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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ella May 07. 2022

내가 대기업을 그만둔 이유

신입사원이지만 퇴사했습니다

※ 이 글에는 픽션이 (아주 많이) 가미되어 있습니다

1. 대기업 퇴사, 그 후

나는 얼마 전 대기업을 퇴사했다. 운 좋게도 졸업 전에 취업해 두 곳의 회사를 다녔고 두 곳 모두에서 희망하던 직무로 근무할 수 있었다. 학부 시절 전공을 살려서 일한다는 점은 좋기는 했지만 점점 내가 이 직무를 하면서 얻는 것이 무엇인지 회의감을 느끼게 되었고 회사 다니는 것이 괴로워지기 시작했다. 가장 힘들었던 건 '내부 보고'만을 위한 무의미한 PPT 예쁘게 만들기에 오랜 시간을 할애한다는 점이었다.

대기업에 입사한 후 처음 맡은 업무를 완수하고 나서 결과 보고를 위한 PPT를 만들어야 했는데 PPT 수정에만 꼬박 3주를 할애했다. 나는 그렇게 예쁜 PPT를 만드는 이유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 결과 보고 문서를 외부에 공유하는 것도 아니고, 단순히 임원진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만드는 것이 납득하기 힘들었다. 결국 한 번 보고하고 버려질 보고서였다. 3주의 시간 동안 내가 했던 일은 PPT의 구성 순서를 바꾸는 일, 더 예쁘게 보이기 위해서 글씨체 변경하기, 색깔 바꾸기 등이었다.

대기업의 핵심 부서에서 일하게 되었지만 점점 내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의미를 찾기 어려워졌고 그때부터 퇴사에 대한 생각을 줄곧 해 왔다. 그러다가, 지난 4월 드디어 퇴사를 했고 자유의 몸이 되었다.


2. 대기업에서 느낀 문제점 다섯가지

안타깝게도 직장생활을 하면서 위에 적힌 것들 중 '업무 미부여'를 제외한 모든 것들을 경험했다. 이쯤 되면 내가 문제 있는 인간인가 싶었는데 예전 직장 사람들과는 아직까지 연락하고 잘 지내는 걸 보면 두 번째로 들어갔던 대기업의 문화 자체가 이상했던 것 같기도 하다. 실제로 한 달 상간에 부서의 5분의 1 정도가 퇴사했다. (fiction이 가미된 만큼, 수치에 큰 의미를 두지 않기를 바란다.) 하지만 상부의 누구도 그 문제를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사실, 대기업은 나 같은 일개 신입사원이 어떤 문제의식을 느끼는지와 관련 없이 너무나 잘 굴러가는 집단이다. 그렇게 시스템을 만들어 놓은 것이 대기업이 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거니와, 누군가 하나 빠진다고 해서 기업의 운영에 차질이 생긴다면 그 기업은 '기업으로서 시스템화 되어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하지만 내가 느낀 시스템은 시대의 변화에 너무나 뒤떨어진다는 인상이 강했다. 상명하달식 문화가 만연해 있었고 상사에게 잘 보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일상화 된 집단이었다. 물론 어느 정도의 인간관계 유지는 필요하지만, 그것이 무의미하게 '예쁜 PPT'를 만들면서까지 업무의 효율성을 떨어뜨릴 만큼 가치가 있는 일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래는 내가 느꼈던 대기업 업무의 문제점들.


1) 상사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

 신입사원이 입사한 지 5일차 된 시점에 '맡은 업무에 책임감이 없다'고 욕을 먹더라도 그것이 매우 당연시 되는 사회다. 2년차가 된 지금 시점에서 돌아보면 입사 5일차라면 OJT를 하거나, 하다 못해 업무 인수인계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인수인계 없이 업무를 맡겼다고 해 놓고 책임감을 운운하면서 욕을 한다면 그것을 그대로 다 듣고 있어야 하는 것이 내가 속했던 대기업의 문화였다. 제발 다른 대기업들은 다르기를 바란다.


2) 업무의 성과가 명확히 나오지 않는다

 문과 직무의 고질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명확한 결과물이 나올 가능성이라도 있는 이과 직무와는 다르게, 문과 직무를 맡게 된다면 업무 KPI가 실질적으로 측정될 확률은 매우 낮다. 그렇기 때문에 업무 보고를 하게 되면 상사의 평가에 따라 내 능력이 결정된다. 그나마 어떠한 증거를 가지고 눈앞에 들이대고 이야기할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차라리 나을 텐데, 문과 직무라면 내가 만든 PPT가 얼마나 예쁜가, 상사의 눈에 얼마나 마음에 들었는가에 업무의 KPI가 치중되었다. 이것도 직무 by 직무이지만 내가 경험했던 직무는 그랬다. 그래서 어제까지도 잘 했다고 칭찬받았던 일이 다음날이 되면 갑자기 아주 못한 일이 되는 경우가 다수 있었고 이런 문화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3) 개인의 사생활에 대한 관심이 과하다

 이것도 제발 내가 있었던 특정 대기업의 특정 부서에만 국한되기를 바라는 문제점이다. 첫 번째 회사는 일은 힘들기는 했으나 개인의 사생활로 뒷이야기가 나오지는 않았다. 나는 회사 내에서 친한 사람이 거의 없는 편에 속했는데도 불구하고 누가 얼마짜리 집을 소유하고 있다거나, 다른 부서 사람이 여자친구와 비싼 식당에서 데이트를 했는데 그건 과소비라고 흉을 본다거나, 직원의 인스타그램 내용에 대해서 왈가왈부 하는 것들을 꽤 자주 들었다. 그것도 점심 식사 시간에 말이다.

 예전 회사에선 점심 식사 시간에 업무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거나 최근에 하고 있는 공부가 무엇인지를 이야기하고는 했는데 주요 대화 주제가 '타 팀 사람'이 된다는 게 정말 납득하기 어려웠다. 낯부끄러운 이야기를 들을 때면 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고 이런 점이 큰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4) 보여지는 일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신입사원이기 때문에 내가 잘못 판단했기를 바라는 내용이다. 선배들의 업무를 보면 분명 어떠한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그것을 멋지게 해내는 부분들도 많았다. 그런데 이해가 가지 않았던 점은 '팀 내부의 의사결정을 위해서'도 예쁜 PPT를 만들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도표를 첨부한 word 문서를 활용한다면 훨씬 짧은 시간 안에, 굳이 무의미한 회의를 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내용을 전달할 수 있는 문서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팀, 부서 내에서 의사결정을 할 때 조차 PPT에 줄을 그어가면서 예쁜 자료를 만드는 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과장을 조금 보태어서 하루 업무 중 절반 이상은 PPT를 만드는 데에 소요했던 것 같다.

 보여지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당연히 외부와 커뮤니케이션을 하기 위해서 잘 짜여진 장표를 만드는 것은 중요하다. 그런데 그것이 '내부에서만 공유되는 문서'에 까지 적용될 필요가 있을까? 심지어 그 문서를 pptx 원본으로 공유하는 것도 아니고 pdf로 공유한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그 문서의 포맷을 베끼기 위해서 또다시 하나하나 도형들을 그려야 한다. 만약 내가 있었던 팀이 전략기획이거나 컨설팅 firm이었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곳의 업무는 그런 것들이 아주 중요한 곳이니까. 그런데 그것도 아닌데 저렇게 문서를 만들어 놓고, 사실상 이미지에 가까운 형태로 공유하여 다른 팀들과 약간의 적대감을 갖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같은 부서 내고, 업무 자체가 경쟁의 영역에 속하는 것도 아니라면 함께 성장할 수는 없는 걸까?


5) 변화에 대응하는 속도가 느리다

이건 정말, 느려도 너무 느리다. IT 기반 기업이 아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내가 속했던 기업은 여전히 종이로 결재를 받았다. paperless를 추구하는 시대에 ppt로 보고하는 걸로도 모자라서, 그 ppt를 인쇄하고 임원 앞에 가서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보고한다. 멀쩡한 빔프로젝터와 좋은 기기들을 두고 왜 굳이 파쇄할 종이를 만드는 것일까? 이건 내가 Z세대에 속하기 때문에 상사들이 추구하는 업무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수많은 종이를 인쇄하고 또 파쇄하기를 반복하 이러한 업무 방식은 분명히 무언가 잘못 된 것 같다는 인식을 받았다.

 그래서 기업 내부의 Digital Transformation 대응도 느려도 너무 느리다. 약간의 교육만 받으면 충분히 Data Tool을 사용해 업무 속도를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음에도 여전히 엑셀 기반 업무가 지배적이다. 심지어 Digital Transformation을 담당하는 팀에서조차 그랬으니, 다른 부서의 변화 속도는 더욱 더딜 것이라고 생각한다.

 COVID-19 시대를 맞이하면서 업무의 방식과 생활 방식, 사람들의 패러다임은 크게 변화했다. 그런데 여전히 대기업 내부에서의 업무 방식은 시대의 변화에 대응하기에는 너무나 느리다. 하루하루가 지날 수록 새로운 기술은 쏟아져 나오고 소비자들의 니즈도 빠르게 변화하는데 그 니즈에 발빠르게 대응해야 함에도 ppt 위주의 업무가 주를 이루고 있고 명확한 Data 축적조차 이루어지고 있지 않으니 너무나 답답했다.




 그래서, 나는 대기업을 퇴사했다. 그렇다고 내가 잘난 인간이었는가 하면 그것은 절대 아니다. 나의 업무 태도는 미숙했고 상사들의 눈에 차기에는 너무나 부족했다. 그리고 실수도 잦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사를 결심한 것은 하루 중 점심시간 포함하여 최소 9시간, 왕복 이동시간까지 포함하면 12시간을 할애하는 회사 때문에 나의 인생에서 더욱 찬란히 빛날 수 있는 시간들을 좀먹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새로운 기업에 가지 않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분명 나는 아직 어떠한 체계 속에서 더 배우고 성장해야 한다. 하지만 내가 더욱 준비된 인재가 되어서 더 나은 기업 문화에서, 더 핵심적인 업무를 주도적으로 수행하면서 성장할 수 있는 지점을 찾고 싶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대기업을 퇴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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