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나라 예술론(2)
당신은 담백하고 깔끔한 글을 좋아하는가, 화려한 단어로 꾸며져 있는 글을 좋아하는가? 사실 이에 대한 논의는 당나라 시대에서부터 계속되어 왔다. 형식에 치우쳐 알맹이 없는 글이 많아지는 것을 인식한 문인들이 이를 바로잡고자 했고, 이를 고문운동이라고 칭한다. ‘담백하고 간결한 글을 짓고자 하는 운동’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겠다. 하지만 당나라 사람들은 이미 꾸며져 있는 글에 익숙했던지라 고문운동으로 완벽히 문체를 변화시킬 수는 없었고, 형식미가 담긴 화려한 글은 더욱더 성행하게 되었다.
이어서 오대십국의 혼란기를 거치고 송나라가 건국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겠지만 송대의 가장 큰 업적은 성리학의 성립이다. 성리학의 근간인 유교사상은 뜻을 소홀히 하고 문자를 장식하기만 한 글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담백하고 깔끔한 글을 위한 고문운동이 다시 주목되었고, ’고문운동파vs형식미파‘의 다소 극단적인 대립구도가 형성된 것이다. 오늘의 글에서는 전통적인 문예론을 유지하고자 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문이재도(文以載道)
문장을 통해 이치를 담는다.
(이는) 군자가 학문하는 것은 말로써 일을 기록하고 문채로써 말을 수식하며 일이 말과 문채에 맡겨져 후세에 (그 뜻한 바를) 전하여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 구양수[구양문충공문집]
구양수는 고문운동을 다시 주도하고 주목할만한 결실을 맺은 인물이다. 그는 그 시대의 최고 문인이었고 과거를 관장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구양수는 이론뿐만 아니라 본인이 직접 글이나 시를 지으며 순박한 고문의 아름다움을 증명했고, 글의 형식이 가져다주는 효과와 심미적 가치 또한 가벼이 여기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의 문학론에 동의하던 아니던 모두가 그의 문학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구양수는 과거시험을 관장하며 소박하고 간결한 글로 답안을 쓴 사람들만 뽑고 알맹이 없이 화려하거나 잘 쓰이지 않는 특이한 표현에만 힘쓴 글들은 모두 낙제시켰다. 앞선 글에서 살펴본 왕안석과 소식도 구양수의 이러한 방침에 의해 뽑힌 사람들이었다.
주돈이는 성리학의 기초를 닦은 장본인이다. 그는 문예와 도의 관계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문장은 도를 싣는 수단이다. 바퀴와 끌채를 아무리 잘 꾸며도 사람들이 그것을 쓰지 않으면, 단지 헛된 꾸밈일 뿐이다. … 문사는 재주이고 도와 덕은 실다운 것이다. 그 실다움을 돈독하게 쌓으면, 문장의 재주가 있는 자가 그것을 글로 쓴다. … 도와 덕에 힘쓸 줄 모르고 다만 문장과 말만을 능력으로 삼는 것은 단지 실다움이 없는 재주일 뿐이다. - 주돈이 [통서]
글을 지으려면 도를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도와 덕을 돈독하게 쌓으면 문장의 재주가 있는 사람이 글로 쓴다는 것을 보아하니 글의 형식적 측면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지는 않는 것 같다.
정이는 주돈이의 제자였는데, 주돈이에 비해 굉장히 극단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시란 배울 만한 것입니까?“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꽃 사이를 지나는 나비들 보일 듯 말 듯 보이고, 물을 스치는 잠자리는 느릿느릿 나는구나’라는 구절같이 한가한 말들을 해서 무엇을 하겠는가? 그래서 나는 시를 짓지 않는다. - 정이[유서]
“글을 짓는 것이 도에 해롭습니까?”라는 질문에 단호히 “해롭다”라고 답할 만큼 글보다는 도를 매우 중시하고 있다.
이렇듯 송대는 고문운동의 이념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사대부들의 다양한 예술론과 활발한 창작활동이 고양되었던 시기였다. 이 시기 단연코 가장 위대한 업적은 성리학의 탄생이지만, 미학과 예술 분야로 범위를 좁혀보면 성리학의 성립에 견줄만큼 큰 흐름임에는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