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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망 Aug 06. 2020

언젠가는 사라질 파도와 함께 아버지를

'영원한 외출(마스다 미리)' 을 읽고

평범한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잔잔하게 풀어내는 작가 마스다 미리.

마음이 지쳤을 때, 피곤할 때, 힐링이 필요할 때 그녀의 책을 찾아 읽게 된다. 재개관한 도서관 신간 코너에서 ‘영원한 외출’을 발견하곤 반가운 마음에 빌렸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그동안 있었던 일을 조곤조곤 해 주는 느낌이다. 시작은 삼촌이 돌아가신 이야기. 그래서 ‘영원한 외출’인가 했는데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는 아버지를 싫어했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아버지에 대한 미움과 원망이 가득해서 한 공간에 있는 것도, 대화를 나누는 것도 너무 싫었다. 20대 내내 책을 읽고 메일 상담을 받으면서 격해져 있던 감정을 아주 조금씩 내려놓았다. 큰 진전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여전히 그 당시 겪고 있던 모든 문제의 원인이 아버지라고 생각했고, 여전히 한 공간에 있는 것이, 대화를 나누는 것이 힘들었다. 한 번은 펑펑 울면서 아버지에게 원망과 분노를 쏟아놓은 적도 있다. 시간이 약이 되었는지, 결혼을 하면서 떨어져 지내게 돼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차츰 원망의 마음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물리적인 거리를 두면서 감정이 희미해지자 내 아버지로서가 아닌, 가족을 책임져야 했던 한 남자로서의 선택들(결과가 좋지 않았던)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무릎 수술을 하셨는데 공교롭게도 간병을 할 사람이 나 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며칠 동안 단둘이 있게 되었는데 예상보다 불편하지 않았다.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아버지에게 세웠던 단단한 날들을 하나둘씩 거둘 수 있었다. 최근 글쓰기를 통해 과거의 나와 만나면서, 어렸을 때 겪었던 모든 불행을 아버지 탓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성격 때문에 손해를 보는 사람이다. 성미가 급해서 이내 발끈한다. 그 탓에 아버지는 남들과 걸핏하면 충돌하고, “그럼 때려치우겠어!” “니들 마음대로 해!” 등등, 그 자리에서 결론을 내리고 손해를 보는 타입이다. 반론을 하면 발끈한다. 설득하려는 사람한테 발끈한다. 마음대로 일이 풀리지 않으면 발끈한다. 발끈하기만 하는 아버지. 그 탓에 나도 몇 번이나 부딪혔다.
 단순한 사람이기도 했다. 자기한테 의지하면 기뻐서 어쩔 줄 모른다. 또 아부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궂은 역할을 떠맡은 적도 있지 않았을까.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는 의식하지 못하고 의기양양하다. 즐거울 때만 웃는 무뚝뚝한 사람. 근면한 노력가. 성실한 사람이다. 인색하지 않은 것은 아버지의 미덕이었다. p.22


그녀의 글을 읽다 보니 나의 아버지는 어떤 사람인지, 아버지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가 궁금해졌다. 나는 과연 그녀처럼 아버지의 성격을 세세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아버지도 성미가 급해서 자주 발끈한다. 차분하게 이야기하다가도 갑자기 불같이 화를 내는 모습이 싫었다. 어렸을 때는 그런 아버지를 피했고, 성인이 되어서는 자주 부딪쳤다. 엄마가 가끔 “네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가 정말 기뻐하셨어.”라고 말씀하셔도 별 감흥이 없었다. 그저 자주 화를 내는 아버지가 불편했다.


아버지는 한번 말을 시작하면 끝이 없다. 그걸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나는 말이 길어질라 치면 자리를 피했다. 그런 나와 달리 남편은 아버지에게 자주 말을 건다. 중간중간 질문을 하며 자꾸자꾸 이야기를 이끌어 낸다. 그런 남편 덕분에 얼마 전에는 아버지의 군대 시절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그 이야기 속에는 에너지 넘치는 청년이 있었다. 아버지가 아닌 청년의 이야기.


아버지는 옛날부터 홋카이도에 가보고 싶다고 곧잘 말했다.

“아빠, 다녀오시죠? 혼자 가볍게.”

나도 엄마도 여동생도 누구 한 사람 “같이 가요.”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당신이 운전하는 차로 천천히 여행하면서 홋카이도를 초종 목적지로 하고 싶은 것이어서, 다들 그런 데 어울리는 것은 질색!이라는 분위기였다. 어차피 혼자 고집부리고, 성질을 낼 것이 눈에 보였다. 결국 아버지가 홋카이도 땅을 밟는 일은 없었다.

같이 가주었더라면 좋았을걸.
아버지가 죽은 뒤에도 그렇게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때 같이 가고 싶지 않았던 내가 아버지의 딸이다. p.94


후회하지 않고 '나는 그런 딸'이라고 인정해버리는 그녀가 부럽다. 아버지를 원망하면서도 마음 한 편에는 못된 딸이라는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분노를 누그러뜨리고 아버지와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못되게 굴었던 나 자신을 용서하는 시간도 필요하다. 그 당시에 아버지를 미워하고 원망하고 분노했던 나도 아버지의 딸이다. 희미한 감정으로 이유 없이 원망하는 대신 한 인간으로서의 아버지를 인정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지금의 나도 아버지의 딸이다. 사회가 정해놓은 ‘좋은 딸’의 역할을 하려고 스스로를 압박할 필요는 없다. 내 모습 그대로, 대신 원망이 아닌 이해를 기반으로 아버지에게 다가가고 싶다.


책을 읽은 날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다. 스마트폰이 너무 느려서 바꾸고 싶다고 하셨다. ‘귀찮다...’라는 마음이 먼저 들었지만 흔쾌히 약속을 잡았다. 이번에는 아버지의 말이나 행동을 지레짐작해서 화를 내지 말아야지.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대리점에 도착해서 스마트폰 기종을 고르고, 요금제 설명을 듣고, 추가 할인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들은 뒤에 결정했다. 아버지도 나도 왠지 느긋하게 설명을 듣고 의논했다. 나에게 모든 것을 의지해서 결정하는 아버지가 낯설었다. 70대 중반을 향해 가는 그가 이젠 정말 할아버지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 같았으면 여러 번 화가 났을 텐데 이번엔 매우 평온한 한 시간을 보냈다.  


슬픔에는 강약이 있다. 마치 피아노 리듬처럼 내 속에서 커졌다가 작아졌다. 커졌을 때에는 운다. 시간이 지나면 그런 파도도 사라질 거라는 예감과 함께 슬퍼하고 있다. p.73


코로나로 인해 가족들과 함께 할 시간이 많아지면서 아버지도 자주 만나게 된다. 아버지를 피하고 외면했던 그동안의 시간을 만회하라는 듯이. 대화를 나누다가 화가 나서 날카로운 말이 튀어나오려고 하면 크게 심호흡을 한다. 아버지의 말 때문이 아니라 긴 세월 동안 쌓여 있던 은 감정이 불쑥 튀어나와 화를 내려고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내가 힘들었던 것보다 더 많이 더 깊이 힘들었을 한 인간을, 내 아버지를 이해하고 싶다. 언젠가는 사라질 파도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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