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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도르노 Mar 21. 2023

소식과 주희, 도와 글의 기싸움

송나라 예술론(3)

송나라의 예술론을 이야기하는 첫 번째 글에서 이미 소식을 소개한 바 있다. 구양수에 의해 발탁된 이들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소식은, 전통적이면서도 노장(노자와 장자) 사상과 불교의 이념까지도 자유롭게 수용하는 다원적이고 개방적인 태도를 가졌다. 오늘의 글에서는 이러한 태도가 그대로 반영된 소식의 문예이론과 함께, 소식의 이론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고 ‘문이재도(문장을 통해 이치를 담는다.)’의 가치를 재확인한 주희의 주장을 살펴보려 한다.


소식


소식蘇軾(1037~1101) 중국 북송의 시인, 문장가
도는 이르게 할 수는 있지만 구할 수는 없는 것이다.

고문운동의 영향을 받았던 이들에게 ‘도’라는 것은 수양하고 돈독하게 쌓을 수 있는 것이었고 글은 도를 담아 전달하는 도구였다. 하지만 위와 같은 소식의 주장에 의한다면 도는 애초에 학습으로 쌓을 수 없는 것이 된다. 소식은 도가 개인의 경험을 통해서 간접적이고 주관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독서와 강연을 통해 단계를 밟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구속되지 않은 자유로움으로 자연스럽게 도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글은 반드시 도와 함께 갖추어 가는 것이다. 구하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표현되는 경지에 이르러야 하는 것이다.

말에 수식을 하지 않는다면 그 언어는 멀리까지 행하여지지 않을 것이다. -공자

소식은 공자의 말에 근거해서 글은 단지 생각을 전달하는 수단일 뿐이라는 말에 이의를 제기했고, 형식미의 가치에 의미를 부여했다. 하지만 소식이 강조하는 문체의 형식미는 화려하기만 할 뿐인 언어의 나열이 아니다. 마치 위대한 예술가가 그동안 훈련하며 체득한 기술들을 숨 쉬듯 자연스럽게 작품에 적용하는 것처럼, 고도로 세련된 기교와 정신세계의 노숙함이 어우러진 경지를 일컫는다. 따라서 일정하게 고정된 틀 속에서 창작의 자유로움이 구속된 상태는 참된 도와 글의 경지와는 거리가 멀다.


주희


주희朱熹(1130~1200) 중국 남송의 유학자
오늘날 사람들이 지은 글은 모두 글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다.
(그들은) 대체로 오로지 글자를 생략하는 데 힘쓰며 또 쉽사리 편벽한 말을 새롭게 여겨 좋아한다.

주희는 주돈이, 정이와 함께 ‘도학(道學)파’(도를 우선시하고 글을 다음으로 여김)라고 칭하는 그룹에 속한다. 도는 구할 수 없다던 소식의 의견과는 반대로 체계적인 방법을 통해 조금이나마 도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주희는 유가 도통(도학을 전하는 계통)의 부활을 평생의 과업으로 삼았는데, 주희의 입장에서 소식은 유가가 지향하는 극기(감정이나 충동을 이성적 의지로 눌러 이김)와 덕의 가치와는 거리가 있었다. 주희는 구양수와 소식의 작품이 당대에 큰 설득력과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고, 구양수의 글은 때때로 도와 가까우며 헛된 말을 만들지는 않는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주희가 보기에 구양수와 소식은 문인이 되려고 애쓰는 사람이었다. 그들이 학문을 할 때는 단지 고대와 근대 왕조들의 흥망성쇠의 원인들을 찾고 있을 뿐 자신을 수양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매일매일 시를 읊조리며 술을 마시고 농담을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냈을 뿐이다. -소식[주자어류]

주희는 소식의 글을 읽을 때 그것을 즐기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뿐, 금방 싫증나 책을 끝까지 읽지 못하고 그만두게 된다고 말한다. 주희에게는 글을 읽고 쓸 때 어떻게 도를 자각할지 글에 어떤 깊은 뜻이 담겨있을지가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소식의 글이 지닌 독특한 형식미가 주는 즐거움 때문이었을까. 당시는 그 형식미를 따르는 문예가 유행이었는데 주희는 이것이 불만이었다. 꾸밈만을 추구할 경우 생기는 부정적인 영향을 더 우려했던 것이다.

그은 모두 도에서 유출되어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 그이 도리어 도를 관통할 수 있는 이치가 있겠는가? 글은 글이고 도는 도인 것이다. -소식[주자어류]


당신은 누구의 편에 서고 싶은가? ‘도’라는 궁극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주희가 되겠고, ‘재미 혹은 아름다움’을 생각한다면 소식을 선택하고 싶을 것이다. 재미있는 부분은 이런 각자의 시선이 학문에도 적용된다는 점이다. 철학사의 입장에서는 소식이 철학이론에 부정적 역할을 했을 것이고, 예술사의 입장에서는 작품 고유의 미적 가치를 희생시킨 주희가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쪽에 서있던 도의 자각이라는 이념 하나와 그 이념을 현실생활에서 실천하는 과정에서 생긴 도와 문의 긴장이 송대의 활발한 문화향유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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