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tella Feb 02. 2022

살인자의 기억법

어쩌면 내가 살인자와 닮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1. 망각이 이룩하는 축복

인간에게 주어진 최대의 축복은 망각이라고 했다. 과거의 괴로움을 기억하지 않아도 되니, 이 얼마나 편안하고 안온한 축복인가. 대체로 내가 괴로워하는 이유인 과거의 기억들은 ‘망각하지 못함’에서 비롯한 것이 많았다. 그랬기 때문에 나는 자주 괴로웠고 때때로 내 앞을 덮쳐오는 기억의 파도 앞에서 무력하게 서 있고는 했다.


그렇지만, 다시 묻고 싶다.

‘망각은 축복인가?’

 

이 물음에 나는, 명확한 해답을 내놓지 못한다. 선택적으로 내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들이란 분명히 존재하고 그 기억들에서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것이 지배적인 정서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기억들을 없애겠냐고 물었을 때에는 명확하게 ‘그러겠노라.’고 대답할 수가 없다. 현재의 나를 이룩하고 있는 수많은 조각들 중, 그 기억들이 미친 영향이 어느 정도였는지 감히 짐작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2. 알츠하이머 환자. 살인자. 나와의 공통점

흔히 범죄자를 처벌할 때에는 그의 기억에 의존한다. 진술을 통해서 그가 저지른 범죄가 실재하는 것인지를 가늠하고 그것이 타당성 있으며, 증거들 또한 그가 범인임을 지목하고 있다면 그는 비로소 ‘범죄자’가 된다. 그런데 이러한 범죄자가 알츠하이머 환자라면? 혹은 인지능력이 저하되어 있어서 정상적으로 기억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살인자의 기억법’은 이러한 물음에서 촉발된 소설이다. 물론 작가가 실제로 이런 물음을 던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긴밀한 듯 엉성하게 얽혀 있는 문장들 사이로 독자는 살인자의 기억을 찾아나간다. 알츠하이머 환자 김병수의 입장에서 써 내려간 이야기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기억은 어디에선가 꼬여 있고 막혀 있으며 그가 말하는 문장들은 두서없다. 분명히 치밀하게 글을 써 내려가려고 애쓰지만 그 속에는 분명한 빈틈들이 다수 존재한다.


책의 말미에서는 결국에는 그 모든 노력이 망각에서 비롯된 것임이 밝혀진다. 또한 그는 기억이 사라진 사이, 자신이 딸이라고 생각해왔던 누군가를 죽이는 과오도 저지른다. 하지만, 그의 삶은 어떻게 보면, 무언가를 절실히 지키려고 노력한 기록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잃어가는 기억이든, 살인했던 추억이든, 자신이 만들어낸 망상이든 말이다.


내 삶도 일견 그와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분명하게 잊고 싶은 기억들을 간직한 채 살아간다. 하지만 그중 몇몇은 잊으려고 노력해도 잊히지 않는다. 그리고 지우려고 할수록 선명해진다. 책 속의 김병수에게 살인의 추억이 '잊으려고 노력해도 잊히지 않는 것'이었다면 내게는 괴로웠던 과거가 그런 성질의 것이라는 점이 다르다. 하지만 그와 나는 어떤 면에서 닮아 있었다.


나는 종종 삶을 놓아버리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이지만 그럼에도 내 삶을 지키려고 애쓴다. 김병수는 자신이 이룩한 망상 속에서 그 망상을 지키려고 애쓴다. 딸이라 생각했던 요양보호사를 죽여버린 시점에서도, 그는 끝까지 자신이 지키려던 것을 지켰는지 확인하고 또 되확인한다. 어쩌면 내가 지키려고 하는 나의 삶이란 내가 만들어낸 잘 짜인 망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어떻게든 발버둥 치고 있다.


3. 치밀한 문체

나는 이런 류의 소설을 읽으면 작가에게 질투심을 느낀다. 그가 이런 소설을 쓰기 위해 골방에 틀어박혀 지냈을 긴 시간과 길고 길었을 인내의 시간이 있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가지지 못한 류의 재능을 가진 사람을 보면 느끼는 경외감이 질투로 변형된 것이라 하겠다. 절대 알츠하이머를 경험하지 못했을 사람이 어떻게 알츠하이머를 이토록 치밀하게 써내려 갈 수 있었을까? 그중 몇 문장들을 발췌해 아래에 소개한다.

p.17 카그라스 증후군이라는 게 있다. 뇌의 친밀감을 관장하는 부위에 이상이 생길 때 발생하는 질병이다. 이 병에 걸리면 가까운 사람을 알아보기는 하지만 더 이상 친밀감을 느낄 수가 없게 된다. 예컨대 남편은 갑자기 아내를 의심한다. … (중략) … 얼굴도 똑같고 하는 일도 똑같은데 아무래도 남처럼 느껴진다. 낯선 사람으로만 보인다. 결국 이 환자는 낯선 세계에 유배된 것과 같은 기분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비슷한 얼굴의 타인들이 모두 함께 자기를 속이고 있다고 믿는다.

p.52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다는 게 유일한 위안이다. 죽기 전에 바보가 될 테고 내가 누구인지조차 모르게 될 테니까.

p.112 저자는 몰입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게 얼마나 큰 즐거움을 주는지에 대해 강조하고 있었다. 이보게, 저자 양반, 나 어릴 때만 해도 아이가 하나에만 몰입하면 어른들이 걱정을 했다네. 애가 외골수라며. 그때는 오직 미친 사람들만 한 가지에 몰입을 했지. 오래 전의 내가 사람을 죽이는 일에 골몰하며 얼마나 깊이 몰입했는지, 거기에서 얼마나 큰 즐거움을 얻었는지를 당신이 안다면, 몰입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를 안다면, 그 입을 다물 거야. 몰입은 위험한 거야. 그래서 즐거운 거고.

p.126 치매 환자로 산다는 것은 날짜를 잘못 알고 하루 일찍 공항에 도착한 여행자와 같은 것이다. 출발 카운터의 항공사 직원을 만나기 전까지 그는 바위처럼 확고하게 자신이 옳다고 믿는다. 태연하게 카운터로 다가가 여권과 항공권을 내민다. 직원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죄송하지만 하루 일찍 오셨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직원이 잘못 봤다고 생각한다. …(중략)… 이런 일이 매일같이 반복된다. 그는 영원히 ‘제때’에 공항에 도착하지 못한 채 공항 주변을 배회하게 된다. 그는 현재에 갇혀 있는 게 아니라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아닌 그 어떤 곳, ‘적절치 못한 곳’에서 헤맨다. 아무도 그를 이해해주지 않는다. 외로움과 공포가 점증해가는 가운데 그는 이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 아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으로 변해간다.


p.153 ‘살인자의 기억법’에 눈에 띄는 단점이 있다면 이 소설이 ‘너무’ 잘 읽힌다는 것이다. 간결하게 압축된 문장들이 사건의 끝을 향해 단호하게 전진하고, 이 남성적인 문체의 속도가 독자들의 시선을 움켜쥔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70세의 고독한 노인. 그러나 실은 30년 동안 꾸준히 살인을 해오다가 25년 전에 은퇴한 연쇄살인범 김병수가 알츠하이머를 이겨낼 수 있을 것인가.



4. 너무 잘 읽히는 소설

이 책의 단점이라 한다면 내용이 너무나 잘 읽힌다는 것이다. 문학평론가 권희철이 책의 말미에 소개한 것처럼 말이다. 분명 알츠하이머 환자의 입장에서 쓴 소설이고, 작가 또한 책을 쓰는 과정이 괴로울 정도로 더뎠다고 하는데 오랜 시간의 고민을 거쳐 나온 책이기 때문인지 흡입력 있게 빠른 속도로 잘 읽힌다. 이런 글을 보고 잘 쓴 글이라고 하는 것일까.


읽으면서 다시 내 글을 돌아본다. 내 글은 그처럼 잘 읽히는 글이 될 수 있을까.


독자는 책을 읽으면서 그 책과 상호작용한다고 했다. 나의 경우에는 김영하의 소설을 읽으면서 책 속의 살인자에게 몰입하기도 하고, 그의 감정이 전이되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그처럼 복잡하고 지난한 감정의 골을 겪어온 것은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간접적으로 경험하고 내용 속에 깊이 몰입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터널을 지나오고 나면 다시 원래의 나로 돌아와, 다시금 내 글을 돌아보게 된다. 내 글은 이 정도의 흡입력을 지닐 수 있을지. 그리고 내가 느끼는 질투심을 성장의 동력으로 삼을 수 있을지 같은 생각들을 하면서 이렇게 기록해 두는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역사는 소걸음으로 움직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