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푼젤 쉐도잉(영감 프로젝트)이 한 바퀴 끝났다. 쉐도잉은 들리는 억양, 감정, 강세 말투 등을 똑같이 따라 말하는 것이다. 1월부터 9월 말까지 라푼젤 한 편을 190편의 영상(15~25분)으로 나눠 녹음했다.
학교 공부 외에 따로 영어 공부를 한 적이 없다. 학원을 다닌 적도 전화 영어를 해본 적도 없다. 게다가 암기를 싫어해서 고등학교 때까지 듣기만 열심히 했다. 영어도 어차피 언어인데 아이들처럼 들으면 되는 거 아니냐며. 문제는 듣기만 했다는 거다. 아이처럼 언어로 배우려면 따라 말하기도 해야 하는데 듣기만 했으니, 의미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니 내 것이 될 리가 있나. 한 달간 호주 여행을 갈 때도 ‘니모를 찾아서’를 몇십 번 보고 말았다. 어찌어찌 듣기는 하는데 말은 한마디도 못 했다. 소심하지만 완벽을 추구하는 성격 탓에 어색하게 들리는 영어를 내뱉는 것이 두려웠다.
여행을 할 때마다 영어 공부를 하겠다고 다짐했지만 현실로 돌아오면 금세 잊었다. 작년 1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유튜브에 있는 자료로 쉐도잉을 시작했다. 쉽고 재미있어 보이는 라푼젤 당첨. 블로그에 각오를 올리고 호기롭게 시작했지만 3개월도 되지 않아 포기했다. 꾸준히 하지 못하는 내가 한심했다. 쉐도잉을 시작할 즈음에 블로그 이웃이 알려준 ‘영감 프로젝트 : 라푼젤 쉐도잉’을 염두에 두다가 올해 1월부터 시작하는 팀이 있어서 합류했다.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제대로 해보고 싶었다.
녹음한 내 목소리를 듣는 것이 괴로웠다. 부끄러웠다. 목소리, 발음, 억양.. 모든 것이 마음에 안 들었다. 함께 시작했던 멤버 한 분이 한 달 만에 그만두었다. 끝까지 할 수 있을까.. 의심이 생기고 불안해졌다. 2주마다 오프 스터디가 있는데 3번째 스터디에서 좋아졌다는 칭찬을 받았다. 의지가 생기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하지만 다음 주에 선생님의 피드백(발음, 억양)을 잔뜩 받고 다시 위축됐다. 포기하지 않기 위해 블로그에 자주 영어 공부에 대해 썼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나의 성향을 최대한 이용했다. 소문을 내면, 자주 공언해 놓으면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끝까지 하겠지.
100일을 크게 자축했다. 블로그에 100일 자축 글도 올렸다. 사실 그 당시 나는 매일 나 자신과 싸웠다. R과 L 발음, F와 P 발음, won't발음, 빠른 말, 음이 높은 노래... 포기하고 싶었다. 아는 단어도 많지 않은데 이렇게 외우기만 한다고 뭐가 될까, 의심이 고개를 들었다. 다른 멤버들은 다 잘하는데 나만 못하는 것 같아서 때려치우고 싶었다. 포기할만한 핑곗거리를 찾았다. 쉐도잉을 하면서 단어도 암기하고 한글 해석도 외우고 영작도 하고 싶었지만 욕심을 부리다가는 정말 포기해버릴 것 같아서 일단 발음, 억양, 강세에만 신경을 쓰기로 했다.
5월 중순에 큰 슬럼프에 빠져서 3일 동안 과제를 하지 않았다. 삶에서 영어를 모두 치워버렸다. 이렇게 힘들고 괴로운데 계속할 필요가 있을까.. 하필 100번째 녹음을 하는 주간이어서 멤버들은 100번의 녹음을 축하했다. 습관을 만들기 위해 나에게 필요한 기간 100일. 지친 나를 달래기 위해 100일을 자축했지만 진정한 100일은 100번째 녹음을 한 지금인데.. 혼자 뒤처져서 뭐 하고 있는 건지.. 속상했다. 쉬는 동안 멤버들이 카톡으로, 블로그 댓글로 응원해주었다.
깊은 슬럼프를 지나 다시 시작한 녹음은 금세 탄력이 붙었다. 스트레스를 붙잡고 부풀리는 것보다는 잠깐 쉬었던 것이 도움이 되었다. 6월 이후로는 습관이 되었는지 큰 슬럼프 없이 매일 녹음을 이어갔다. 녹음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짧아지고 간단하게나마 영작을 하는 여유도 생겼다. 자신감을 잃을 때마다 첫 번째 녹음 파일을 들었다. 어찌나 오글거리는지.
7월의 어느 날, 영어 과제를 하던 조카가 모르는 것이 있다며 질문했다. 문제집을 보면서 단어와 문장을 읽어주고 해석하다가 깨달았다. 영어 발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구나. 전에는 아이들이 쉬운 단어를 물어봐도 절대 말하지 않고 인터넷에서 찾아 들려줬다. 내 입에서 영어를 내보내는 것은 강남 한복판에서 춤을 추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변화를 깨닫고 나니 더 재밌어졌다. 피드백이 많아도 무덤덤해지고 녹음하는 시간이 하루 일과로 자리 잡았다. 완전한 습관이 된 듯한 느낌.
작지만 뭔가 해냈다는 성취감이 자존감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일을 해내야겠다는 용기로 발전합니다. (타이탄의 도구들, 팀 페리스)
영어 문장을 하나하나 외우는 순간 성장의 성취감을 느꼈고, 매일 과제를 올리고 피드백을 받으면서 대단한 것을 해냈다는 기분이 들었다. 특히 하기 싫은 마음을 이겨낸 날에는 척척 자신감이 쌓였다. 작은 일이라도 매일 꾸준히 하다 보면 뭐든 해낼 수 있을 거라는 나에 대한 믿음. 아직 큰 목표를 세우는 것은 서툴지만 쪼개진 계획, 하루하루 활동에 집중해서 매일 해내는 것은 이제 자신 있다. 하루아침에 로또처럼 무언가가 이루어지는 일은 없다. 오늘 이 하루가 쌓여 나의 미래를 결정한다.
이번 주부터 라푼젤 졸업반이 시작되었다. 라푼젤 한 편을 ‘4주, 3주, 2주, 랜덤 연습 1주.. 등’ 다양한 방법으로 10 회독을 하는 것이 목표다. 10회 차에는 전체 영상을 한 번에 녹음하는데 졸업반을 끝까지 한 멤버는 몇 명 없다고 한다. 20기는 시작부터 매일 모든 멤버가 과제를 올리고 있다. 느낌이 좋다. 나를, 꾸준함의 힘을 믿는다.
무언가를 잘하고 싶을 때, 잘할 수 있는 길은 매일 꾸준히 하는 것입니다. (매일 아침 써봤니, 김민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