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주부. 시키는 사람도 없는데, 딱히 무언가를 이루고 싶은 것도 아닌데 매일 글을 쓴다. 여자, 기혼, 아이 없음, 보통 체중, 보통 키, 평범한 외모.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글쓰기 모임에 참여하고, 지척에 사는 조카들을 돌본다.
2.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는 매우 활발했고, 중고등학교 때까지는 소심하고 예민했으며, 대학 때는 답답한 시골에서 벗어나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는 사실에 기뻐 날뛰었다. IMF가 터지면서 진짜 가난을 체감하게 된 뒤, 휴학을 하고 1년간 일만 했다.
가난하고 비루한 인생을 비관하면서 ‘대학을 졸업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라는 생각에 퇴학을 고민하기도 했다. 삶에 쪼들려 한껏 거칠어진 나를 문득 깨달았던 날, 복학을 결심했다. 친구가 나를 만나기 위해 일하는 곳 근처에 왔었는데, 지나가는 우리에게 괜히 시비를 걸어 욕하는 상인에게 지지 않고 욕을 했다.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던 친구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아무렇지 않게, 지지 않으려고, 메마른 마음으로 욕을 뱉어내는 내가 부끄러웠다. 그 순간은, 그 친구의 표정은, 영혼 없이 삶을 비관하기만 하던 바짝 마른 나를 정신 차리게 했다.
나는 쉽게 물드는 사람이다. 욕하는 사람 옆에 있으면 같이 욕하고 예의를 차리는 사람 곁에 있으면 나도 예의 바른 사람이 된다. 학교로 돌아갔다.
장학금을 받고 각종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버는 돈이나, 휴학을 하면서 벌었던 돈이나 그게 그거였다. 몇 십만 원을 더 번다고 해서 벗어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경과 상황을 탓하며 메마른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학교로 돌아간 나는 임용고시를 보겠다며 생계에서 몇 걸음 도망쳤다. 다른 가족들이 내 몫의 짐을 더 짊어졌다.
첫 시험에 떨어지고 임용 학원에서 보조 일을 하면서 한 번 더 도전했다. 아쉽지도 않은 점수 차이로 떨어진 뒤 보습학원에 들어가서 매달 달콤한 월급을 받게 되었고, 그렇게 학원에 눌러앉았다. 공부하는 재미에 빠져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수업 준비를 하고, 엄마의 배려로 월급의 전부를 쓰면서 돈 쓰는 재미를 알아갔다. 학원을 그만두고 한 달간의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학원에 들어가 그곳을 성장시키기 위해 온 힘을 다하기도 했다. 약속했던 월급을 주지 않은 원장 덕분에 홀로 여행을 떠났다가 한국에 돌아와서 여유 있는 삶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일을 하느라 잊고 있었던 포켓볼을 제대로 배우기 위해 모임을 찾아갔고,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늦은 나이에 결혼했지만 급하게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어서 여유를 부리다가 3년이 지났다. 시험관을 해야겠다 싶어 휴직을 하고, 오늘을 산다.
3.
올해부터 아침에 일어나면 물을 한잔 마시고 잠자리를 정리한다. 1월부터 쓰던 액션 일기 대신 최근에는 모닝 페이지를 쓴다.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감사일기를 쓴다. 모닝 루틴의 대부분이 글쓰기다. 저 활동들을 착착 진행하면 좋겠지만 일어나자마자 최소 20분, 중간중간 몇십 분씩 스마트폰을 들여다본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한 시간을 훌쩍 보내기 십상이다.
그 뒤에 조카들을 돌본다. 한 명 또는 두 명, 어떤 날에는 세 명. 밥을 챙겨주고 투닥거리는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하다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직접 음식을 하는 것도 아니고 (친정 엄마가 준비해 놓은 밥을 주거나 시켜 먹거나) 아이들과 노는 것도 아닌데 정신이 없다. 그 와중에 틈틈이 책을 읽고 가끔 글도 쓴다.
오후 5시부터 슬슬 영어 공부를 시작한다. 아이들이 저녁을 먹을 때, 설거지를 할 때 몇 문장을 외우다가 혼자 있게 되면 집중해서 하루 분량(4~5 문장)을 녹음한다. 9시 이전에 과제를 끝내는 것이 목표인데 11시를 넘기는 날도 종종 있다. 퇴근한 남편과 저녁을 먹고 영어 공부를 끝낸다. 자기 전까지 스마트폰을 보거나 책을 읽거나 글을 쓴다.
4.
지금의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과연 무엇일까. 나를 어떤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주부’ 말고 다른 말은 없을까. 요즘 나의 하루 일과를 보면 나는 영락없는 작가다. 그렇다면 나는 작가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