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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도르노 Mar 07. 2023

왕안석과 소식, 전체주의와 다원주의

송나라 예술론 (1)

(왼) 북송 960~1127 (오) 남송 1127~1279 ㅣ 송나라는 북송과 남송으로 나뉘는데, 이는 시기적 구분이다.

중국 사상의 새로운 기반이 된 송

당나라가 멸망한 후, '오대십국'이라고 칭해지는 시기가 있었다. 위진남북조의 혼란기를 지나 당나라로 하나가 되는 듯싶더니, 또다시 5개의 왕조와 10개의 지방으로 나누어진 것이다. 하지만 약 70년 만에 통일을 이루어낸 송나라 덕분에 분열은 종식됐고, 사람들은 이제 '나'가 아닌 '우리'. 즉 하나 된 송나라 전체를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 덕분인지 북송에서 남송으로 넘어가는 송대 300년은 국가 방위와 외교에는 취약했다는 평을 받지만, 사상, 예술, 기술 등 여러방면에서는 절정을 맞이했다는 평을 받는다.


사대부들이 맞이한 다른 가능성

간신히 다시 전체를 바라볼 수 있게 된 이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논의점은 "'전체'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문제였다.

전체로서의 세계가 어떻게 인간에게 인식될 수 있을까?

예술과 문화는 어떻게 전체와 관계될 수 있을까?

이 전체라는 것이 어떻게 우리(사대부)의 기반을 잡는데 효과적일까?

이미 안정된 한 나라에 소속되어 살고 있는 우리가 보기엔 별거 아닌 이야깃거리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혼란한 시기를 견디고 겨우겨우 하나로 뭉쳤던 당시였기 때문에, 나라가 다시 분열되지 않기 위한 매우 중요한 논의사항이었을 것이다.


나라가 분열되지 않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당시 사대부들은 지배층인 자신들의 기반을 잡는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던것 같다. 송대 사대부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보편적인 기준은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어떻게 사대부를 규정할 것인가'가 더 중요한 시기였다. 다양한 사상가들이 논의를 전개했지만, 명확한 자기 정체성에 대한 논의라기보다는 사대부의 이상이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치열한 논쟁이었다. 오늘의 글에서는 사대부 일반의 정체성 문제에 골몰했던 대표적인 두 인물들을 살펴보며 송나라 예술론에 대해 알아가 볼 것이다.


북송시기의 예술의 위치

먼저 이 시기에 각 예술이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 알아볼 것이다. 혼란했던 시대에 예술이 외면당했는지, 혹은 더 주목받았는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지나왔던 중국의 많은 나라들의 사대부들은 자신들의 지배적 위치를 확고히 하기 위해 시, 서, 화를 활용했던 것처럼, 마찬가지로 갓 건국된 송나라시기의 사대부들도 시, 서, 화를 이용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했다.

<시>

시는 이미 당나라 시대에도 사대부 문화의 필수교양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북송대에 시를 쓰고, 감상하는 것만으로 사대부로서의 정체성을 확보한 인물은 전무하다. 게다가 시를 과거시험과목에서 제외시키려 하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에서 엿볼 수 있듯이 시가 사대부의 필수 조건이라는 이념은 도전받았을 것이다.

<회화>

송대 회화 관련 전문서적들에 회화가 시와 서예의 불완전함을 보충할 수 있고, 명화를 그리기 위해서는 교양과 인격이 갖추어져야 한다는 논리가 발견되었다. 하지만 회화는 기술의 한 종류로 분류되고 있었고, 궁정 화가들이 기술관 혹은 잡류로 분류되어 승진이 금지되기도 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회화는 오히려 시보다 더 불안정한 위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회화의 지위를 상승시키기 위해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통상 전문 화가는 사대부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사대부들은 고가의 서예와 회화 작품을 구매하고 별도의 창고를 제작하기도 했다. 이는 회화의 제작과 회화의 감상이 각자 다른 위치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왕안석과 소식

왕안석과 소식은 북송대의 대표적인 사상가이다. 이들 역시 사대부를 규정하기 위한 각자의 입장이 있었는데 왕안석은 전체주의적 경향, 소식은 다원주의적 경향으로 큰 입장차이를 보인다.

왕안석

왕안석(王安石 1021 ~ 1086) 중국 송나라의 시인이자 개혁 정치가
세상 만물은 지극한 이치를 갖고 있지 않은 것이 없다. 그 이치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자가 곧 성인이다. 이치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방법은 바로 ‘하나(총체)’를 터득하는 데 있다. - 임천선생문집臨川先生文集(왕안석)

왕안석의 사상을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핵심 개념은 세 가지이다.

하나 혹은 총체적 정합성 및 단일성

쓰임, 유용성, 혹은 실천가능성

실천의 의무 혹은 능동적 행동주의

왕안석은 인간 행위들에 대한 독립적 가치 혹은 예술행위에 대한 고유한 가치를 인정하지 않았다. 전체와 그것을 구성하는 개별적 행위가 실천이라는 적용의 과정을 통해 그 정합성이 얼마나 완전한지 재검증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알록달록한 그림 ㅣ 출처 픽사베이

예를 들어 알록달록한 하나의 그림을 완성한다고 생각해 보자. 그 그림은 다양한 색깔로 구성되어 있을 것이다. 여기서 그림이 전체이고 색깔이 개별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 전체인 그림이 얼마나 정합한지 검증받기 위해서는 ‘그린다’라는 실천 과정을 반드시 통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정합성의 기준은 '얼마나 유용한지'이며, 왕안석의 세 가지 핵심개념은 이러한 의미에서 이해할 수 있다.


소식

소식(蘇軾, 1037 ~ 1101) 중국 북송시대의 시인이자 정치가
문화가 지금처럼 쇠퇴한 적이 없었다. ... 공자조차도 사람들을 똑같게 할 수 없었다. 안연의 어짊과 자로의 용맹은 서로 대체될 수 없는 것이다. -소식

소식은 문화창조의 작업이 일관된 것이 아니라, 다양성 그 자체에 기반해서 그 가치를 보장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각각의 문화행위는 대체 불가능한 독립적 역사와 고유한 가치를 내포한다. 이런 의미에서 소식의 사상은 다원주의적이다. 소식에게 ‘하나’는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주체성을 보존하고 있는 "한결같은"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마음이 주체성을 보존하고 있다면 사물이 다가올 때 적절하게 반응할 수 있다. 개별자들의 다양성은 자신의 고유한 가치를 잃지 않고 전체 안에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소식에게 도를 이루는 과정이 바로 독립성 자체가 구현되는 과정이다. 여기서 도를 구현한다는 것은 정합적인 전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 서로 모순이나 충돌 없이 공존하면서 일정한 지속성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편견과 얽매임 없이 대상과 관계 맺는 것을 사대부의 이상으로 제시했다. 독립적인 가치와 원리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지식인들 뿐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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