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창밖으로 겨울밤이 깊어간다.
거리마다 반짝이는 조명들, 어디선가 들려오는 캐롤. 크리스마스가 다가온다. 백화점은 쇼핑객들로 붐비고, 레스토랑은 예약으로 가득 차며, SNS에는 파티 사진들이 넘쳐난다. 온 세상이 들썩인다. 마치 이날을 위해 1년을 기다려온 것처럼.
하지만 이 화려한 불빛 너머로, 문득 이천 년 전 그날 밤이 떠오른다. 아무도 환영하지 않았던, 그 어둡고 추웠던 베들레헴의 밤. 그리고 생각한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기념하고 있는 걸까.
성탄절은 전 지구촌의 축제가 되었다. 종교를 떠나, 문화를 넘어, 이날만큼은 모두가 함께 웃고 즐긴다. 선물을 주고받으며,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사랑하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낸다. 그 자체로 나쁠 것은 없다.
하지만 어느새 성탄절은 '쾌락의 날'이 되어버렸다. 예수는 없고 파티만 있다. 구주의 탄생은 잊혀지고 선물 교환만 남았다. 거리의 트리는 화려하지만, 그 트리가 가리키는 십자가는 보이지 않는다. 캐롤은 울려 퍼지지만, 그 가사의 의미를 되새기는 사람은 드물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라고 노래하면서도, 정작 그분이 왜 오셔야 했는지, 무엇을 위해 오셨는지는 묻지 않는다. 성탄절은 그저 즐거운 연말 이벤트가 되었고, 예수님의 탄생은 그 이벤트를 정당화하는 명분 정도로 전락했다.
하지만 성경이 보여주는 첫 성탄의 모습은 전혀 달랐다. 그곳에는 화려함도, 웃음도, 환영도 없었다. 오직 거부와 냉대, 무지와 어둠만이 있었다.
"빛이 세상에 왔으되, 세상은 그를 알지 못했고, 자기 땅에 오셨으나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다."
이것이 첫 성탄의 실제 모습이었다. 세상은 그를 알지 못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이미 와 있었는데도 말이다. 이는 정보의 부족이 아니었다. 영적 무지였다. 빛이 없어서가 아니라, 눈을 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보지 못하니 알 수도 없었다.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에 도착했을 때를 생각해보자. 유럽인들에게는 '대발견'이었지만, 정작 그 땅에 살던 원주민들은 자기들 앞에 서 있는 이 낯선 사람들의 의미를 전혀 몰랐다. 그들은 콜럼버스가 들고 온 십자가와 국왕의 깃발을 신기한 장식쯤으로 여겼고, 자신들이 갖고 있던 금으로 된 장식품을 장난감처럼 내주었다. 금덩이를 보고도 '예쁜 돌'이라고만 생각했으니까.
이는 마치 구주 성탄의 빛을 보고도 단순히 '그냥 연말 분위기'라고 생각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영적 무지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에도 빛은 이미 와 있었지만, 사람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더 비극적인 것은, 모르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세상은 그분을 적극적으로 거부했다. 자기 땅에 오셨으되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 백성들이었고, 하나님이신 창조주께서 피조물의 세계로 오셨지만, 그들은 그에게 방 하나 내어드리지 않았다.
예수가 태어났을 때, 사람들은 그를 못 알아봤을 뿐 아니라, 동방박사들의 방문을 통해 알게 되고 나자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군사들을 보냈다. 그 결과 베들레헴 주변의 200명이 넘는 아기들이 칼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라헬의 통곡이었다.
이처럼 성탄은 인간의 냉혹함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이천 년이 지난 지금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12월의 거리를 걷는다. 화려한 조명이 눈부시다. 캐롤이 흘러나온다. 사람들은 웃고 떠든다. 전 세계가 이 성탄절을 기억하고 지킨다. 하지만 실제로 구주의 탄생으로 알고 지키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다수의 인류는 그저 자신들이 즐기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 이 절기를 이용하고 있지 않은가. 예수는 없고 쾌락만 있지 않은가. 선물은 있지만 구원은 없고, 파티는 있지만 경배는 없고, 트리는 있지만 십자가는 없지 않은가.
성탄절이라는 이름은 남았지만, 그 내용은 사라졌다. 껍데기만 남은 축제. 형식만 남은 기념일. 이것이 오늘날 대다수 사람들이 보내는 성탄절의 모습이다.
어둠은 빛을 거부한다. 왜냐하면 빛이 오면 참과 거짓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세상은 자신의 가치관, 욕망, 자기 중심성으로 굳어진 채 살아간다. 그것이 마치 세상의 전부인 양 생각하며 산다. 그게 인생이라고 믿으며 산다. 그래서 하나님을 싫어한다. 그분이 오시면 자신의 삶이 심판받을 것을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 놀라운 반전이 있다.
모든 사람이 거부했지만, 소수였지만, 영접한 자들이 있었다. 감사하게도 말이다. 목자들이 있었고, 동방박사들이 있었고, 요셉과 마리아가 있었다. 극소수였다. 하지만 그들은 알았다. 이 아기가 누구신지를.
사실 숫자는 중요하지 않다. 역사는 언제나 '남은 자'를 통해 움직였다. 하나님 나라는 언제나 소수로 시작된다.
종교개혁을 말하면 늘 루터만 떠올리지만, 사실 역사를 움직인 또 한 무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성경을 찍어내던 인쇄공들이다.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이 세상을 뒤흔들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내용이 대다수에게 환영받아서가 아니라 소수의 사람들이 그것을 영접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사람들은 말했다. "교황을 거스르는 책을 인쇄하다니, 당신 미쳤소?" 그러자 어떤 인쇄공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전해진다. "나는 교황보다, 말씀을 먼저 찍겠습니다."
그 인쇄공들은 루터처럼 설교는 못 했다. 대신 밤새 잉크를 묻히며 '믿음'을 찍어냈다. 하나님 나라는 늘 이렇게 소수의 사람의 손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그들의 영접, 그들의 믿음조차도 스스로의 결단과 선택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상황이 그들을 인도했고, 무엇보다도 그들의 마음속에 영접하고자 하는 믿음의 불을 하나님께서 일으켜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혈통으로도, 육정으로도, 사람의 뜻으로도 난 자들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역사다. 구원은 인간의 결단 이전에, 하나님의 역사다. 성탄은 인간이 하나님께 올라간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에게 내려오신 사건이다.
그리고 이보다 더 놀라운 사실이 있다. 영접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것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다. 특별한 권세다. 종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신분의 변화다. 성탄은 신분 상승의 날이 아니라, 신분 회복의 날이다.
생각해보라. 창조주께서 피조물에게 주시는 가장 큰 선물이 무엇이겠는가. 바로 자녀 되는 권세다. 더 이상 종이 아니라 아들이요, 딸이다. 더 이상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다. 더 이상 어둠의 자녀가 아니라 빛의 자녀다.
이것이 성탄의 복음이다. 구주가 오셨다는 것. 그분이 거절당하실 것을 아시면서도 오셨다는 것. 그리고 그분을 영접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는 것.
세상이 추구하는 쾌락은 일시적이다. 파티는 끝나고, 선물은 낡아지고, 웃음은 사라진다. 하지만 이 복음은 영원하다. 한 번 자녀 된 자는 영원히 자녀다. 한 번 구원받은 자는 영원히 구원받은 자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여기서 '거하다'는 말은 장막을 친다는 뜻이다. 주님은 잠시 방문하신 것이 아니라, 함께 사시기로 작정하셨다. 인생의 고단한 현장 속으로 직접 들어오셨다. 우리의 더럽고 냄새나고 초라한 마음의 구유에 들어오신다는 뜻이다.
1880년대 조선에 들어온 초기 선교사들, 그들은 처음에 외국인 거류지의 비교적 깨끗한 집에 머물 수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어떤 선교사들은 일부러 냄새나고 비좁은 한옥, 심지어 환자와 가난한 이웃들 사이로 들어갔다. "왜 굳이 그런 곳으로 들어가느냐"는 질문에 한 선교사가 이렇게 말했다. "예수님이 이미 그 집에 먼저 들어가 계시더군요."
주님은 VIP 대접을 받으러 오신 분이 아니다. 그분이 말 먹이통에 누이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오히려 우리가 '여긴 좀...' 하고 밀어내는 그런 방에, 먼저 장막을 치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그 영광은 세상적인 화려함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보고 박수치고 열광할 수 있는 그런 영광이 아니다. 하늘 은혜의 영광이다. 그래서 낮아짐의 영광이다. 결국에는 죽음의 십자가로 향하는 영광이다. 참 말이 안 되는 말이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언제나 역설적인 사랑의 깊이로 측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와 진리는 분리되지 않는다. 은혜 없는 진리는 율법이 되고, 진리 없는 은혜는 방종이 된다. 성탄은 이 두 가지가 한 인격 안에서 완성된 사건이다.
12월의 밤은 깊어간다. 거리의 불빛들은 여전히 화려하고, 사람들의 웃음소리는 계속 들려온다. 이 축제는 며칠 더 계속될 것이고, 연말이 지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크리스마스의 기억은 희미해지고, 거리의 트리도 철거될 것이다. 하지만 이 밤, 나는 안다. 진짜 성탄은 거리의 화려함 속에 있지 않다는 것을. 진짜 성탄은 조용한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것을.
"너는 나를 영접하겠느냐?"
오늘도 여전히 그분은 묻고 계신다. 다수는 여전히 거부한다. 쾌락을 추구하고, 자기 만족을 좇고, 진정한 구주는 외면한다. 하지만 소수는, 비록 극소수지만, 여전히 그분을 영접한다. 그들에게는 위로부터 주어지는 권세가 있다. 하나님의 자녀 되는 권세. 이보다 큰 선물이 어디 있겠는가. 12월의 어느 밤, 나는 조용히 마음의 문을 연다. 화려한 조명도, 시끌벅적한 축제도 아닌, 그저 고요한 마음으로.
그분을 모신다. 내 마음의 작은 구유에.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세상이 외면해도, 나만은 알고 있는 이 밤의 진실을. 구주가 오셨다. 거절당하실 것을 아시면서도. 외면받을 것을 아시면서도. 그리고 나를 자녀 삼으시기 위해. 성탄의 빛이 그렇게, 조용히, 우리 가운데 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