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명명론_불안

불안에 대하여

by 김이월

누구나 살아가며 불안을 느낍니다. 이성을 지닌, 자기 보존의 욕구를 가진 존재라면 자연스런 감정이죠. 현대인의 불안은 대체로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우려일 겁니다. 인간이 미지의 존재, 무지를 두려워한다는 사실은 죽음에 관해 이야기할 때 다뤘던 부분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며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하지만 실질적으로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건 경험에 비해 현저히 적습니다. 이는 개인의 한계라 칭하기보단 지식화가 가능한 분야가 넓지 않기 때문이죠. 하물며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낱낱이 알지 못하는데, 타인이나 무지의 상황은 더 하겠죠. 그래서 인간은 불안을 느낍니다. 개인마다 다르겠지만 하루에도 수십, 수천의 고민과 걱정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 보통의 모습일 겁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께 드릴 질문은 바로 이 불완전함에 대함입니다. 우리는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과연 불안은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감정에 불과할까요.


본격적으로 명명 과정을 진행하기 전에 불안을 겪는 상황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봅시다. 앞서 언급했듯 알 수 없는 상황, 불완전한 상황, 위태로움에서 우리는 걱정, 긴장 그리고 우려를 경험합니다. 짙은 밤거리를 내려다보듯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상황은 우리의 미래입니다. 미래를 아는 건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 중 하나이기도 하죠. 당장이라도 내가 내일 죽을지, 로또에 당첨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노력한다고 알 수 있는 영역도 아닙니다. 그저 불안을 기저로 최대한 일어날 일들을 대비하는 수 밖엔 없죠.

불완전한 상황은 또 어떤가요? 이전에 무엇이 완전함일까요. 완전하다는 건 순탄하고 원활하여 통제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통제를 벗어나게 할 변수가 없어 한마디로 손안에 모든 상황이 놓인 상태이죠. 불안의 요소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이 실존할까요? 사실 우리는 이러한 완벽한 통제 상황을 경험한 적이 없습니다. 인생 사 마음대로 되지 않듯, 순간의 결정이 너무나 쉽게 인생을 뒤집어 놓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하다는 말을 사용하는 이유는 아마 그리 믿고 싶기 때문일 겁니다. 단어 그대로의 완벽함은 존재하지 않는 환상이지만, 우리에게 통제권이 주어질 때, 보통은 현재의 순간 속 무언가라도 결정할 수 있다면 완전한 상황을 일컫습니다.


데이비드 호크니 <일광욕하는 남자>

우리가 살아가는 순간을 긴 파동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대부분의 인생이 직선일 수만은 없죠. 다양한 변수들이 우리의 인생에 진폭을 형성할 겁니다. 때론 그 진폭의 크기는 작지만, 어떨 땐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지기도 하죠.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지면 물결이 일어나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우리가 짊어질 수 있는 일정한 진폭을 지닌 것이 우리들의 인생이라면, 불완전함과 미래 그리고 위태로움과 같이 불안을 유발하는 상황은 돌멩이입니다. 매번 우리는 이 풍파를 맞고 살지만, 모든 것이 그러하듯, 익숙해집니다. 다음에 올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짐작을 하죠. 그리고, 이 짐작이 바로 불안입니다. 일어날 수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수많은 상황들에 대한 예상인 것이죠. 불안으로 대개는 우려라는 족쇄에 붙잡혀 살아가기도 하지만, 때론 족쇄가 주는 안정감도 있습니다. 예상 가능하다는 것, 가정할 수 있다는 것은 아직은 통제권이 있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이 기묘한 통제권은 우리에게 안정감을 지니게 합니다. 그렇기에 불안이 두려움과 상실의 감정을 이끌어내지만, 동시에 상황이 아직은 완전함을 보이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일종의 자기 최면이죠. 현실에 대한 걱정이지만 오히려 현실과 동떨어진, 착각인 겁니다. 익숙하게 느껴지지 않나요?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해 통제 가능하다는 환상을 보는 것. 불안도 중독입니다. 사실상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내가 가정할 수 있는 세계로 되돌리기 위한 틀과 같죠. 결국 내가 만든 환상 세계에 나를 가두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불안에 대해 이야기하며 처음 던진 질문은 벗어남이 가능한가였습니다. 사실 불안이 중독인 만큼 벗어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로 인해 내가 만들고자 하는 세계에서 나오는 것은 어쩌면 생각보다 간단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세계 자체를 부시는 거창한 것이 아닌, 내가 있는 세계를 인식하는 것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이면이 있듯이, 불안이 고통과 두려움으로 얼룩진 감정만이라기보단, 여전히 내가 살아있음을 확인할, 아직은 희망이 있음을 증명해 보이는 증거로 보면 어떨까요. 중독된 세계의 침체는 좋다고 할 수는 없지만 안정감을 부정할 수는 없으니 말입니다.



에필로그

오늘의 명명 과정은 어땠나요? 불안은 참으로 익숙한 감정이죠. 작든 크든 누구에게나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다시 돌아오는데 이리 시간이 오래 걸린 것도 이번 주제 때문일까요.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감정이나 상태에 대해 일차원적으로 결론 내리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실상은 팔레트에 비치는 원색같이 선명하지 않게 이리저리 얼룩진 물과 가깝지만요. 그래서 불안이 나쁜 것인가라고 물으면 대답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식욕이나 수면욕을 두고 선악을 따지지 않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할까요. 불안은 하나의 자기 방어기제입니다. 무지의 미래 상황, 변수에서부터 나를 보호할 수 있는 장벽이며 안정된 세계이니 말이죠. 그러나 동시에 불안은 중독이기에 벗어나야 합니다. 중독은 머물기 위함이지 변화를 일으키지는 않기 때문이죠. 당최 불안을 어떻게 인식하라는 건지 묻는다면 그 답은 본인이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세계를 만든 창조자로서 무너뜨리는 것 또한 자신에게 달렸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단지 불안을 겪기 때문에 스스로를 원망할 필요도, 혐오할 필요도 없다는 걸. 그렇다고 그 감정에서 허우적 댈 이유도 없다는 걸 이야기하기 위함입니다. 이 안정적 환상의 통제권은 내 것이기 때문이죠.


'인생은 하나의 불안을 다른 불안으로, 하나의 욕망을 다른 욕망으로 대체하는 과정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불안을 극복하거나 욕망을 채우려고 노력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노력은 하더라도 우리의 목표들이 약속하는 수준의 불안 해소와 평안에 이를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불안」 알랭 드 보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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