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철목사기념관 방문기
순교자 『주기철목사기념관』을 다녀와서
드디어 왔다.
오래전부터 와보고 싶었던 곳. 한번은 왔다가 휴무일이라 되돌아갔던 곳. 생각할 때마다 늘 죄송한(?) 마음이 생겨나는 곳, 주기철목사기념관.
비가 온다. 날씨도 궂다. 아직 오전 10시도 안 되었는데 비바람 속에 안개도 자욱하다. 운전하기가 쉽지 않을 정도였다. 주목사님이 고문당하시던 당시의 우리나라 상황이 자연 기후로 치면 이랬을까? 앞이 보이지 않았던 나라의 운명... 그 속에서 주목사님은 한 떨기 백합화였다. 조국 교회의 제단 등불을 부여잡고 계셨던 한 줄기 빛.
날씨가 이러니 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주변 풍광을 돌아보니, 정말 한가롭고 고즈넉한 마을이었다. 크지 않은 마을을 작은 산들이 감싸고 있는 형세. 그래서 웅촌(熊川)이라고 했을까. 착한 곰 한 마리의 포근한 모습이 떠오르면서 자못 따사롭게 느껴진다.
기념관의 외관은 주님의 보혈을 연상케 만드는 짙은 홍색이었다. 빗속에 보이는 기념관의 모습에서 벌써 십자가를 지고 계신 예수님의 자취가 느껴졌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너무 경건해지고 숙연해지는 내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시작부터.
건물 안에 들어서니 안내데스크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고 아무도 없는데도 한 분이 나오셔서 친절하게 나를 맞이해주었다. 나 한 사람을 위한 배려에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잠시 설명을 듣고 몇 장의 브로셔를 받고 나서 곧장 전시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아, 주목사님...
주목사님은 어떻게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을까? 과거에 책에서만 읽었기에 별 생각이 없이 지나왔지만 이곳에 오니 내 맘이 달라진다. 그분의 모든 것이 실제적으로 궁금하게 다가왔다. 어렸을 때 부친 주현성 장로님의 열성적인 신앙을 이어받은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게 아니었다. 교회는 일찍 나가신 것 같은데, 신앙은 처음부터 깊지 못하셨다. 심지어 집사가 되어서도 술을 마시고 예배에 참석하였다는 기록까지 나온다. 신기하다. 하지만 한국교회 초기의 부흥기를 주도하셨던 김익두 목사님의 부흥회에 참석하여(1920년 9월, 마산 문창교회에서) 은혜를 받고, 그 마음이 완전히 변화되었다. 주기철 목사님을 쓰시기 위해 하나님은 김익두 목사님을 사용하신 것이다. 인물이 인물을 낳는다.
목회의 시작은 1926년 1월에 부임한 부산 초량교회로 보인다. 그 후 1931년 9월부터 시작한 5년간의 마산 문창교회의 목회 시기를 지나서 1936년에 평양 산정현교회로 간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일제의 핍박과 신사참배 강요가 극에 달한 때로서, 국가적으로나 교회적으로 가장 힘든 최악의 시기였다. 그 속에 주목사님이 계셨다.
일제는 1938년 27차 장로교 총회에서의 신사참배 가결 이후, 본격적으로 한국교회 지도자들을 핍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주목사님과 산정현교회 성도들은 조금의 타협함도 없이 신사참배반대운동을 전개해나갔다. 이에 일제는 주목사님을 네 차례에 걸쳐서 검속하였고, 무자비한 고문을 자행했다. 주목사님의 마지막 설교, 『일사각오』는 요한복음 11장 16절에 나오는 도마의 말을 인용한 것이지만, 그 핵심은 로마서 8장 18절의 말씀에 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이러한 소망과 믿음으로 주목사님은 그 지옥 같은 고통의 시기를 목숨을 바쳐 통과한 것이다. 순교자는 승리자다.
주목사님의 성장 과정과 배움의 과정을 간단히 보면, 어렸을 적에 고향 웅천의 개통학교를 나와서, 1916년에 평북 정주에 있는 오산학교를 졸업했다. 그 후에 연희전문학교에 들어갔으나 병으로 1년 만에 중퇴하고 다시 고향에 내려왔다. 이 당시는 3.1운동을 전후한 시기였기에 독립운동과 민족운동에 열심으로 동참하셨다. 은혜를 받고 나서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25년에는 수석으로 졸업하셨다.
그런 과정에서 그는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과 신앙적인 깊이를 동시에 이룬 것으로 보인다. 나라 사랑과 하나님 사랑은 분명히 같이 간다는 사실을 주목사님을 보면서 또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주목사님의 막내 아들 주광조 장로님의 유품 전시와 육성 녹화를 보면서, 나는 자신의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아아, 수치스러운 나여, 부끄러운 나여, 하나님 보시기에 이 더러움을 어찌 씻을 수 있을까... 그 자리에서 회개하고 또 회개했다. 몇 일이고 몇 날이고 회개하고 싶었다. 여러 사진 속의 주목사님을 감히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분의 숭고한 신앙 앞에 나의 모습이 너무 초라하고 부끄럽고 죄송해서...
주기철목사기념관은 내게 다시 한 번 일제 강점기의 주목사님 곁으로 데리고 갔다. ‘이래서 이런 기념관이 필요하구나!’ 절실히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우리 울산에도 속히 순교자기념관이 세워지기를.
밖으로 나오니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다. 아마도 오늘 종일 내릴 것 같다. 발걸음이 잘 떨어지질 않는다. 이대로 나가서는 안될 것 같다. 변화를 결심해야 한다. 다시는 이런 부끄러운 모습으로 주목사님 앞에 오지 않기를 결심해야 하고, 새롭게 그분의 후배로서, 목회자로서, 이 시대의 목사로서 내게 주어진 길을 순교자의 마음으로 살 것을 감히 결심해 본다. 어림도 없지만 주님의 은혜를 의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