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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망 Sep 25. 2020

오해와 편견, 이해와 공감

'축복받은 집 - 줌파 라히리'를 읽고

9월에는 하루가 느슨하게 흘러간다. 무엇을 해도 시간이 남아서 휴가를 보내고 있는 것 같다. 1월부터 해 왔던 모든 활동(영어 공부, 글쓰기, 독서)을 그대로 하는데도 여유가 있다.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다그치는 자기 계발서 대신 소설을 읽어서 그런가.


작년 9월, 일주일에 한 번씩 독서모임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전까지 독서의 목적은 오로지 힐링이었다. 머릿속이 복잡하고 마음이 답답할 때 마음을 위로해 줄 에세이나 심리 서적을 주로 읽었다. 조용히 책을 읽는 시간을 가지지 않으면 삶이 온통 엉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은 나에게 어지러운 삶을 정리해 주고 위로해 주는 친구였다.


작년 독서모임을 시작으로 자기 계발서를 읽으면서 의지를 불태우기도 하고 인문학 책을 읽으면서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 최근에는 소설의 즐거움을 알게 되어 매달 한 권씩 소설을 읽어볼까.. 했는데 ‘호밀밭의 파수꾼’을 시작으로 네 권째 소설을 읽고 있다. ‘해야 한다’는 외침에서 벗어나 휴가를 즐기는 마음으로 소설에 푹 빠져 지낸다. 에세이만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줄 알았더니 소설도 그렇다.  




줌파 라히리의 ‘축복받은 집’은 미작(글쓰기 모임)에서 선정한 책으로 9편의 단편이 담겨있다. 사전 지식 없이 책을 펼쳐 들었다. 초반 세 편까지는 생소한 이름 때문에 이야기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작가인 줌파 라히리가 인도계 미국인이라서 그런지 인도 이름, 문화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해가 어려워서 헤맸다.


다만 분명한 것은 내가 인도에 대해, 인도 사람들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내가 아는 인도는 지저분하고 위험하다는 것이 전부다. 길거리에는 소와 개가 어지러이 돌아다니고, 죽은 사람을 화장한 갠지스강에서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해 목욕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 그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인도는 내게 여행지일 뿐이었고, 인도 사람들은 여행의 일부일 뿐이었다.


처음 세 작품을 읽으면서는 인도에 대한 편견과 이미지를 깨느라 바빴다. 멋대로 만들어 둔 이미지와 싸우느라 작품에 빠져들어 즐기지 못했다. 그러다가 네 번째 단편 ‘피르자다 씨가 저녁 식사에 왔을 때’를 읽으면서 흥미를 느꼈다.


어린 소녀 릴리아의 부모는 인도 출신으로, 미국에 살면서 이웃끼리 왕래가 없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한다. 말 상대를 찾기 위해 인도 사람을 찾아 초대하는데 그중 한 사람이 ‘피르자다’ 씨다. 1년 기한의 방문 교수 자격으로 미국에 와 있는 그는 파키스탄의 내전 때문에 가족(일곱 딸과 아내)의 생사를 알 수 없다. 릴리아의 집에 자주 방문하여 이야기를 나누고, 뉴스를 통해 고향의 소식을 듣는다.


방문할 때마다 단정하게 차려입고 릴리아를 위해 사탕과 초콜릿을 준비해오는 피르자다 씨는 몸은 미국에 있지만 온 마음은 고향인 다카에 있다. 릴리아는 어느 날 텔레비전에서 전쟁을 피해 도망쳐 온 동파키스탄 난민들이 우글거리는 인도 국경을 보게 된다. 탱크, 쓰러진 건물들, 낯선 나무들의 숲을 본 그녀는 그날 밤 피르자다 씨가 준 초콜릿을 먹으면서 그의 가족이 안전하고 건강하기를 바라는 기도를 한다. 핼러윈 때 인도와 파키스탄이 점점 전쟁에 다가간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한 달 뒤 파키스탄이 항복한다.


무엇보다도 그 기간 동안 세 분이 하나의 음식, 하나의 몸, 하나의 침묵, 하나의 공포를 나누는 하나의 사람처럼 보였다는 것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축복받은 집 '피르자다 씨가 저녁 식사에 왔을 때' p.220


파키스탄의 항복 소식을 듣고 얼마 후 피르자다 씨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몇 달 뒤 릴리아 가족에게 편지를 보내서 모두가 안전하다는 소식을 전한다.


방문할 때마다 들고 오는 초콜릿, 단정한 차림, 고향 다카에 맞춰져 있는 회중시계 등의 장치들로 인해 고향과 고향 사람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특히 달콤한 초콜릿은 파키스탄 내전이라는 무거운 상황에서도 따뜻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던 것 같다.


인도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는 나와 아직 어린 릴리아가 비슷하게 느껴졌다. 세 번째 단편까지는 인도인의 문화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면 ‘피르자다 씨가 저녁 식사에 왔을 때’에서는 릴리아의 시선을 통해 이민자들의 삶을 엿보면서 공감하기 시작했다.


릴리아의 시선을 계기로 나머지 단편들은 꽤 몰입하여 읽었다. 재밌게도 가장 이해가 어렵고 흥미가 생기지 않았던 것은 ‘축복받은 집’이다. 책 제목이라 기대했는데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대신 마지막 편인 '세 번째이자 마지막인 대륙‘이 참 좋았다.


이민자로서의 시작과 적응 과정, 100세가 넘은 크로프트 부인과의 만남, 주인공의 아내 말라가 뒤늦게 미국에 와서 적응하는 과정, 부부의 30년간의 여정이 시간 순으로 전개되어 이야기를 따라가기가 수월했다.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지는 않지만 낯선 곳에 적응해 가는 사람들을 찬찬히 보여줘서 깊이 공감되었다.


"저 여자는 완벽한 숙녀야!"
이제 내가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조용히 웃었기 때문에 크로프트 부인은 듣지 못하였다. 그러나 말라는 내 웃음소리를 들었고 사상 처음으로 우리는 서로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축복받은 집 '세 번째이자 마지막인 대륙' p.388


뒤늦게 미국에 온 말라에게 몰입하여 긴장한 상태로 읽다가 크로프트 부인이 말라에게 “저 여자는 완벽한 숙녀야!”라고 외치는 장면에서 긴장이 풀어졌다. 나도 같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 그와 그녀는 새로운 삶에 잘 적응하고 사이좋게 살겠구나..라는 생각에 안도했다. 예상대로 부부는 새로운 대륙에 적응하며 벵갈인 친구를 만나고, 싱싱한 생선을 사 먹고, 월계수 잎과 정향을 파는 곳을 알아낸다.


그저 상황을 보여준 것뿐인데 이민자로서의 삶을 경험한 듯한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앞서 만난 8편의 단편 덕분에 그들의 삶과 문화, 그들이 좋아하는 것을 알게 되어서 그런지 마지막 소설을 가장 부드럽게 읽을 수 있었던 같다. '싱싱한 생선을 사 먹는 것'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이해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 마음을 더 생생하게 느낀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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