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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도르노 Feb 07. 2023

혼란의 위진남북조, '개인'을 주목하다.

220~589 (삼국 - 서진 - 5호 16국 - 남북조)

535~560 시기 분할된 중국의 영토

위진남북조 시대는 후한이 멸망한 이후부터 수나라가 다시 통일할 때까지 약 370년간의 시기를 말한다. 수백 년간 분열되었던 이 때는 '중국의 흑역사'라고 할 만큼 분열과 전란이 이어진 시대였고, 우리의 고구려가 전성기를 누린 시기이기도 하다. 이전까지의 중국은 "우리 부족을 위해! 단체를 위해!"라고 생각하는 분위기가 강했지만 혼란한 시기를 겪으며 비관적이고 소극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이런 복잡한 상황에서 나라를 다스려야 하는 지식인들은 불안정한 정치상황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때의 논의는 크게 '귀유론'과 '귀무론'으로 나뉜다.

귀유론貴有論 : 법령을 늘리고 엄격히 시행해야 혼란이 안정될 수 있다.

귀무론貴無論  : 엄격하고 과다하게 법을 지키게 하면 결국 더 많은 범법을 야기할 뿐이다. 아무 작용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지켜지는 이상적인 법이 좋다. (무위지론無爲之法)

또한 복잡한 상황에 힘들었던 사람들은 더 이상 단체가 아닌 '개인'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예술 역시 개인을 표현하는 예술이 자각되기 시작했고, 미와 예술에 대한 인식 역시 사회적 실용성으로부터 개인적 감상으로 옮겨졌다. 개인이 예술과 관련되는 데에는 네 가지 매개가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1. 신

이 시기는 무가 곧 궁극이었다. 그리고 궁극으로 나아갈 수 있는 개채의 내면으로 '신'을 주목했다. 이때의 무란 텅 비어있다는 뜻이 아니라 왕필의 '이무위용'과 같은 의미였다.

이무위용(以無爲用) : 무는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유에 의지해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때 무는 변화하는 상황인 유의 보편원리로써 기능한다

음악을 예시로 들어보자. 우리 머릿속에 떠오른 형체 없는 음악은 연필이라는 도구에 의지해 악보로 모습을 드러낸다. 이때 음악이 곧 무無이고 연필이 유有이다. '음악'이라고 하는 궁극이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결국 유에 의지해 형체로서 드러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신은 형으로 드러난다는 세계의 원리가 성립된다. 사람들은 이러한 원리에 따라 신을 외적으로 표현했고 그 작품을 감상하고 즐겼다.  


왕필王弼(226 ~ 249)

왕필의 이무위용

왕필은 귀무론을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세계를 확실하게 경영하기 위해 "모든 상황은 원칙을 가지며, 이 원칙은 유일하다."라는 전제를 설정한다. 그리고 이 원칙은 무형무명, 즉 감각과 추론으로 인식할 수 없다. 이때의 무는 마찬가지로 무형무명을 압축한 궁극적 원리를 지시하는 말로 쓰인다. 또한 왕필은 '이무위용'의 명제로 유와 무의 사상적 관계(무는 유에 의해 모습을 드러낸다)를 현실 경영의 근본으로 삼으면 말단(현실)은 힘쓰지 않아도 저절로 갖추어진다고 말한다.



2. 언어

당시에 예술에 대한 고민이 한 가지 있었다.

무형무명한 도道를 유형유명한 언어가 잘 전달할 수 있을까?

이 문제의식은 '도를 어떻게 언어나 형상으로 잘 표현할 수 있을까?'라는 논의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 문제를 이야기한 주요 사상서는 [장자]와 [주역]이 있다.

[장자] : 언어가 도를 전달할 수 있다는 것에 회의적인 입장

[주역] : 반대로 긍정적인 입장


왕필의 언어관

왕필은 상반된 두 언어관의 종합을 시도했다. 언어 사용에 관해 현실 속에서 최선의 가능성을 찾으려 했다. 이러한 태도는 현실에서 궁극을, 유에서 무를 내재시키려는 신념과 일치한다. 이러한 언어관은 현실의 언어와 형상을 수단으로 하는 예술 역시 궁극에 접근할 수 있다는 암시를 주었다.


3. 품평

 학창 시절 반장선거를 생각해 보자. 내가 뽑고 싶은 반장은 무조건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리 반을 잘 이끌 수 있을 것 같은 착한 사람이나 유쾌한 사람을 뽑았을 것이다. 하지만 위진남북조 시기에는 공부만 잘하면 반장이 될 수 있었다. 재주만을 보고 인품은 따로 평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등용 방식으로 인해 인성이 안 좋은 사람이 너무 많았는지 올바른 인물품평이 과제로 대두되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사람이 착한지 나쁜지 명확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물을 품평하기 위한 객관적인 기준을 마련하기 위한 탐색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법인데 '좋은 사람'을 결정하기 위한 기준을 마련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논의가 전개되었지만 결국 인물품평의 객관적 기준을 마련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이 실패의 영향으로 미에 대한 판단이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주관판단으로 변질되었다. 그리고 인물의 개성을 긍정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자연과 인간이 공유하는 신은 더 이상 탐구의 대상이 아닌 관조와 완미(관찰과 음미)의 대상이 되었으며, 인물품평론의 영향을 받아 각 예술 작품을 비교하고 분석할 수 있는 고도의 안목이 필요하다는 점을 공유했다는 것도 큰 의미를 가진다.


4. 개성

미의 판단이 주관적인 것으로 전이되면서 개성을 갖춘 신이 주목받게 되었다.

세설신어世說新語 (7~8세기)

[세설신어] : 후한 말부터 동진까지의 문인학자, 승려 등의 일화를 모은 책.

세설신어에는 신자, 신모, 정신, 신명 등 신을 포함한 단어가 인물의 훌륭함 여부의 기준이 된 예가 많다. 이렇게 다양한 모습의 신을 존중하는 것은 바로 개성을 존중한다는 의미가 된다. 이 시기의 지식인들이 신의 다양한 모습에 대한 표현과 관조를 통해서 개인적 자아를 풍요롭게 하고 외부로 표현한 것이다. [세설신어]에서 엿볼 수 있듯이 당시 사람들이 자각한 개성은 예술작품에서도 모습을 드러냈다.


이처럼 위진남북조 시기에는 '개인'이 주목되기 시작했다. 중국 역사에서 윤리 사상으로부터 독립된 활동영역이 설정된 논의는 이때가 처음이었다. 이러한 변화를 시작으로 위진남북조 예술론 역시 예술의 자율성을 주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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