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우주에서 나의 우주로
'비로소 나의 여정'을 읽고
*
한창 바쁘게 일할 때는 여행 에세이를 자주 읽었다. 실은 여행 에세이를 주로 읽었다. 그저 여행을 부러워하는 마음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읽다 보니 알게 되었다. 느린 시간, 편히 숨 쉴 시간을 책에서 찾아 헤맸던 것. 어느 순간부터 여행 에세이를 읽지 않게 되었는데 서점에서 구경하다가 나도 모르게 데려오게 되었다. 사진보단 글이 많고, 잠깐 들춰 읽게 된 작가의 글이 맘에 들었다. 그냥.. 마음에 들었다. 어디 어디를 다녀왔다가 아니라 무언가 자기의 이야기를 들려줄 것 같은 느낌.
출근길에 무거운 가방의 부담을 이겨내고 책을 들고나갔다. 지하철에서 편히 읽기 좋을 것 같아서.
금세 빠져들어 내릴 곳을 놓치지 않을까.. 신경 써야 했다. 별 이야기는 아니다. 야근이 반복되는 삶에 지쳐 시간 부자로 살기 위해, 자신을 좋아하고 싶어서 퇴사하고 여행을 떠난 이야기. 어찌 보면 식상한 이야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빠져든다. 과거의 내가 떠올라 숨을 고르고 기억을 더듬는다.
*
7개월 만에 미용실에 펌을 하러 가면서 책을 데려갔다.
어떤 책과 함께 하느냐에 따라 머리를 하는 고행의 시간이 지루한 시간이 될 수도, 온전히 책에 집중하는 시간이 될 수도 있다. 가져갈 책을 신중하게 골라도 실패할 때가 있는데 고민 없이 선택한 이번 책은 완벽했다.
길고 긴 4시간 동안 작가의 이야기에 푹 빠져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고, 문득 떠오르는 과거의 나를 만났다. 위스키에 대한 글을 만났을 때는 호주에서 와이너리에 방문했던 때가 떠올랐고, 숙소에서 정성을 들여 밥을 해 먹었다는 대목에서는 친구와 떠난 여행에서 장을 보고 밥을 해 먹던 순간이 떠올랐다. 작가처럼 그때의 심정을 구체적으로 적어두었다면 다시 읽어봐도 좋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든다. 여행지에서 쓴 일기가 있는데 그것을 그대로 옮겨 적어보았더니 문장이 엉망이라 정리가 쉽지 않다. 하지만 이런 글을 읽을 때마다 나도 여행지에서의 일기를 꼭 정리하고 싶다는 생각이 고개를 든다.
여행기의 탈을 쓴 인생기. 그녀를 따라 더블린, 런던, 파리, 베를린 등을 여행하며 나의 삶을 되돌아보았다. 글을 쓰고 싶어서 변호사를 그만두고 여행을 다녀온 뒤에도 2년이나 방황한 그녀. '하하밤'이라는 일인 출판사를 차리고 책을 펴냈다는 그녀를 보면서 '하하밤'에서라면 느릿느릿 쌓여가는 내 글도..라는 즐거운 상상을 했다.
사실 일인 출판사를 차려 출판한 책을 만나면 허술함을 느낄 때가 있어서 아쉬웠는데 이 책은 참 알차다. 차분하고 담담하게 이야기를 풀어놓는 작가의 글투도 좋고 내 삶을 돌아보게 하는 내용도 좋다. 온전히 작가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그녀의 글을 읽다 보면 나에게 말을 거는 것 같다. '당신은 잘 살고 있나요? 너무 바쁘다면 잠시 숨을 고르고 멈춰보세요'라고 속삭이는 듯.
잘못 인쇄된 부분에 '제대로 된 문장이 적힌' 얇은 스티커를 발견했을 때는 하나하나 작업했을 작가의 손길이 느껴져서 좋았다. 진솔한 내용만큼 책도 정성껏 만든 것 같아 더 열심히 읽게 되었다.
정신없이 여행 에세이만 읽던 과거의 '바쁜 나'는 현실을 벗어나고 싶었다. 시간 부자가 된 지금의 나는 새로운 세상을, 내가 모르는 세상을 경험하고 싶다는 생각에 여행기를 집어 든다. 이 책은 공간으로의 여행이 아니라 한 사람이라는 우주를 시작으로 나의 우주에 닿게 한다.
어쩌면 나도 작가처럼 '온전히 나에게만 집중하는 소중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모른다. 대학 때 직접 시간표를 짤 수 있다는 흥분도 잠시, 준비 없이 주어진 자유에 허덕이며 각종 이모집, 고모집의 제육볶음과 소주를 친구 삼던 때와는 다른 시간. 천천히 내 삶의 리듬과 속도를 찾아가는 시간.
책장을 덮으면서 생각한다. 나를 잊고 바쁘게 지내던 시절에서 벗어나 아련하게 그때를 회상하고 있는 내가 꽤 마음에 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