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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ella Aug 22. 2023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었다

노르웨이의 숲

대학교 2학년 때 이후 처음이니, 약 5년 만이다. 아직도 사회적으로는 젊은 나이이지만 성인이 된 후 아이 하나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도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을 만큼 시간이 흘렀다. 20대 초반의 기억들이 아픈 상처를 하나하나 파헤치는 시간이었다면 20대 중반은 갈피를 잡지 못해 이리저리 흔들리며 방황하고 세상을 향한 원망을 곱절은 쏟아내던 시기였다. 후반에 접어든 지금은 그런 원망보다는, 미래에 대한 막연한 걱정보다는, 내 앞의 일을 우선으로 두는 태도를 배웠다.


그래서 그런지, '노르웨이의 숲'을 읽고도 예전처럼 주인공의 심정에 마음이 동해서 아프기보다는 와타나베가 느꼈을 청소년기 친구의 자살, 스무 살 남짓한 시기 느꼈을 사랑하는 사람의 자살이 측은하게 느껴진다. 마음의 초점이 '자살 당사자'가 아닌 '자살 생존자'에게로 옮겨간 것이다. 어찌 되었든, 사람은 미래를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고 언제까지고 과거의 기억이 매달려 있을 수는 없으니까.


기침이 꽤 길었다. 학생들의 여름방학은 강사에게는 가장 바쁜 시기이기 때문에 하루도 빠짐없이 일정이 잡혔다. 수업이 조금 덜 잡힌 날이면 무조건 설명회를 나갔고 짬짬이 남는 시간에는 입시 컨설팅을 했다. 하루하루 기침이 심해지더니 어느 날 뚝.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입을 열어서 벙긋거리는데도 나오는 것은 신음과 같은 작은 속삭임뿐이었다. '이번 주만 끝나면 쉬어야지.' 벼르고 있었는데 딱 그 마지막 날, 마지막 상담을 끝으로 목소리가 멈춰버린 것이다. 그동안 약도 챙겨 먹고 병원에 가서 매일매일 주사도 맞았는데 소용이 없었다.


어쩔 수 없지 뭐. 쉬어야지.


핸드폰을 꺼내어 그나마 운전해서 갈 수 있는 거리의, 사람이 없는 숙소를 찾았다. 호텔은 양 옆과 위아래로 다른 사람이 있기에 그런 곳에는 가고 싶지 않았다. 강제로 침묵 속에 빠져드는 지금, 침묵을 더 완벽하게 만들어 줄 공간이 찾고 싶었다.


'숲 속의 작은 성'

안면도의 수목원 바로 옆에 위치한 곳. 솔숲 사이로 예쁘게 지어진 숙소에 닿은 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기를 조금 구워 먹고, 전자책을 꺼내어 미리부터 읽어보겠노라 다짐해 두었던 '노르웨이의 숲'을 읽었을 뿐이다. 


기침은 쉬이 잦아들지를 않았다. 밤새 거의 한숨도 자지 못했다. 내 몸을 소중히 여기지 않은 대가를 혹독히 치르는 밤이었다. 새벽 6시가 되어 잠드는 것을 포기하고 바깥으로 나와 읽던 책을 다시 꺼내 들었다. 세상은 새소리와, 벌레소리와, 누군가 조기축구를 하는 즐거운 웃음소리로 가득 차 있었고 그 속에서 다시 책에 빠져드는 시간이었다. 


밝아오는 하늘, 아름다운 풍경과 다르게 책 속의 세상은 지독하리만큼 아픔으로 가득한 곳이었다. 언젠가 '노르웨이의 숲'이 일본 경제는 활황기였지만 대내외적 상황은 혼란스럽던 상황을, 그리고 당시 젊은이들의 상실감을 잘 그려낸 역작이라는, 어느 비평가의 기록을 읽었던 기억이 났다. 그래서 예전 번역판의 제목은 '상실의 시대' 였을까. 


스물한 살 남짓의 내가 봤던 주인공은 열렬한 사랑을 하고,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해 방황하고, 자살한 친구의 잔흔과 사랑하는 두 여인 사이에서 방황하는 '상실자'였다. 그런데 20대 후반인 내가 보는 그의 모습은 사뭇 다르다. 아직 제대로 익지 못한 마음을 끌어안고 하루하루 자신을 지켜나가기 위해, 자신이 세운 세계를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 애쓰지만 세계가 무너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개척자'였다. 


그에 대한 나의 평가가 바뀐 것을 단순히 문학을 더 많이 공부했고, 스물한 살 때보다 시대적 배경을 잘 이해했기 때문이라고 치부하기는 어렵다. 그저 인생에서 몇 가지 선택을 경험하고 그 속에서 아파하기도 하면서 과거보다 내가 어떤 면에서는 성숙해졌기 때문에, 혹은 어떤 면에서는 무던해졌기 때문에 상대방의 아픔에 절절히 공감하기보다는 그의 태도에서 좋은 점을 찾으려 애쓰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선생님은 '어린 왕자'를 여러 번 곱씹어 읽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시며, 읽을 때마다 책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다르게 다가온다는 말씀을 하셨다. 내게는 '노르웨이의 숲'이 바로 그런 책이 아닐까 한다. 좁디좁은 원룸에서 냉방비 걱정을 하며 책을 읽고 있었던 20대 초반 여름의 나와, 기침을 내뱉으며 숲에 잠겨 책을 읽는 20대 후반 여름의 나는 다르다. 그리고 5년 정도가 더 지나 30대가 된 여름에 이 책을 읽는 나는 또 다르겠지.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을 훨씬 좋아한다. 이 '상실'은 읽는 시기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 읽을 때 내가 주목한 '상실'이 주인공의 정신적 불안정함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면, 이번 '상실'은 주인공이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과거를 상실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으로 읽혔다. 5년 즈음이 지난 후 내게 상실이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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