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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망 Aug 01. 2020

혼자 또 같이 하는 여행

교환일기 쓰기

H님 안녕하세요. 희망입니다.


저는 친가 식구들과 검봉산 자연휴양림에 와 있어요. 오전에 도착해서 간단히 밥을 먹고 해수욕장에 갔는데요, 날이 흐려서 바다에 빠지지 못하고 돗자리에 앉아 쉬었어요. 하루를 완성시키는 내 사랑, 커피를 사 들고요. 바다를 보며 커피라니 정말 낭만적이죠? 현실은 점심은 무엇 먹을지, 날이 추운데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노는 아이들이 감기에 걸리지나 않을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답니다. 가족들과의 여행에서는 조용히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가 쉽지 않죠. 그래도 오랜만에 바다를 앞에 두고 앉아 있으니 참 좋았어요.


대화에서 잠시 벗어나 이북을 읽으려고 해 봤는데 졸려서 책을 읽을 정신이 아니더라고요. 3일간의 편안한 휴가를 위해 매일 하고 있는 영어 과제를 월, 화 이틀간 두 편씩 미리 했어요. 새벽까지 과제를 하느라 피곤했는지 몽롱한 상태로 오후 시간을 보내고 저녁때까지 잠만 잤답니다. 푹 쉬어서 좋긴 한데.. 이러려고 시간을 쪼개서 과제를 한 게 아닌데.. 오랜만의 여행이라 너~무 잘 놀고 싶었나 봐요. 잘 놀기 위해서는 푹 쉬어야 한다는 진리를 다시 한번 확인했답니다. 오늘 푹 쉬었으니 내일은 쌩쌩하게, 신나게 놀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있어요.  


어렸을 때는 여름마다 동해바다로 휴가를 갔어요. 아버지가 근무하던 회사에서 매년 신청을 받아서 바다로 휴가를 보내줬거든요. 회를 즐기지 않는 부모님의 선택으로 소라나 골뱅이 찜을 먹었어요. 살갗이 벗겨질 정도로 종일 바다에서 놀고 난 뒤에 쫄깃쫄깃한 소라를 먹던 그때가 참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 있답니다. 제게 여름휴가는 매일 밥을 먹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었는데요, 대학생이 된 이후 각지에서 모인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가족과 매년 휴가를 가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더라고요. 여행이 제 삶의 일부가 된 이유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던 가족과의 여름휴가 덕분인 것 같아요.


H님은 기분이 몹시 다운될 때 주로 혼자 영화를 본다고 하셨죠? 저는 혼자 여행을 다녀와요. 주요 여행지는 제주도였답니다. 친한 직장 동료들과 제주여행을 갔었는데요, 내내 택시를 타고 다니다가 1시간 가까이 되는 거리를 걷게 되었어요. 10분이면 도착할 줄 알고 걷기 시작했는데 1시간이나 걸린 거예요. 쉬며 떠들며 걸었던 그 길이 제주 여행에서 가장 오래 기억에 남았어요. 그즈음 “제주올레 여행”이라는 책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사단법인 ‘제주올레’를 발족하고 제주에 ‘놀멍 쉬멍 걷는 올레길’을 개척한 서명숙 작가의 이야기였어요. 산티아고 길을 완주하고 돌아온 작가가 고향 제주에도 아름다운 길을 만들고 싶다는 열정으로 올레길을 다져가는 이야기에 가슴이 쿵쾅거렸답니다. 책이 인연이 되어 올레길을 걷게 되었고 ‘제주올레’를 후원하기 시작했어요. 앞으로 자주 걸을 길이니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이 유지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요. 그만큼 아름다운 제주를 걷는 시간이 참 좋았어요. 외롭지만 외롭지 않은 시간들... 그렇게 혼자 떠나는 여행의 매력을 알게 된 뒤 용기를 내어 유럽으로 한 달간의 여행을 떠났답니다.


직장에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다가 퇴사를 결심하고 무작정 비행기표를 끊었어요. 겁이 많아서 이동 경로와 숙소는 미리 정해놓았고요. 크로아티아와 이탈리아에서 각각 일주일씩 머물 수 있도록 일정을 짜고 다른 여행지를 선택해서 동선을 확정했어요. 유럽은 보통 북에서 남쪽으로 여행을 하는 것 같은데, 저는 좀 다르게 이동했어요. 가고 싶은 곳을 먼저 정한 뒤에 가장 효율적인 이동 경로, 이동 수단, 숙소 등을 정한 거죠. 안전에 대한 두려움과 혼자 여행에 대한 불안함이 커서 야간 기차를 이용하는 대신 낮 기차나 비행기를 타고 이동했어요. 생각보다 비용이 많이 추가되지는 않았답니다. 좋은 여행 플래너를 만난 덕분이었죠.


보통 같은 시기에 유럽으로 여행을 떠나면 한번 만났던 한국인들은 여행이 끝날 때까지 자주 만나게 된다더라고요. 하지만 저는 반대방향으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았고, 아예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때도 있어서 한번 만났던 여행자를 다시 만난 경우는 일주일간 머물렀던 이탈리아에서 뿐이었어요. 외국인과 어울린 깜냥도 못 되어 한 달 동안 이방인처럼 철저하게 혼자가 되었답니다. 숙소를 찾아가고 그날그날의 여행 일정을 짜고 식당을 정하고 슬렁슬렁 걸으며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어요. 혼자였기 때문에 약간은 긴장한 상태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다 보니 그동안 직장에서 받았던 스트레스가 별 거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직장생활이 전부인 양, 우물 안에 갇힌 개구리처럼 우물만 쳐다보며 살았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세상이 이렇게나 넓은데 그 좁은 곳에 갇혀서 스트레스를 만들어내며 살았다니.. 여행이 끝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도 여행지에서 느꼈던 ‘순간의 소중함, 여유로운 마음’ 등을 잊고 싶지 않았죠.


여행지에서 돌아온 뒤 바로 바삐 돌아가는 학원 생활을 시작했지만 마음 한 편에는 늘 여유로움에 대한 갈망이 있었어요. 다시는 예전으로 - 일에만 파묻혀 일만 하며 사는 삶 - 돌아갈 수 없게 된 것 같아요. 그렇게 몇 년을 보낸 뒤 다시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되었네요. ‘미작(글쓰기 모임)’에서 슬렁슬렁 걸으며 내면을 여행하기 시작한 거죠. 기존 여행과 다른 점은 혼자 시작한 이 여행에 H님을 비롯한 멋진 멤버들이 함께 해 주신다 거예요. 자신의 스타일을 강요하거나 간섭하지 않고, 그저 지켜보며 잘하고 있다고 잘 찾아가고 있다고 격려해 주고 용기를 주셔서 얼마나 마음이 벅찬지 모른답니다.


특히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모임이라 ‘논리나 통찰력, 이성적 사고’를 지향하고 그것만을 중시하기 쉬운데, 정이 많고 마음 따뜻한 H님이 균형을 잃지 않도록 함께 해주셔서 정말 좋아요. 부족하다고 여기는 부분을 용감하고 진솔하게 드러내는 H님의 글을 마주하며 자주 반성한답니다. 글쓰기가 힘들어서 도망치고 싶었을 때 H님이 보여주신 용기 덕분에 저도 다시 힘을 낼 수 있었어요. 감사합니다.


우리 혼자 또 같이 하는 이 여행, 오래도록 함께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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