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명명론_죽음

죽음에 대하여

by 김이월

오늘 이야기 해 볼 주제는 바로 죽음입니다. 당신에게 있어 죽음은 무엇인가요? 통상적으로 죽음에 대한 인식은 어떤가요? 한번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누군가가 죽으면 슬픔을 느낍니다. 그이를 그리워 하며 장례라는 절차를 치르고 타인에게 위로를 받죠. 혹은 반대로, 조문 문자를 받고 장례식에 참석해 남겨진 가족이나 가까운 관계의 사람들을 위로하는 역할을 맡습니다. 이러한 관습 때문일까요. 우리는 죽음을 슬퍼하고 애도할 대상, 극단적으로는 끔찍하고 두려운 공포의 상징으로 인식합니다. (물론 아닌 분들도 계시겠지만, 통상적으로요.) 오늘 제가 여러분께 드릴 질문은 이 부분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죽음이 두려우신가요? 과연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해야 할까요.


당연하게, 누군가가 죽겠다는 결심을 하면 열씬 만류합니다. 사회적인 시스템도 사람이 삶을 보존할 수 있는 방향으로 구축되어 발전해 왔습니다. 여기서 복지의 이유도 찾아볼 수 있겠죠. 이 부분을 조금 유전학적으로 바라보면 어떨까요. 우리는 우리의 DNA로부터 한가지 명령을 받고 이를 수행하기 위해 살아간다고 정의해봅시다. 그렇다면 이는, 생식이 될겁니다. 생식을 통해 종족을 유지하고 번성하는 것, 이게 우리의 최종임무인 겁니다. 만약 이가 사실이라면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가 쉽게 설명할 수 있게됩니다. 바로 생식을 위해 죽음을 피하고 최대한 생명을 보존하는 방향으로 살아간다는 부분이 말입니다. 자손을 남기기 위해 일하고, 공부하며 더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한 모든 노력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을 최대한 미뤄, 우리가 최종적인 미션을 완수할 때까지 살아가려 하는 것입니다. 임무를 다한 사람이 죽음에 대해 초연하게 생각하는 것도 여기 이유가 있을 수 있죠. 만약 아니라면, 이 세상에 생식 이외의 가치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일수도, 혹은 자손을 지키기 위함일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유전학적인 이유가 아니라면, 또 어떤 것이 있을까요? 바로 무지입니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그저 죽게되면 생명 유지 활동이 멈추고, 소통도 할 수 없다는 것일 뿐. 그 누구도 죽음에서 돌아와 우리에게 죽음은 이렇더라 라고 이야기 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죽음을 그저 하나의 상태로 인식하는 걸 수도 있고요. 무튼, 우리에게 죽음은 미지의 대상입니다. 흔히들 보면, 사랑하는 존재를 앗아가는 악일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역사적으로 보아 무지의 대상을 두려워합니다. 유럽 전역을 혹사시킨 흑사병이 창궐했을 때도, 누군가 마녀로 몰려 죽임을 당한 것도 인간의 무지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온 참혹한 사건들이죠. 알 수 없기에 통제할 수 없고 그저 당하기만 해야 하기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의료기술이 미친 듯이 발달하는 것도 이에 대한 증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에두아르 마네 <자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봅시다. 당신은 아직 죽음이 두려운가요? 우리는 유전학적으로 죽음을 두려워하게 설계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그저 우리가 죽음에 대해 알지 못하기 때문에 두려운 것일수도 있죠. 위 그림은 에두아르 마네라는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의 <자살>이라는 작품입니다. 그림 속 남자의 표정이 어떤가요. 그림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삭막하지만, 표정만은 꺼저가는 몸에 편안해보이지 않나요? 이 작품은 마네의 불안정한 감정을 온전히 담아 표현해냅니다. 이를 통해 여러분이 과연 죽음이란 과연 어떤걸까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길 바랍니다. 어쩌면 우리는 두려움이라는 명목 뒤에 하나의 상태에 너무나도 많은 수식어를 부여한 것일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만약 당신이 아직 죽음이 두렵다면, 이걸 기억하길 바랍니다. 핸드헬드 러닝의 대표이자 창립자인 그레이엄 브라운에 따르길,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만드는 모든 선택에 죽음을 포함시키면 어떨까요. 만약 제가 글을 쓰다말고 지금 당장이라도 차도에 뛰어들면, 저는 죽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죽지 않는 선택, 즉 최대한 삶을 연명할 수 있는 선택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죽음에서 무조건 적으로 벗어나라는 말이 아닌, 그저 많은 선택지 중 하나라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그저 힘들 때 도망칠 수 있는 그런, 도피처로서 말입니다.


에필로그

오늘의 명명과정은 어땠나요? 죽음이 도피처라니. 많이 생소할 수 있고 자살을 장려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글의 본질은 그저 당장 죽음을 선택하지 않고 살아가는 당신의 용기에 박수를, 그리고 죽음이 두려운 당신에게 그저 하나의 선택지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을. 마지막으로 삶이 힘든 당신에게 힘을 쥐어주는 것입니다. 자연히 죽는 것은 어찌할 수 있는 반경을 벗어난 것이지만, 당신의 삶의 주체는 당신입니다. 누군가로 인해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아닌, 당신이 원할 때, 진정한 시간이 맞물릴 때, 선택할 수 있는 선택권이 있다는 걸 말해주고 싶습니다. 너무 애써 살아가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렇게 하루 살아가다보면 본인의 빛을, 이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을게 틀림없으니까요. 누군가는 이 글을 읽고 죽음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지 말라는 본인의 견해에 죽음에 대해 뭘 안다고 이런 말을 하냐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경험의 문제라면, 저도 당신 못지 않게 충분히 많은 죽음을 봐왔다고 하면 될까요. 어쩌면 이 글은 누군가의 죽음으로 삶의 방향성을 잃은 내게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반일 수도 있겠습니다. 종국에 우린 주어진 삶을 살아가며, 죽음에 대한 우리의 바램이 틀리지 않을 것을 간절히 바랄 수 밖에 없을 겁니다. 진심을 다해 바라며, 우리가 다시 만나기를.

“In peace, may you leave this shor. In love, may you find the next safe passage on your travel, until our final journey to the ground.”
“May we meet again.”

「The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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