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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끔 쓰는 이다솜 Apr 17. 2018

우리는 왜 ‘숲 속의 작은 집’을 꿈꿀까

tvN 예능 ‘숲 속의 작은 집’ 스틸컷.


tvN 예능 ‘숲 속의 작은 집’을 시청하고, 욕심이 생겼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바라는 바를 이전보다 명확하게 인지하게 됐다. 시종 욕망을 덜어내라고 말하는 이 프로그램의 기획 방향을 생각하면, 욕심이 생겼다는 말은 좀 이상하게 들린다. 하지만, 욕망의 방향은 방송 취지와 일치했다.


가장 먼저 ‘숲 속의 작은 집처럼 자연에 둘러싸인 고립된 공간에서 머물고 싶다’고 생각했다. 오랫동안 살고 싶은 건 아니다. 원하는 때, 원하는 만큼만 지내고 싶다. 계절마다 한두 번, 며칠이면 충분할 것 같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은 일상의 자잘하고 시답잖은, 그럼에도 머리카락 한 올까지 곤두서게 만드는 갖가지 고민에서 벗어나고 싶다. 자연의 작은 변화를 알아채고, 음식을 만들어 먹고, 책을 읽으면서 단순한 일이 주는 큰 기쁨을 느끼고 싶다. 쉽게 얻을 수 있는 만큼, 쉽게 잊히는 즐거움 말이다.




이런 바람은 삶의 지향에 관한 질문으로 이어졌고, 오랜만에 내면을 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내가 바라는 건, 성공을 쫓는 삶도 사회로부터 격리된 은둔자의 삶도 아니다. 그저 정신없이 흘러가는 이 세상으로부터 약간의 거리를 두고 싶다. 마치 숲 속의 작은 집처럼 말이다. 누군가에게는 그리 어렵지 않겠지만, 한 템포 빠르게 많은 정보를 접해야 하는 콘텐츠 기획자인 내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이는 지난 몇 년간, 일의 재미를 느끼는 순간에도 나 자신을 배반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몇 년에 한 번씩 일을 쉬고, 긴 여행을 떠나야 했는지도 모른다.     


주변을 둘러보면, 비슷한 사람이 많다. 극단적인 미니멀리스트, 본질주의자는 드물다. 완전한 고립을 꿈꾸는 이도 거의 없다. 대신, 이들은 원하는 방식대로 원하는 만큼 욕망하길 바란다. 완벽하게 통제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욕망이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이해하고, 미약한 힘으로나마 조절할 수 있길 원한다. 또, 이 세상에 연결되거나 연결되지 않을 권리를 주체적으로 행사하길 희망한다.      




결국 우리가 원하는 건, 숲 속 작은 집에 있을 때처럼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짧은 시간, 작은 공간이다. 이는 고립을 추구하는 일 이상의 의미다. 자신의 삶을 높은 수준으로 통제하고 싶은 바람이기도 하다. 현실은 정반대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 늘 세상과 연결돼 있어야 한다. 마음대로 선택하고 통제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이다.


그래서 숲 속 작은 집은 꿈이다. 전쟁을 끝내지는 못해도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방공호다. 강남 대저택이 아니라, 숲 속 작은 집조차 갖기 어렵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힘이 빠진다. 하지만, 이루기 쉬운 꿈이 있겠느냐고 되묻고 말았다. 대신 지금 내 삶에서 지을 수 있는 작은 집을 만들기로 했다. 볼품없더라도 말이다. 어제는 자기 전에 휴대폰을 무음 모드로 설정하고, 맞춰놓은 알람이 울릴 때까지 1시간 동안 테드 창의 ‘지옥은 신의 부재’라는 단편을 읽었다. 내일 저녁에는 수영장에 가서 온몸을 휘감는 물의 감촉에만 집중할 거다. 방치할수록 요란하고 부산스러워지는 일상을 정리하다 보면, 세파를 견디게 하는 임시 거처 정도는 마련할 수 있지 않을까?


언젠가는 꼭 숲 속 작은 집을 짓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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