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에 함박눈이 내렸어요. 시래기 된장국을 끓여 간소한 저녁을 먹고 지난주에 만든 유자 생강차를 마시고 있었어요. 문득 창밖을 보니 눈이 내리고 있더라고요. 주섬주섬 옷을 입기 시작했죠. 남편은 눈을 좋아하지 않아요. 특히 집에서 쉬고 있다가 다시 옷을 입고 외출하는 것을 귀찮아한답니다. 남편과 많은 것을 공유하지만 눈 내리는 날의 시간은 온전히 저만의 것이에요.
일 년 전 이사를 했어요. 시내에서 차로 10여 분 거리에 있는 조용한 동네랍니다. 이 동네에 온 뒤로 일찍 잠자리에 들어요. 불과 6개월 전만 해도 쉽게 잠들지 못했습니다. 새벽 1시는 되어야 잠이 들고 늦게 일어나는 올빼미였는데, 요즘엔 밤 10시만 되어도 졸음이 쏟아져요. 이곳은 9시가 되면 모든 불빛과 소음이 잠들거든요. 서울에서는 느끼지 못한 밤의 고요한 시간을 선물 받습니다. 오늘처럼 눈이 내리는 날엔 더할 나위 없이 조용하고 포근한 세상이 펼쳐진답니다.
눈이 오면 공기가 따뜻해지는 것 같아요. 가볍게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어요. 장갑도 끼지 않고요. 눈은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요. 보고 만지고 밟으며 온몸으로 마주하는 것이 참 좋습니다.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외출한 사람은 저 밖에 없었어요. 한 걸음 한 걸음, 하얀 융단이 깔린 길을 걷는데 눈이 내리는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정말이에요. 쌓이는 소리가 아니라 눈이 내리는 소리. 들어본 적 있나요? 전 처음 들어봤어요. 빗소리는 들어봤는데 눈이 내리는 소리라니.. 소리를 놓칠세라 숨죽여 가만히 서 있었답니다.
타닥타닥. 토독 토독. 툭툭툭. 사락 사락. 삭삭.
장작 타는 소리 같기도 하고 고기 굽는 소리 같기도 하고. 그렇게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새소리가 들렸어요. 모든 존재와 함께 하는 기분. 처음 만나는 세상이었어요.
어릴 적 살던 동네는 눈이 많이 오는 곳이에요. 밤새 눈이 내린 날엔 일어날 때부터 세상이 달라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답니다. 공기가 미묘하게 달랐거든요. 눈을 뜨자마자 달려 나가서 눈밭을 뒹굴었어요. 하늘을 향해 얼굴을 들어 올려 입안 가득 눈을 담기도 했고요.
이제 눈밭을 뒹굴지도, 입을 벌려 눈을 맛보지도 못하지만 온몸의 감각을 활짝 열어 하얀 세상을 마음에 담습니다. 두 손 가득 눈을 담아 천천히 뭉쳐 보았어요. 눈은 뭉쳐질 때도 소리를 내요. 뽀드득뽀드득. 한 주먹에 꽉 쥐지 않고 천천히 뭉치다 보면 살아 있는 눈송이들이 서로 손을 맞잡는 듯한 기분이 들어요. 혼자일 때는 그 무엇보다도 부드러워 보이는 눈송이들이 손을 맞잡으면 단단해집니다.
실은 낮에 출간 기념회가 있었어요. 눈을 뭉치듯 매일의 소소한 일상을 엮어 <오늘>이라는 제목의 책을 냈답니다. 애정 하는 책방 ‘내일’에서 열린 작은 모임이었는데 많은 분들이 찾아주셔서 벅찬 시간이었어요. 늦은 나이에 글을 쓰기 시작한 저에게 누군가는 그랬어요. 이미 늦었다고.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지금 시작해서 무엇을 할 수 있겠냐고. 그때 흘려듣길 잘했네요. 그 말에 붙잡혔다면 오늘의 저는 없었을 테니까요.
서울 생활을 접고 한적한 이곳으로 이사를 결정했을 때도 말리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나이를 먹을수록 도시에 살아야 한다고요. 교통이 불편하고 편의시설이 적은 곳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냐고 하더라고요. 그 말도 흘려듣고 이사하길 잘했습니다. 눈이 내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고 세상과 하나가 되는 시간을 선물 받았으니까요.
저의 삶을 돌아보니 누군가의 ‘이미 늦었다’는 말, ‘네 생각이 틀렸다’는 말에 휘둘릴 필요가 없더라고요. 세상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도, 대다수가 원하는 길과 다른 길로 들어서도 괜찮아요. 내 삶인걸요.
혹여 세상의 빠른 속도에 숨이 막힐 때가 생긴다면, 우리 집에 놀러 오세요. 달콤하고 알싸한 유자 생강차와 함께 고요한 시간을 선물할게요. 운이 좋다면 눈이 내리는 소리도 들을 수 있을 거예요.
오늘 하루도 무사히 잘 마쳤고 내가 이룬 것에 만족합니다. 나는 행복했고, 만족했으며, 이보다 더 좋은 삶을 알지 못합니다. 삶이 내게 준 것들로 나는 최고의 삶을 만들었어요. 결국 삶이란 우리 스스로 만드는 것이니까요. 언제나 그래 왔고, 또 언제까지나 그럴 겁니다. (인생에서 너무 늦은 때란 없습니다. p.275)