하고자 '목적없는 합목적성'에 대해 언급했다. 나는 이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말을 처음 접했을 때 단어 하나하나를 뜯어보며 이해하려고 시도했다. 먼저 '목적'이라 함은 아직 현실이 되지 않았지만 내가 닿고 싶은 어떠한 개념이다. 그렇다면 '합목적'은 목적으로 향하기 위해 합당한 방법일 것이다. 그리고 '합목적성'은 그 방법을 가진 속성과 같은 것일 테다. 그렇다면 '목적 없는 합목적성'은 목적은 없지만 합당한 곳으로 닿는 성질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다. 합목적성은 목적을 떠나서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목적없는 합목적성은 미감적 경험의 자율성(무관심성)과 자기목적성과 긴밀하게 연결된 논점이다. 주관은 자신을 반성할 때 직접적인 목적이나 욕구를 향해 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칸트는 합목적성으로부터 욕구를 배제하고자 한 것이다. 어떠한 대상에서 욕구를 배제하게 되면 주관은 어떤 것을 미감적으로 수용할까? 바로 '형식' 내지 '형태'이다. 어떤 작품이 어떤 구도를 보여주는가, 이미지들이 서로 어떻게 관계하느냐 등에 대해서 능동적, 형식적으로 반성하게 되는 것이다. 미감적 판단의 대상은 늘 이러한 형식적 반성 원리가 적용된 상태에서 주관에게 '대상으로서' 다가온다.


하지만 '목적 없는 합목적성'은 '형식'과 '형태'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대상이 어떤 주제를 가지고 통일성을 가지고 있는지, 대상 전체의 부분들 사이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반성이기 때문에 (예술작품의) 내용과 형식을 모두 아우르는 개념으로 봐야 한다. 이처럼 이때의 '형식'은 매우 포괄적인 개념으로, 칸트 미학을 일컫는 '형식 미학' 이란 용어를 조심해서 사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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