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대 미학사상(1)
100년도 채 안 되는 원나라 시기는 중국인들에겐 기억하기 싫은 치욕의 역사이기도 하다. 몽골이 중국을 지배하고 통치하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지배를 받게 되면서 생긴 가장 큰 변화는 과거제 폐지였다. 그 덕분에 중국 지배세력이었던 한인 사대부들은 지배계층에서 배제되게 되었는데, 도덕을 널리 펴면서 세계로 뻗어나가도록 나라를 다스리는 것만이 인생의 목적이었던 이들은 모든 것을 잃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가족들도 제쳐놓고 목적을 위해 일하던 지배층들은 단순한 정치권력 상실을 넘어서 인생의 목적과 가치까지도 상실해 버린 것이다.
권력을 잃은 이들은 ‘도의 수호’라는 사명을 뼛속까지 새기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보다는 도덕과 문화를 선택하게 되었다. 개인적으로는 궁지에 몰린 끝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방법이 아닐까 하지만, 이 선택 덕분에 문화 활동이 자기완성에 필수적인 요소가 되었고 전통문화를 탐구하고 계승하는 것이 사대부의 중요한 임무가 되었다. 이유가 어쨌든 결과적으로 개인의 순수성과 정신적 존엄성을 추구하게 된 것이다.
원나라의 시가 이론은 바로 전 시기인 송대 시가이론의 연장이다. 송나라 말의 사람들은 시를 매우 경시하게 되었고 시를 짓는 사람들이 매우 드물게 되었는데, 남송이 망하고 과거를 볼 나라가 없어진 것이 그 시작이었다.
과거를 보기 위해 시를 쓰던 사람들은 그 기능을 사용할 곳을 찾지 못했고, 아쉬운 대로 바닷가나 산꼭대기 같은 곳에 가서 시를 짓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중국에서 가장 강조했던 것은 '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대로 만들어진 시는 감정만을 담고 있게 되었다. 또한 시에 뜻이 아닌 감정만 담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은 공부를 하지 않아도 시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 된다. 결국 자기가 시인이라고 주장하면 시인이 되는 그런 상황까지 이르렀고 아무나 시인이 되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시를 경시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도가 중요하지 않게 된 시인들은 시의 겉모습을 꾸미는 것에 더 집중하기 시작했고, 언어적 기교와 형식미를 중시하게 되었다.
북송 말에 강한 영향을 가졌던 ‘강서시파’가 남송 말기에 다시 등장한다. 강서시파는 너무나도 형식주의적이었으며 시풍은 난삽하고 생경해서 시의 흥취를 느낄 수 없게 하고, 현실의 반영이 부족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현재 우리가 읽는 책들이 이랬다면, 그러니까 멋져 보이는 단어들만 나열한 글이 작품이라며 소개되고 있다면 어떤 반응이었을까? 아무래도 인터넷상에서 싸움이 일어나지 않을까? 이때도 마찬가지였다. 강서시파처럼 형식미를 중시하던 시풍과 진실한 감정의 표출을 중시했던 소식의 미학사상이 부딪히면서 많은 논쟁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종당’을 주장하게 되면서 ‘종당득고’의 기풍이 형성되었다.
종당득고 ( 宗 근본 종 / 唐 당나라 당 / 得 얻을 득 / 古 옛 고 ) : 당나라가 근본이다.
나라가 새로 건국되면 보통 바로 직전 시기의 사상과 문화들을 이어받게 되는데, 원대 사람들은 바로 이전시대인 송나라가 아니라 더 이전인 당나라가 근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종당득고 기풍은 시를 경시했던 송에 대한 비판과 반성을 통해 형성됐고, 때문에 원초의 문인들은 다른 세력에 나라가 망해가는 이 고통 속에서도 문도(글의 도) 그리고 시도의 정통인 고법古法을 회복하기 위해서 노력하게 되었다. 원대 시가는 언어적 수사 기교를 강조하던 강서시파에 대한 비판을 통해 개인의 체험과 인격, 내면적 심성의 표현이라는 새로운 미적 기준을 제시하게 되었다.
다시 남송 말기로 돌아가보자. 지금까지의 글쓰기는 관료사회로의 진출 수단이었다면 신분이 낮아진 지식인들이 생계를 위해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시인들은 전문직 기술자가 되었다. 지식인들이 민간인들을 상대로 글을 쓰게 되면서 옛날 문화와 당시 현대 문화가 상호 융합하게 되었고, 새로운 문학장르가 탄생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곡(곡조)이다. 배우가 노래하고, 대사를 말하고, 연기를 한다. 이 세 가지를 통합한 중국식 오페라를 원곡(원잡극)이라고 하는데, 이것이야말로 몽골왕조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특수상황에서 성숙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무대에 대한 이론도 등장하고 음향서와 희곡이론서도 등장할 만큼 상당히 활발하게 창작되고 수용되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많이 만들어진 것에 비해서 이론적인 성과는 크게 얻지 못했다. 아무래도 몽골에 지배받던 시대이기도 하고 100년도 채 안 되는 짧은 나라였다 보니 창작이 축적되고 나서 되돌아보고 반성하고 성찰할 시간이 부족했던 듯하다. 음향서와 희곡이론서에 관한 내용은 다음 글에서 다뤄보도록 하겠다.
그(조맹부)는 회화이론에서 ‘고의(古意)‘를 표방했다. 고의란 옛것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으로 송을 기억하겠다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는 그림에 있어 ‘고의가 없으면 공교하더라도 이로울 것이 없다.‘라고 말하였다.
출처 : 아람미술관 블로그
https://m.blog.naver.com/aramart1/221131595724
원대에는 도화원이 폐지되었다. 그림을 위한 정부 부처가 사라지다 보니 그림에 대한 국가의 간섭이 없어지게 되었다. 관섭이 없어지니 더 자유롭게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문인계층은 회화 창작뿐만 아니라 비평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림에서도 창작이 더 이상 벼슬을 얻는 수단이 아니라 순전히 즐기기 위한 개인적인 행위가 된 것이다. 원대의 회화 역시 큰 맥락에서 보면 송 회화의 결과이다. 하지만 원대 화가들은 전통을 묵수하지 않고 그 위에 새로운 의와 격을 창조했다. 원대 화가 대다수는 개인적인 인생관과 정감을 가지고 예술세계를 추구했다. 벼슬을 얻는 수단이라는 틀에서 벗어나니 명성을 획득하기 위한 예술이 아닌 진정한 심성 도야를 위한 창작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원대의 미술은 시대의 격랑에 초연하게 참되고 영원한 것을 지향하려던 문인들의 이상을 반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