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예도르노 Oct 25. 2022

철학과 예술은 연대해야 한다.

프랑크푸르트 학파, 아도르노 예술론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등장한 20세기는 혼란했다. 전쟁도 있었고, 1차 세계대전 이후에 '서유럽 풍요의 20년대'라고 불리는 시기가 찾아온 것이다. 빈부격차가 심해지면서 자연스럽게 부자들, 부르주아들이 많아졌다. 이렇게 돈이 최고가 되어버린 사회는 전적으로 경쟁의 원리에 따라 움직이게 되고, 구성원들로 하여금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이기적이고 남을 적대시하는 본성을 강화하도록 부추겼다. 인류의 다수는 상층 소수집단이 누리는 풍요를 포기해지는 데에 익숙해졌다. 평범한 시민들은 자신들이 본질적으로 착취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사회 전체를 위해 봉사할 뿐이라는듯한 태도를 취하게 된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미리 정해진 인생의 과제를 묵묵히 수행할 뿐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이고 긍정하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왼), 아도르노(오)

이 두 인물은 '독일 현대철학의 기둥'이라고 불릴 만큼 중요하게 생각되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에서 기억해야 할 인물들이다. 이들은 눈부신 문명을 이룩한 인류가 최악의 타락(전체주의, 전쟁 등)을 보여준 20세기를 지나면서 문명과 인류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전체의 존립(전체주의)을 위해 개인의 삶이 부당하게 통제되는 상황을 과학기술의 진보를 통해 벗어나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열심히 노력해왔지만, 철저하게 배반당했다. 그렇기 때문에 20세기 초, 인류는 오히려 더 큰 갈망을 지니게 되었다. 이 갈망에 부흥하기 위해 인류는 다양한 논의를 전개하기 시작했다.
- 호르크하이머의 상황 진단

호르크하이머는 시민사회 안의 정치적 공론장이 타락하고 무기력해진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의사소통 행위'에 주목했고, 아도르노는 철학이 하지 못하는 일을 예술이 한다고 생각하면서 '예술'에 주목했다. 이렇게 복잡한 상황 속에서 <사회의 경제적인 삶, 개인의 심리적 발전, 문화적 영역에서의 변화> 이 세 가지의 상관관계를 묻는 관점이 형성되고 힘을 발휘하게 되었다. 이러한 세 가지 경향의 결합은 '변증법'이라는 개념으로 정식화되어 이론 구성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


[계몽의 변증법]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함께 쓴 책이다. 이 책은 '인류가 왜 이처럼 비극적인 타락에 빠져들었는가'라는 물음에 답하고, 이와 동시에 타락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기 위해 집필되었다.

문명은 실패했다.

저자들은 이 책에서 문명의 진보는 신화와 계몽주의의 변증법적 관계라고 설명한다. 최고의 자연지배에 도달한 인간이 다시 자연 속으로 몰락해가는 변증법적 과정에 있다는 말이다. 보통 '계몽'이라 함은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간다라는 긍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하지만 저자들에게 '계몽'은 인류 문명을 타락으로 빠트리는 원흉이었다.

어떤 맥락에서 계몽은 문명을 타락시키는 주범으로 쓰이고, 어떤 맥락에서는 자기 자각이 된 계몽의 의미에서 사용된다. 독자는 문맥을 보면서 계몽의 의미를 파악하는 수밖에 없다. - [계몽의 변증법]

또한 저자들은 현대문명을 타락시킨 주범으로 '논리'를 꼽았고, '논리'를 비판하려는 책의 집필 의도에 맞게 [계몽의 변증법]의 구조를 일부러 논리적이지 않게 구성했다.


아도르노의 예술론

테오도어 루트비히 비젠그룬트 아도르노(Theodor Sudwig Wiesengrund Adorno, 1903 ~ 1969) 독일

아도르노의 예술론은 인식과 의지의 관계를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변환시켰다.

철학이 하지 못하는 일을 예술이 수행한다.

아도르노 예술론의 제 1조목이다. 기본적으로 쾌와 관련되지만 철학적 인식의 한계를 설명하는 문장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철학적 인식으로 진리에 이르지는 못한다. 돈이 곧 진리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개념의 한계에서 비롯되는 무능력이다. 반면 자본주의 자체는 '계몽'이라는 약속된 행복이 닿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한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했지만 알고 보니 잡히지 않는 신기루인 경우처럼 말이다.


철학과 예술은 연대해야 한다.

오늘날 계몽과 행복은 서로 밀어내면서 제각기 고립되어가고 있다. 또한 계몽은 도구처럼만 사용되고 사람들은 불행을 교정할 의지조차 지니지 않게 되었다. 계몽의 목적은 행복의 실현이고 이를 위해 예술과 철학은 서로 연대해야만 한다. 아도르노의 이론적 작업은 이 연대의 필연성을 논하는 것이었다.

왜 연대해야 할까?

우리가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활동성이 개념의 한계를 넘어서까지 진행되어야 한다. 아도르노는 그렇기 때문에 가상의 세계가 새로 열려야 하고, 이 가상세계는 보편성을 담보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아도르노에 따르면 예술로 가상의 세계가 열린다고 하더라도, 이 과정을 철학이 주도하지 않으면 가상의 세계는 한갓 거짓일 뿐이다. 이것이 바로 철학과 예술이 연대해야 하는 이유이다.


우리는 민주주의 사회에 살지만 '욕망의 민주화'를 어디까지 허용해야 할지에 대해 딱 잘라 말할 수 있지 않다. 욕구에 대해서도 철학적 성찰이 요청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아도르노는 진정한 쾌란 진리와 함께 갈 때만 가능하다고 확언했다. 아도르노의 미학 이론은 우리에게 새로운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이론구성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를 가진다.

매거진의 이전글 예술작품의 진리는 해석자의 지평에 의해 변화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