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근로자는 행복할 자격이 있다
일과 삶의 균형을 뜻하는 ‘워라밸’ 관련 콘텐츠를 기획하고 있다. 여러 매체에서 워라밸이라는 용어가 쏟아지고 있는 데다 정부는 물론 일부 기업까지 가세해 워라밸을 강조하고 있는 터라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워라밸에 대한 토론은 턱 없이 부족한 것 같다. 얼마 전 A와 워라밸에 관한 대화를 나누다가 곧 열띤 토론이 됐을 때 실감했다. 나도 A도 평소 워라밸을 중시하는 입장이었지만, 워라밸이 필요한 이유나 기대 효과 중에서 무게를 두는 부분은 꽤 달랐다.
A는 워라밸의 핵심이 근로시간 단축에 있다고 보지 않았다. 많은 사람에게 일은 삶의 큰 부분이기에 일터에서 행복해야 한다고 했다. 단순히 근로시간을 줄이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근로자가 효율적으로 일하면서도 자아실현할 수 있는지 고민이 필요하다고 했다. 또, 휴식을 보장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일의 능률을 올리고, 성과가 만족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을 기대한다고 했다.
대체로 동의하면서도 A의 논의에는 배제돼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터에서 자아실현을 할 수 없거나 하기 싫은 이들 말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어려운 환경이나 부족한 능력 때문에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을 하거나 오직 돈을 벌기 위한 직업, 직장을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사람이 많다. 이들 중 일부는 일터 밖에서 꿈을 꾼다. 또 다른 이들은 어디서도 꿈꾸지 않는다. 대신 자신만의 행복, 만족을 좇는다. 이들에게는 직장에서의 자아실현이라는 말 자체가 와 닿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삶의 방식이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결국 모두가 함께 살아가야 하는 사회 구성원이다. 그렇다면, 워라밸은 직장에서 꿈꾸지 않는 사람들을 기준으로 논의돼야 하지 않을까. A와 달리, 워라밸에서 근로시간 단축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일로 자아실현하는 사람들은 근로시간이 단축되든 되지 않든 상대적으로 크게 영향받지 않는다. 이들은 언제나 능동적으로, 심지어 없는 일도 만들어서 하기 때문이다. 퇴근 후에도 시간을 쪼개 공부하고, 자기 계발한다. 어떻게 보면, 축복받은 사람들이다.
일이 단지 생존의 목적인 사람은 상황이 다르다. 근로시간이 줄지 않으면, 퇴근 후에 또 다른 꿈을 꿀 수 없다. 자신만의 즐거움을 누릴 시간이 없다. 모두 공감하겠지만, 이런 삶은 살아있어도 살아있다고 하기 어렵다. 몸은 물론 정신까지 황폐해진다.
우리 사회는 지나치게 일에서의 자아실현, 꿈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꿈이 없거나 자신의 일에 남다른 애정이 없는 이들은 위축된다. 자신 또는 직업 선택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끊임없이 고민한다. 하지만, 열정적으로 일하고 꿈꾸는 삶이 아름답다는 생각도 하나의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있는 거라곤 우수한 인적 자원뿐인 나라에서 성행하는. 열악한 조건에서 최선을 다해 오늘날의 성장을 이룩한 우리나라가 자랑스럽지만, 그 빛나는 성취가 꿈이 없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세태로 굳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일터에서 꿈꿀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이상적이다. 그러나, 꿈은 꿈일 뿐이어서 없어도 살 수 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꼭 일이 아니더라도 자신 나름대로의 즐거움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죽고 못 사는 친구들과 주기적으로 술을 퍼마시거나 예능 프로그램을 몰아보는 일처럼 누군가는 한심하다고 말하는 일일지라도 말이다.
워커홀릭 근로자도, 일에 관심 없는 근로자도 건강한 삶이 주는 다채로운 기쁨을 누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를 위해 워라밸 문화와 제도는 꿈꾸지 않는 이들까지 세심하게 배려했으면 한다. 일의 성과에 따른 차등적인 보상과는 별개로 말이다. 야심 넘치는 동료도, 간신히 하루를 버텨내는 동료도 모두 행복할 수 있기를.
글을 마치며. 워라밸 관련 논의를 할 때마다 마음 한 구석이 무겁다. 여전히 근로시간 단축이 임금 삭감으로 이어지는 저임금, 시간제 노동자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내가 행복하겠다고 워라밸을 외치는 동안, 누군가는 생존에 위협을 느끼고 있지는 않을는지. 언제나 뾰족한 수없이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